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앤포커스 4월.pdf
Hansun issue & focus 4월호
1. 들어가면서
4.19 민주혁명은 올해로 66주년을 맞는다. 혁명 발생의 원인은 1960년 당시 집권 자유당이 전 국민의 공분을 살만큼 공공연히 선거 부정을 자행하자 이에 격분한 청년 대학생들이 전국 각처에서 동시적으로 궐기, “부정선거 다시 하라”고 외치면서 집단적 가두 시위에 나섰다. 자유당 정권은 이 시위를 경찰의 총칼로 제압하려다가 180 여 명의 젊은 대학생들을 죽이고 1,000여 명이 부상당하는 끔찍한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온 국민이 궐기하면서 당시 고령의 이승만 대통령이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하야,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고 총선거를 통해 민주당 정권이 제2공화국으로 탄생했다.
학생들은 계급 집단이 아닌 사회적 신분 집단이다. 4.19 혁명은 이들 대학생들이 주도해서 성공한 정치 혁명이었다. 우리 국민들은 이 혁명을 통해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통령이나 관료들에게 있지 않고, 국민들 자신에게 있음을 모두가 새롭게 체득하고 각성한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혁명이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왕 밑에서만 살아온 국민들이 나라를 민주공화국으로 세운 지 겨우 12년밖에 되지 않는 일천(日淺)한 민주정치 체험만으로는 자기들이 주권자라는 확신을 제대로 갖기 어려웠다. 바로 이때 학교생활을 통해 민주주의를 터득한 대학생 등 지식인들이 현실 정치에서 자행되는 부정선거의 실상을 보면서 지식인들마저 이를 외면해서는 이 나라의 민주 발전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에서 거의 자연 발생적으로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뛰쳐 나왔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지금 수유리에 있는 국립 4.19 혁명 묘지에는 600여 명의 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당시 자유당 정권은 데모 진압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 탱크를 앞세운 군인들이 서울로 진입했지만, 시위 군중들은 어느 누구도 임전무퇴(臨戰無退)로 훈련받은 군인들과 맞서기보다는 계엄군을 쌍수로 환영하면서 <군인은 우리 편>이라면서 포용해 버렸다. 군민(軍民)이 적대하지 않고 이렇게 화합해 버리자, 군으로 정권을 지키려던 자유당 정권의 꿈은 수포가 되었다. 결국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하야함으로써 4.19 혁명은 자유당 정권을 퇴진시켜 역사에 성공된 혁명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 결과 대한민국 헌법은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앞세워 비폭력투쟁을 전개한 3.1정신과 계엄군과 폭력적 충돌 없이 포용, 화합함으로써 학생 시위를 혁명으로 성공시킨 4.19정신을 헌법 가치에 합당하다고 하여 헌법 전문에 실었다.
그러나 4.19 혁명이 성공했다고 해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곧바로 <완미한 민주주의>로 정착, 발전한 것은 아니다. 지난 66년 동안의 역정을 돌이켜 볼 때 한국 민주주의는 수많은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왔다. 또 오늘날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도 여러 가지 형태의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한국 민주주의도 여기에서 큰 예외는 아니다. 이하 한국 민주정치가 현시점에서 당면한 위기 요인을 분석하면서 필요한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2. 시대별로 본 민주주의 위기
가. 이승만 대통령 시대
해방된 조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민주공화국이 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선택이었고 결단의 산물이었다. 그는 1894년 독립협회에 가입한 후 1899년 만민공동회를 통해 조선의 국정을 헌법과 의회가 있는 입헌군주국으로 개혁해 나갈 것을 주장하다가 대역죄인으로 몰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특사로 석방되기까지 5년 이상 한성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그는 옥중에서 선교사들이 보내주는 책들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알게 되었고 이렇게 터득한 지식을 토대로 한국 최초의 정치학 개론이라고 평가해도 손색이 없는 불후의 명저 <독립정신>을 집필했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세계 각국의 정치 제도를 소개하면서 지도자를 국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완미(完美)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망명지인 미국의 하와이에서 1917년 소련의 볼셰비키혁명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1923년 자기가 발행하는 태평양이라는 조그마한 월간지에 <공산주의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칼럼을 기고, 공산주의는 반상적서(班常·嫡庶)의 차별을 없애는 등 평등 추구에는 다소 좋은 점이 있지만 사유재산 폐지나 종교 자유의 부정, 국가 소멸 이론 등은 부당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해방된 조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여야 한다는 신념을 확고히 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공산주의는 배격해야 한다는 반공 노선을 고수했다. 그는 신탁통치 반대를 위해 38도선 이남의 주요 도시를 유세하면서 자유민주주의가 우리의 살길이고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소련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연설로 국민을 계몽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유엔 감시 자유 총선거를 통해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리더십은 국부(國父)라는 호칭이 말해주듯 카리스마적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후 해방과 건국 과정에서 초대 국회의장,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부산정치파동을 거치면서 통과된 발췌개헌으로 국민 직선의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1954년 초대 대통령에 한해 임기 제한을 없애는 개헌을 통해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60년 3월 15일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의 선거 직전 병사(病死)로 투표 없이 무투표로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렇지만 부통령 선거의 엄청난 부정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을 사임, 정치 인생을 끝마쳤다.
그는 건국과 호국에서는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였지만 국부로 틀 지워진 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민주정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정치 후대들에게 수범할 기회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카리스마적 리더였기 때문에 해방 공간의 난관을 극복하면서 나라를 세웠고(建國) 북한의 남침을 격퇴, 나라를 지켰고(護國) 대미 외교를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 국가 안보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평화적 정권교체를 어렵게 한다. 난세가 안정기로 변하면 리더십도 변화해야 하는 데 이승만은 변화를 도모하기에는 너무 고령(당시 85세)이었다. 국정을 잘 이끌 수 있는 상황 처리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Vilfred Pareto의 엘리트 순환이론에서 말하는 <육체적 몰락>이 찾아온 것이다. 다행히 그는 자기에게 찾아온 위기 앞에서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부정선거를 무효화 한 후 다시 선거를 통해 민주정치가 살아나는 새 정부를 세우게 했다. 이러한 퇴진은 반민주 독재자로서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다운 퇴진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다.
나. 군부 통치와 민주주의의 위기
한국은 4.19 혁명 이후 두 차례나 헌법이 정한 방법 이외의 방식으로 정권이 붕괴되고 세워지는 경험을 갖게 된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4.19 혁명으로 성립한 민주당 정부는 1960년대의 시대정신이었던 근대화의 열망을 채워줄 정책 산출 능력이 부족했고 4.19 혁명에 뒤따른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바로 잡을 정치적 리더십이 취약했다. 특히 3.15부정선거에 책임이 큰 군 지휘관들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군 내부의 정군파(整軍派) 세력들이 주동이 되어 민주당 정부를 뒤엎고 혁명정권을 세웠다. 4.19 혁명 이후의 혼란과 민주당 정부의 무능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은 군부라는 새로운 신분 집단의 집권에 기대를 걸면서 “반공을 국시로 하고 절망과 기아선상에 헤매는 민생고를 해결하겠다”는 공약을 환호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장군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의회의 대역(代役)으로 활용, 부패와 혼란을 막고 경제 근대화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많은 개혁 입법을 처리하면서도 국민이 주권자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대내외적으로 민정 이양을 공약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 야당의 윤보선 후보에게 신승(辛勝)함으로써 그 나름의 집권 정통성을 세울 수 있었다. 그 후 합헌적으로 재선에 성공하고 뒤이어 3선개헌, 위수령, 계엄령, 긴급 조치, 유신체제 등 반(反) 헌법적 조치를 통해 18년 집권한 것은 그의 국력배양과 조국 근대화를 위한 혁혁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자기 부하의 손에 피살당함으로써 자기 개인의 운명과 정권의 운명을 일치시킨 셈이다. 전형적인 독재 권력의 최후였다. 그의 경제개발에의 기여를 평가, 개발독재로 호칭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정권의 평화적 교체를 수범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의 사후 3김 씨(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간의 권력투쟁은 5.18과 같은 끔찍한 정치 파란을 몰고 왔고 박 대통령의 뒤를 이어 군부가 또다시 집권할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다. 신군부와 대통령 단임제
12.12 사태로 집권한 전두환은 국가보위상임위원회를 입법부의 대역으로 삼아 수많은 개혁 입법을 제정하고 당시의 유신헌법 절차에 따라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나름대로 정권의 정당성 근거를 만들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가장 큰 약점인 1인 장기 집권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개헌을 통해 대통령 임기 단임제(單任制)를 실시하고 이 약속을 지켰다. 그는 집권 과정과 단임 헌법을 준수한 재임 8년 동안 이승만, 박정희 두 분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내치외교의 틀을 발전적으로 승계하면서 88 서울 올림픽 유치, 반도체와 IT 시대를 개막하는 등 통칭 한강의 기적이라고 역사가 평가하는 시대의 문을 열었다. 또 그는 국민과의 약속인 대통령 임기 단임을 수범함으로써 정권의 평화적 교체, 즉 여당에서 여당으로 이어지는 정권의 수직적 교체와 여당에서 야당으로 정권이 바뀌는 수평적 정권 교체의 길을 텄다. 이른바 87년 체제의 탄생이다.
3. 한국 보수 정치의 변질과 정권 교체의 룰 정착
전두환의 뒤를 이은 노태우 대통령은 그간 여당의 안정 의석 확보에 유리하게 작용해 온 국회의원 선출의 중대선거구제를 야당이 주장하는 소선거구로 바꾸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13대 국회의원선거 결과는 여소야대였다. 원내 안정 의석 상실로 국정운영의 동력을 잃은 노태우는 집권당의 국정 위기 극복 수단으로 3당 합당을 감행했다. 그러나 3당 합당은 한국의 선거 지형을 호남대 비호남으로 가름으로써 한국 정치를 지역 대결 구도로 왜곡시켰다. 이 결과 노태우는 단임 약속을 지키고 자기에게 대통령을 승계시켜 준 전두환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내면서 간신히 단임제의 5년 임기를 마쳤다.
이때부터 한국 민주주의는 정권의 평화적 교체의 길이 열렸고 3당 합당으로 여권에 기반을 쌓은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비록 수직적 정권 교체이기는 했지만, 김영삼 정권의 출현은 사실상 보수 정권의 종언을 의미했다.
김영삼 세력은 한국 보수 정치가 상징 자산으로 활용하는 <대한민국의 건국(建國), 호국(護國), 부국(富國)>이나 <한강의 기적>의 어느 것도 승계한 정치세력이 아니었다. 김영삼의 표현대로 호랑이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뛰어든 것이 그의 3당 합당의 변이었다. 김영삼의 집권과 동시에 이른바 보수세력의 적자임을 내세우는 민주정의당계와 김영삼계는 물과 기름처럼 당내 화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5.18 광주민주항쟁을 높이 평가하면서 국립묘지를 만들었고 속초항을 기점으로 하여 대북 식량 지원에 착수했다.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북송하는 등 친북 정책을 펼치고 남북정상회담을 수용했다. 그러나 대내적으로는 민정계와 민주계 간에 내분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단임제로 5년 임기를 끝냈고 그의 뒤를 이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3당 합당이 불러온 지역 구도를 정치 무기화하여 호남에서의 97%의 몰표로 집권에 성공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한국 정치의 보수세력은 존속의 근간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이명박이 노무현의 뒤를 이어 집권에 성공하고 또 박정희 대통령의 후광을 업고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보수세력의 재기가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 말에 당내 김영삼계의 반발을 다독이는데 실패,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했다. 그 여파로 더민주의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보수세력은 사멸의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의 소득 주도 성장론의 비현실성과 부동산 정책의 대실패로 국민적 지지가 격감했고 여기에 친중(親中), 종북(從北)정책이 국민들의 반발과 불신을 유발, 윤석열 대통령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은 문재인 정권의 친북 정책, 친중 정책을 지양하면서 한미 관계를 개선하고 실용 외교를 전개, 보수 재기의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총선에서 대패했다. 여소야대의 정국을 끌고 나갈 경륜이 매우 부족해 야당이 발의한 탄핵공세를 여당 일부의 반발로 막지 못했다. 국민들은 탄핵과 개헌을 막을 수 있는 108석을 국민의 힘에 맡겨 주었지만, 여당 내의 일부 의원들의 반발로 탄핵안이 가결되어 윤석열은 퇴진하고 새로 실시된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당시 이재명 후보가 당선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보수 정치의 몰락과 민주주의의 위기
이재명 정권의 등장은 한국 정치에서 보수의 몰락을 가시화했다. 그간 역대 보수세력은 자유당 정권 시절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정권을 지켰다.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정부는 강권 발동을 통해 민주화를 앞세운 정권 도전 세력을 제압하면서 상응하는 통치의 실적으로 경제발전을 내세우면서 정권을 유지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단임 공약을 내세우면서 물가안정과 경제발전, 반도체와 IT산업의 이니셔티브를 선점하고 올림픽을 유치하는 등 업적으로 정권을 지켰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 전 대통령은 공통적으로 정치적 경륜의 부족과 내부의 분열과 좌파의 공세를 막아낼 전략 전술의 부재로 정권을 지켜내지 못했다. 더욱이 보수의 상징 자산으로 국민의 신뢰가 축적되어 있는 <한강의 기적>을 정치 업적으로 세일즈 할 능력마저 결하고 있었다. 한국 보수 정치의 상징인 박근혜, 윤석열 두 대통령이 당 내분에 의해 탄핵으로 정권을 잃으면서부터 보수세력들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소진했고 한국 보수정치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반면 진보를 지향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은 여당의 내분을 기회로 절대다수의 원내 의석으로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아낸 후 선거를 통해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집권을 방해하거나 저지할 공직 세력에 대해서는 탄핵으로 처리하거나 입법으로 무력화시켰다. 선거관리 기구나 헌법재판소도 인사권을 통해 자파 지지 세력으로 교체하고 대법관의 수 증원, 자파 인사들로의 충원을 기도하면서 집권의 안정화 토대를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동시에 사법적 권력 기구로서의 검찰을 약화시키고 행정 권력으로서의 경찰에 대역을 맡겼다. 또 법 왜곡죄를 신설, 법률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는 헌법사항에 제한을 가하고 헌법재판소에 대법원의 판결을 다시 심사할 권한을 부여, 3심제의 재판을 4심제로 늘이는 해괴한 제도도 고안하기에 이르렀다. 과거에는 언론기관들이 집권 세력의 정권 운용 방식이나 독재화의 우려에 대해 강력한 견제구를 날리면서 제동을 걸었는데 오늘의 언론기관은 더민주의 달라지는 통치 방식과 규칙을 해설하고만 있을 뿐이다. 또 경제적 약자 돌봄을 명분으로 시작된 정권의 현금 살포도 점차 받아들여야 할 일상(日常)으로 변해가고 있다. 즉 Populism의 일상화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내 정국은 Victor Orban의 헝가리나 폴란드의 카친스키 정권에서 보이는 민주정치의 위기와 많은 면에서 유사하다. 절대다수의 의석을 지닌 입법부의 독재가 개인 카리스마의 독재보다 그 영향력이 훨씬 더 강하고 견제하기 힘들게 보인다. 민주주의와 선거를 업고 진행되는 일탈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 의미의 삼권분립이나 법의 지배는 사실상 형해화(形骸化)한다. 민주주의의 선(善) 기능의 조건으로 Juan Linz 교수가 말하는 <권력의 자제>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경험적 대안은 듬직한 야당을 지지하는 전국 각 지역에서 17% 이상의 유권자들이 뭉쳐 조직적인 시위를 통해 정권의 독재화를 막아낼 수 있다는 경험적 자료들은 있다. 그러나 오늘의 야당인 국민의힘이 이러한 리더십을 발휘, 선거에서 재기할 수 있을 까는 아직도 의문이다. 근본적인 쇄신과 비전 제시 없이는 보수의 재기는 어려워 보이는 게 오늘의 솔직한 현실이다.
♡ 내 마음과 같은 정책후원 ♡
번호 |
제목 |
날짜 |
|---|---|---|
| 172 | [2026년 4월] 4.19 혁명 이후와 한국 민주정치의 위기![]() |
26-03-30 |
| 171 | [2026년 3월] 재판소원의 문제점 | 26-02-27 |
| 170 | [2026년 2월] 소상공인에 직격탄, 근로자 추정제 입법 | 26-01-28 |
| 169 | [2026년 1월] 한반도선진화재단의 2025년, 그리고 2026년 | 25-12-30 |
| 168 | [2025년 12월] 한국경제의 도전과 극복 방안 | 25-12-01 |
| 167 | [2025년 11월] 투기가 아니라 규제가 가격 폭등의 주범이다 | 25-10-31 |
| 166 | [2025년 10월] 국군의 존재 이유와 선진화 방안 | 25-09-29 |
| 165 | [2025년 9월] 북한 김정은의 망루(望樓) 외교 | 25-09-01 |
| 164 | [2025년 8월] 완전한 독립(獨立)과 건국(建國)을 위한 과제 | 25-08-01 |
| 163 | [2025년 7월] 남북한 헌법제정의 상이성과 그 성과 | 25-06-30 |
| 162 | [2025년 6월] 군가산점제 부활하나? | 25-05-30 |
| 161 | [2025년 5월]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의 자질과 덕목 | 25-05-07 |
| 160 | [2025년 4월]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국회식 연금 | 25-04-01 |
| 159 | [2025년 3월] 무책임한 추경과 경제 파탄 | 25-02-28 |
| 158 | [2025년 2월] 보수의 재건 | 25-02-03 |
| 157 | [2025년 1월]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불씨를 밝힙시다! | 25-01-06 |
| 156 | [2024년 12월] 디지털 시대의 근로시간제도 개혁해야 | 24-12-03 |
| 155 | [2024년 11월] 노인 연령 상향과 노인복지 | 24-11-04 |
| 154 | [2024년 10월] 한반도선진화재단 창립 18주년 : 성찰과 통찰 | 24-10-02 |
| 153 | [2024년 9월] 가계부채 왜 줄지 않는가? | 24-09-0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