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완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겸 경제교육단체협의회장(69)은 보수 정권의 경제 관료다. 이명박(MB) 정부 시절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과 국정기획수석비서관을 거쳐 고용노동부 장관을 지냈으며, 이후 MB 정부 마지막 기획재정부 장관직을 맡았다. 기재부 장관 재임 시절 부자 감세와 선별 복지를 일관되게 주장하는 등 전형적인 보수 경제 철학을 고수했다.
박 전 장관은 공직에서 물러난 뒤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직을 역임하고, 사외이사 신분으로 처음으로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을 맡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박 전 장관은 지금 한국 경제가 단순히 글로벌 불경기에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산업 경쟁력 자체에 적신호가 켜진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10년전 했던 전망보다 상황이 더 나빠졌다”며 “힘들 때 구조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전 장관은 “정부는 구조개혁의 방향만 제시했을 뿐 아직 구체적인 개혁 논의는 활발히 하지 않고 있다”며 “반론이 제기되는 과정에서 의견을 수렴하고 다듬어가면서 단기·중기·장기 과제를 구체화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제가 지난해 1.4% 성장에 이어 올해도 2%대 초반 성장이 예고되면서 장기 저성장 터널 초입에 들어선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경향신문은 당면한 경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 정파와 무관하게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다는 취지로 지난달 24일 서울 성동구 경교협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기획재정부 장관 재임 이후 10년여 만에 만났다. 그때도 한국 경제 잠재성장률 하락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 10년 전 전망과 지금을 경제 상황을 비교해보면.
“당시 예측보다 더 나빠졌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노를 열심히 저어야 한다. 물살 속도보다 조금만 덜 저어도 떠밀려 내려가게 된다. 지금이 그런 형국이다. 전반적으로 성장 활력이 위축됐고 저출생·고령화 추세가 당시 예측보다 훨씬 가팔라졌다. 반면 혁신이나 구조 개혁 노력은 전혀 없진 않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비춰 보면 미흡했다.”
-지난 10년간 보수와 진보 정부가 번갈아 집권했다. 그간 노동개혁이나 금융개혁 등 논의가 없지 않았지만, 정권 성향과 무관하게 구조 개혁이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위정자는 비전과 혜안이 부족했고, 지식인도 구조개혁을 해야한다는 총론은 있었지만 각론은 빈약했다. 거대 담론은 무성한데 실제 전략적인 부분은 무시됐다. 사회적 공감대 형성도 부족했다. 한국 사회에 갈등과 대립, 반목이 존중, 인내, 합의보다 훨씬 앞서 있다. 정책 생태계가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해 나가기 굉장히 힘든 풍토다. 그러다보니 개혁이 진도를 내지 못하고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지역 이기주의와 세대 갈등, 최근에는 교사와 학부모 갈등까지 나라 전체가 사분오열돼있다. 개혁은 상당한 저항과 고통이 수반되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이를 추동하려면 창조와 숙의, 헌신하는 리더십 등의 요소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그 어느 하나를 제대로 갖추기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한다.”
-정부가 바뀌어도 일정부분 이전 정부의 정책을 이어받는 연속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심지어 보수에서 보수로 정권이 바뀌어도 이전 정권을 지우는 형태가 많았다.
“그렇다. 윤석열 정부도 여러 구조개혁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미 ‘정권이 바뀌면 저건 뒤집으면 된다’는 식의 분위기가 너무 팽배하다. 국책연구원이나 관료들도 그간 수많은 학습 비용을 치렀기 때문에 바뀐 정부의 철학을 합리화해주는 정책을 내게 된다. 충분한 숙의나 검증 과정이 생략된 채로 자꾸 포장만 달리한 ‘재탕삼탕’ 정책을 남발하고 있다. 이는 날림정책, 대증 요법에 불과하다. 선거철이 임박하면 선심 정책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장관 재임 당시 큰 화두가 국책연구기관이나 공공기관의 독립성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관의 독립성이 지켜지기보다는 정부의 정책을 뒷받침 하는 쪽으로 ‘이용되는’ 경향도 있다. 공공기관이나 국책연구기관은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는가, 정부 정책을 지원해야 하는가.
“국책연구원이나 공공기관은 지식을 기반으로 정책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정치적으로는 중립성을 지켜야한다. 다만 행정부와 사법부 관계같은 독립성까지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 물론 연구나 분석을 할때 학자의 양심에 따라 적어도 정치적 중립성은 견지해야 한다.”
-저출생과 지방 소멸 문제도 더 심화한 것 같다. 원인은 어떻게 분석하나.
“이는 하루 아침에 불거지는 문제라기보다 시간을 두고 축적되면서 장기간에 걸쳐 전개되는 문제다. 정책 입안자들이 근시안적인 데다가, 정권이 5년 단임이라는 시계에 묶여 있다는 것도 영향을 준다. 그러다보니 멀리 내다보고 일을 하는 관행이 정책 생태계에 자리잡지 못했다. 당장 급하지 않으니까 시급성을 간과하고, 근원적인 대책 마련을 하는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잘못이 있다고 과거 정책 입안자 중 한명으로 자책하고 있다.”
-이를 개선할 구체적인 방향을 짚어준다면.
“우리는 선진국에 비해 여전히 가부장 문화가 팽배하다. 경제적 동기와 무관하게 가부장 문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러 캠페인을 생각해볼 수 있다. 드라마 등 대중 매체를 통해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걸 강조할 수도 있다. 또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가족 가치다. 가족 가치가 최근 경시되고 있지만 가족이야말로 대한민국을 이루는 기본 뼈대다. 가족이 있으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술, 담배, 마약, 도박 등 폐해도 가족 공동체에서부터 줄일 수 있다. 여러 가지 복지 문제도 가족 공동체에서 해결해나갈 수 있다.”
-올해 한국 경제에 대한 평가는.
“전망이 좋지 않다. 우리는 대외 의존도가 높은 나라다. 그런데 미국과 중국 경제가 작년보다 올해 더 안 좋을 것 같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는 경기가 나빠져서 단행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 경제는 부동산 쪽이 상당히 어려운 국면이다. 한국의 반도체 수출은 살아날 기미가 보이긴 하지만 예전처럼 V자 반등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에너지 가격은 안정돼 있지만 상방 리스크가 크다. 심지어 원화 가치가 이렇게 떨어져 있는 데도 수출 반등이 크게 안 되는 상황이다. 우리 수출 경쟁력, 수입 산업의 경쟁력 자체에 적신호가 켜졌다고 봐야한다. 여기에 고금리 여파가 본격화해 가계부채에 반영되면 구매력이 크게 약해질 것이다. 이미 건설경기도 부진흐름이 이어지고 있는데, 내수도 낙관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지금 경제상황과 정책 방향이 10년 전 이명박(MB) 정부 당시와 비슷한 것 같다. 집값이 한창 올랐다가 떨어지고, 세계 경제 상황도 안좋다.
“정책이 닮은 점이 있지만 그건 보수 우파 정부의 정향상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다른 점도 있다. 지금은 자유무역협정(FTA)은 상당히 많이 체결돼 있다. MB 정부 때는 FTA 체결을 통한 경제 영토 확장,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외환 방어막 구축, ‘거시 건전성 3종 세트’ 등 정책이 있었다. 외환 부문의 경우 지금은 적어도 대외건전성에 큰 문제는 없다. 지금은 미중 패권 경쟁 등 국제 상황 탓에 경제, 안보, 외교 등이 맞물려 돌아가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현 정부는 ‘경제 안보’에 더 역점을 두고 정책을 펼치고 있다.”
-올해 미국 대선을 앞두고 있는데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재선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가 돌아온다면 자유무역협정(FTA)을 두고도 문제삼을 우려는 없나. 트럼프 재선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트럼프 후보가 천명한 공약을 보면 충분히 걱정할 만한 요소가 있다. 그렇다고 이미 체결된 한미 FTA를 더 후퇴시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 미국은 의회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트럼프가 당선돼도 공약대로 모두 밀어붙이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다만 그의 재선이 한국에 도움될지를 예측하는 것은 내 역량을 넘는 일이다.”
-윤석열 정부도 MB 정부처럼 감세 기조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현 정부가 감세 기조를 천명하고는 있지만 실제 세율을 크게 낮추진 않았다. 공식적으로 이걸 감세 정책이라고 부르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한다. 상속세를 손봐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얼마나 국민적 공감대를 얻어서 이행을 하느냐에 따라 감세 여부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했던 것은 그동안 물가 상승에 비춰서 12년간 묶여있던 과세 구간을 약간 조정한 것에 불과하다.”
-정권 첫해에 법인세와 종부세 감세를 단행했다.
“그 역시 일부 과표구간만 조정했지 세율을 크게 낮추진 않았다. 종합부동산세 완화 조치는 감세 기조에 따라 했던 것이지만 야당도 묵시적으로 동의한 내용이다.”
-하지만 최근 보수 언론들도 감세에 따른 세수 부족을 우려하고 있다.
“최근에 세수가 많이 줄어든 것은 경기 영향이 크다. 특히 법인세 결손이 예상보다 커진 것은 수출을 비롯해 기업 경기가 살아나면 나아지지 않을까 한다. 세수가 부족하다는 것은 쓸 돈에 비해서 들어오는 돈이 적다는 것인데, 경기가 썩 좋지 않은 상황에서 세금을 더 올려서 맞추기보다는 아픔이 있더라도 지출 중에 자동적으로 늘어나게 되는 것, 즉 의무지출 일부를 정리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닐까 한다. 의무지출 중에 따져보면 사실 불요불급한 것들이 적지 않다.”
-지난 정권 때는 소득주도 성장이나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경제 정책의 방향이 명확했다. 반대로 윤석열 정부는 경제정책의 ‘비전’이 안보인다는 지적도 있다.
“이름이 부각될 정도로 큰 정책이 없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창조경제’ 등 대표 ‘브랜드’가 있었는데 지금 정권은 그런 것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정부의 간섭을 줄이고 민간 부문의 활력을 북돋는다는 큰 방향은 정책에 다 묻어 있다. 문제는 구조개혁이다. 큰 방향에는 동의하지만 이걸 장기간에 걸쳐 이행하겠다는 구체적인 논의와 계획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아직까진 부족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장관 재임 시절에 정책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 경제 위기를 극복할 아이디어가 있다면.
“그런 요술 방망이는 갖고 있지 않다. 다만 힘들 때 구조 개혁을 해야한다는 생각은 있다. 전세계 사례를 보면 경기가 안 좋을 때 대부분 구조 개혁을 한다. 한국도 외환위기 때 개혁을 많이 했다. 지금 경기가 안 좋으니까 이를 통해 오히려 국민들 공감대를 얻어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정부 지지율이 낮아 개혁을 추진할 동력이 없다는 분석도 있다.
“정부가 구조개혁에 대한 본격 청사진을 내걸고 추진하면 오히려 지지율을 회복할 수도 있다. 물론 청사진을 내놓으면 거기에 대한 반론도 제기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의견을 수렴하고 다듬어가면서 단기, 중기, 장기 과제를 구체화할 수도 있다.”
-규제완화는 진보정부가, 규제강화는 보수정부가 한다면 국민적 동의를 좀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현 정부의 구조개혁이 한편으론 기업에 유리하고 노동자에게는 고통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좋은 지적이다. 그러나 간과해선 안될 점은 기업 안에 노동자도 들어있다는 점이다. 기업이 잘 돼야 노동자도 잘 되고, 노동자의 사기가 올라야 기업도 더 잘 된다. 노사와 대립관계가 있다지만 ESG 관점에서 기업의 가장 큰 이해관계자는 노동자다. 그래서 꼭 기업한테 유리해서라기 보단, 노동자가 포함된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 노동개혁을 하자는 것이다. 당연히 필요하면 지배구조 개혁이나 주주개혁도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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