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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un Brief [신의주반공학생의거를 기억하는 이유] 통권277호
 
2023-11-21 14:17:13
첨부 : 231121a_brief.pdf  
Hansun Brief 통권277호 

손광주 전 남북하나재단 이사장


1. 신의주반공학생의거와 부다페스트의 소녀


기억력이 좋은 분들은 이런 시()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쏘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너는 열 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중략)

자유(自由)를 찾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아쥬로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에 불면의 염염한 꽃을 피운다.

부다페스트의 소녀(少女),

 

시인 김춘수가 쓴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다. 이 시는 1970년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다. 시인은 195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소련군의 총에 맞아 쓰러진 13세 소녀의 신문 기사 사진을 모티브로 하여 이 시를 썼다고 한다.

 

1956년 헝가리에서는 반()소련 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됐다. 19688월 체코슬로바키아 지식들의 ‘2000어 선언까지, 이 시기 동구권에서 반소(反蘇) 운동이 잇달아 일어났다. 하지만 프라하의 봄도 잠시뿐, 소련군은 탱크로 밀어붙여 이들을 모두 진입했다.

 

1956년 헝가리보다 11년이나 앞선 소련공산당 반대 운동이 신의주에서 있었다. 19451123일 발생한 신의주반공학생의거. 신의주반공학생의거는 1945년 제2차대전 종전 후 일어난 세계 최초의 반소 운동이다.

 

소련군은 선투기를 동원해 당시 15~18세의 신의주 중학생 시위대를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다. 이로 인해 신의주 동중학교, 사범학교, 1공업중, 2공업중 등 시위학생 23명이 현장에서 희생됐고, 350 명이 크게 부상당했다. 그리고 200여명이 체포돼 시베리아 유형(流刑)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 사건은 폴란드 헝가리 체코의 반소 운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신의주반공학생의거의 현재성

 

신의주학생의거는 78년이 지난 202311월 이 시점에서도 현재성의 의미를 뚜렷이 갖고 있다. 이유는 명료하다. 남북 분단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과 북은 국제법상 정전협정 체제에 있다. 따라서 사건 발생 78년이라는 시간의 흐름과는 관계없이 신의주반공학생의거는 분단과 정전협정 체제라는 객관적 현실에서 아직 과거완료형으로 처리되지 않은 사건이다. 흘러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진행형 의미를 강력히 내재한 사건이다. 단지 우리의 생물학적 기억과 사회적 기억에서만 희미해져 가고 있을 뿐이다.

 

신의주학생의거의 현재진행형 의미는 두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사건 발생 지역인 북한에 여전히 공산전체주의 독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신의주 학생들이 내세운 소련공산당 반대 즉 반공슬로건은 소련공산당의 지도?통제 하에 의해 성립된 김일성 정권이 소멸되지 않는 한 유효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소련공산당은 1991년 붕괴되었지만 당시 그들이 설계한 북한의 당과 국가 체제는 그대로이며, 북한 정권은 지금까지 3대 세습으로 독재권력의 대를 이어 왔고, 4대 세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여전하다. 따라서 신의주반공학생의거는 북한 지역에 자유와 평등, 인권, 민주주의, 법치가 실현되기 진까지는 과거완료형 사건으로 역사 속에 묻어버리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게 되어 있다.


둘째, 신의주학생의거 관련자들이 당시 38선을 넘어와 남한 땅에서 남긴 유산이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호국-산업화 과정에서 이들이 남긴 공로가 크다. 서북청년들은 반공단체를 결성하여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세력과 가장 치열하게 싸웠다. 1945년 신의주학생의거 당시 15~18세였던 이들은 20대가 된 19506.25전쟁 때 KLO(켈로)부대 등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웠다. 이들은 대한민국 반공 전선의 전위 역할을 가장 충실히 수행했다.

반공19615.16 혁명공약에서 국시(國是)로 채택되었다. 5.16은 군사쿠데타로 시작되어 유례를 찾기 힘든 성공한 혁명으로 그 역사적 임무를 완료했다. 당시의 반공공약은 비유컨대 양궁 경기에서 과녁의 정중앙 퍼펙트 골드 지점을 때린 적중의 국가전략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3. 신의주반공학생의거의 미래적 의미

 

현 시점에서 신의주반공학생의거의 미래적 의미는 구소련 붕괴의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1991년 소련공산당 해체까지 70여년 간 구소련은 대략 3단계를 거쳐 붕괴되었다.

 

1단계는 1953년 스탈린의 사망, 2단계는 소련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실패와 헬싱키 협정(1975), 마지막 3단계가 1980년대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소련 붕괴 전략이다.

 

스탈린의 사망은 구소련 수령제(首領制)의 사망이었다. 3년간의 권력투쟁 끝에 실권을 장악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했다. 19562월 제20차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흐루쇼프 서기장은 스탈린 통치 30년을 의혹·공포·테러 체제로 비난하며 스탈린 격하에 시동을 걸었다. 스탈린의 개인숭배는 수령론에 근거했다. 수령론은 노동계급 독재론 위에 성립된다. 흐루쇼프의 노동계급 독재의 약화는 수령독재의 약화를 의미했다. 스탈린의 수령론은 당시 소련의 거대한 영토, ()민족·다언어·다종교의 연방을 하나로 묶는 단결의 중심역할을 한 측면이 있었다. 당시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이 수령독재 전체주의에 보이지 않는 균열을 가져온 것이다.

 

소련 붕괴 2단계는 사회주의 경제의 실패가 결정적 요인이다. 1980년대 말~90년대 초 동구권 붕괴의 배경은 근본적으로 경제 건설의 실패였다. 마르크스주의 경제이론은 실패가 예견된 것이었다. 스탈린 시기에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에 따라 중공업(군수산업) 건설에 국가 자원을 집중했다. 농업 시스템을 정비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집단영농을 밀어붙인 탓에 1932~33년 우크라이나에서 400만 명 정도가 굶어죽는 대기근 사태(홀로도모르)가 발생했다. 소련 경제학자들도 1960~70년대에 이르면 마르크스주의 경제 건설 이론이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다만 비밀경찰의 감시와 도청이 무서워 대놓고 말을 못할 뿐이었다. 소련 경제는 내부적으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1975년 서방 진영의 나토(NATO) 회원국과 공산 진영 바르샤바 조약국 간에 헬싱키 협약이 체결됐다. 헬싱키 협약은 안보 분야에서 동서 긴장 완화가 주목적이었지만 경제?사회 및 인권 분야도 다뤄졌다. 미국 등 서방국은 헬싱키 협약을 통해 소련·동구권을 상대로 경제 지원을 해주기로 하고, 그 반대 급부로 인권 분야에 접근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영국 등 서방 진영은 경제 지원을 하면서 주요 정보통신 수단인 라디오?팩스?전화기 등을 대량 유입했다. 라디오 등 통신 수단이 소련에 유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소련사회와 외부 세계가 연결되었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대중음악 록큰롤과 영화?드라마들도 유입됐다. 미국의 소리 방송(VOA), 유럽의 소리 방송(VOE) 등이 동구권에 청취되었고, 삐라(전단지)는 수 억장이 서유럽에서 동유럽으로 날아갔다.

 

마지막 3단계는 1980년대 미국 레이건 정부가 대소련 전략을 냉전 전략에서 경제 전략으로 전환하고 최약점인 소련경제를 붕괴시키는 데 집중하였다. 레이건 정부는 스타워즈 프로젝트 등 소련과의 군비 경쟁, 중동 석유 생산량 조정 러시아산 석유의 유럽 수출 봉쇄, 소련군의 아프간 사태 개입 등을 유도하면서 미국은 끝내 구소련 붕괴에 성공했다.

 

3단계에 걸친 구소련 붕괴의 키워드를 요약하면 수령론의 붕괴 사회주의 경제 실패와 인권 유입 미국의 소련 붕괴 전략이다.

 

이상의 구소련 사례를 현 북한에 대입해 본다면 수령론은 붕괴되지 않았으나 90년대부터의 탈북 사태와 20년 간 유입된 한류 드라마 등으로 수령 체제의 기초가 약화된 것은 사실이며 1990년대 중반 대기근 사태 등 북한경제 실패는 벌써 확증되었으나 이후 한국?중국의 지원 및 핵개발을 통한 생존 게임으로 정권을 연명해왔고 북한인권 이슈는 유엔인권이사회의 어젠다로 상정된 지 25년이 되었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약 한국 정부도 미국 레이건 행정부처럼 대북 전략을 잘 수행하여 북한 정권과 노동당 해체를 유도할 수 있다면, 그 붕괴의 역사적 연원을 194511월 신의주 중학생들이 내걸었던 소련공산당 반대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같은 상상이 단순 희망사항(wishful thinking)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로써 다가올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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