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앤포커스 6월.pdf
Hansun issue & focus 6월호
1. 들어가면서
현충일은 단순한 추념이나 기억에 머무는 기념일이 아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민국이 어떤 산고 끝에 태어났고, 누구의 희생과 헌신 속에 그 정체성을 지켜왔는지를 되묻고 더 나아가 소중한 국체(國體)를 반드시 수호하겠다는 뜻을 다지는 ‘책임의 날’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자유민주공화정의 현실을 반추해 보면 부끄러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공동체적 합의는 사라진 지 오래고, 온갖 혼란과 반칙과 무질서가 횡행한다. 무엇보다 궁극적 완전체로서의 한반도 통일국가를 이루기 위한 지표와 신념체계는 무너졌고, 그 기대는 점점 아련해지는 듯하다. 급기야 ‘통일’과 관련한 헌법적 가치까지 대놓고 무시하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호국영령이 지키려 했던 것은 분단의 영구화가 아니었다.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피를 흘리며 방어해 낸 것은 휴전선 이남의 반쪽짜리 자유체제가 아니라 통일국가였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밝히고 있다.
2. 통일정책이 사라진 통일부
그런데 북한의 3대 세습 통치자인 김정은(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은 지난 3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영토 조항을 신설하고 휴전선을 이른바 ‘남북 국경’으로 칭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국가 대(對) 국가’의 관계임을 내세우면서 이른바 2국가론을 들고나온 것이다. 이는 2023년 12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한국을 제1 주적으로 지목하면서 대남 적대 노선을 첫 주창한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
김정은의 ‘적대적 2국가론’은 남북한을 하나의 민족국가가 잠정적으로 분단된 상태로 보는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조선과 대한민국이라는 상호 적대적인 두 국가만이 존재한다’는 관점을 제도화한 것이다. 그 핵심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통일을 미래 목표에서 삭제하고 둘째, 남북을 서로 완전히 별개의 국가로 규정하며 셋째, 남한을 통일의 상대로서가 아니라 적대적 타자로 상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통일 문제를 사실상 진공상태로 봉인해 버리는 조치다. 남북 기본합의서가 남북한을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 관계’로 규정하고 있는 데서도 한참 이탈한 주장이다.
문제는 북한의 이런 적대적 2국가론을 그대로 수용하는 듯한 주장이 우리 내부에서도 불거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번잡스러운 소동의 진앙이 바로 통일정책 주무 부처란 점은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그 수장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적 2국가’라는 표현을 입에 올리는가 하면 북한을 ‘조선’으로 부르자는 주장과 함께 남북 관계를 ‘조한 관계’로 지칭하는 망동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고 있다.
논란이 일자 통일부는 ‘북한을 법적인 국가로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국가성을 인정하는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위헌도 아니고 역대 정부 정책노선과도 배치되지 않는다는 식의 궤변에 가까운 말도 쏟아낸다.
3. 납득할 수 없는 통일부 행태
지난 5월 아시아축구연맹(AFC) 클럽 대항전을 위해 남한을 찾은 북한 ‘내 고향 여자축구단’의 체류 과정과 경기 중 드러난 북측의 행태는 2 국가론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심각한 혼란을 던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스포츠를 통한 화해와 교류’라는 일각의 기대와 주장은 김정은의 대남 적대 앞에 낡은 레코드판이 됐다. 또 우리 사회 내부에 만연해 있는 대한민국 정체성에 대한 노골적 부정이나 훼손 시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계기로 자리했다.
실제로 경기 당일 우천 속에서도 남북 응원단의 구호와 피켓, 각종 상징물이 뒤섞이면서 현장은 축구장을 넘어 정치·이념 갈등의 현장으로 탈바꿈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북한을 일방적으로 응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원 FC’의 위민 선수가 페널티킥을 실축하자 환호의 함성까지 우리 측 응원단에서 나왔다.
당국이 수원종합운동장에 태극기 반입을 허용하지 않자, 도화지에 태극기 모양을 그려 응원하던 한 뜻있는 탈북민은 관계자들에 의해 제지를 당했다. 하지만 북한 선수단은 보란 듯이 인공기를 꺼내들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태극기는 내걸 수 없고, 인공기가 펄럭이는 모양새가 연출된 것이다.
정부 당국과 일단의 무분별한 무리들이 대한민국의 국체를 부인하는 듯한 행동을 버젓이 벌이고, 북한 여자축구 선수단의 남한 방문이 마치 남북 관계의 물꼬라도 트고 교류·협력의 메신저라도 되는 듯 들떠 있었지만, 결론은 참담했다. 공항 출입경(出入境)은 물론 경기장에서 조차 철저하게 자신들을 외면하는 북한 선수단을 보면서 가장 큰 자괴감을 느낀 건 어떻게든 북한을 ‘응원’하지 못해 안달하는 일부 세력이었는지 모른다.
이들의 바람과 달리 북한은 이번 축구단의 남한 방문을 김정은의 대남 적대 노선을 구체화하고 제도화하는 시험대로 삼았다. 그동안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로서 반세기 넘게 구축돼 온 남북 교류의 틀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세운 원칙과 방식을 관철하는 데 공을 들였다.
남북 간 입출경 절차와 관행을 완전히 무시하고 ‘국가 대 국가’ 차원의 수속을 밟은 건 그 중 하나다. 북한 선수단과 임원들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여권으로 신분 확인과 관련 절차를 밟았다. 남북 간 입출경(入出境)이 아닌 입출국(入出國)이 처음으로 이뤄진 것이다.
본래 북한 주민의 남한 방문이 이뤄지려면 통일부 장관이 발행하는 ‘방남 증명서’가 발급되고 우리 행정안전부 장관이나 경찰청장의 신변안전보장각서가 북측에 전달돼야 한다. 그리고 ‘앨범’이라 불리는 남한 방문 인원의 사진과 간단한 신상이 기록된 일종의 명부가 오게 된다. 남북 간에는 이런 절차를 통해 인적 교류가 이뤄져왔는데 북한은 이번에 이를 완전히 깨트리고 국가 간의 통상 출입국 절차를 밟았다. 여기에 이재명 정부의 통일부와 정 장관이 어떤 대응책을 세우고 북한에 기존 관례의 준수를 주장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실상 북한 요구에 그대로 따른 것이다.
정동영 장관의 축구경기 참관이 불발된 것도 북한의 이런 대남 적대와 ‘국가 대 국가’ 관계 설정의 여파라고 할 수 있다. 통일부 장관으로서 당연히 남북 스포츠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북한 입장에서는 한국과 ‘조선’의 경기에 통일부 장관이 온다는 건 김정은의 2국가론에 정면 배치되는 일이고 이를 받아들였다가는 선수단은 물론 임원진까지 엄중한 책벌이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자칫 북한이 ‘정동영이 퇴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경기를 보이콧하겠다’고 버티면 큰 망신을 살 수도 있다. 막판까지 참관을 희망했지만 결국 문체부 장관이 참석하고 통일장관은 가지 않는 쪽으로 교통정리가 된 것도 이런 맥락이다.
4. 헌법 가치에 충실한 통일정책 수립
북한을 일방적으로 응원한 단체 등에 3억 원의 국민 혈세를 쏟아부은 정 장관과 통일부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국민 비판이 쏠리자 통일부 당국자가 수원FC위민을 찾아 100만 원의 격려금을 전달하는 무마책을 쓴 사실이 알려지자 ‘북한 응원에는 거금을 퍼붓고 우리 선수단에는 푼돈으로 선심을 쓰는 거냐’는 축구 팬과 국민 여론 비난이 쇄도했다. 모두가 원칙 없이 ‘북한 바라보기’에만 매달린 결과이고, 통일부와 정 장관이 자초한 일이다. 대북정책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는 향후 정부의 정책 추진에 두고두고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정부는 이제라도 대한민국과 북한, 그리고 헌법적 가치인 통일에 대한 원칙을 바로 세우고 국민에게 이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과 그 변종인 정동영 장관의 이른바 ‘평화적 두 국가론’ 모두에 대해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 법률적으로는 남북관계발전법이 이미 ‘남북관계는 국가 간 관계가 아니라 특수관계’라고 못 박고 있고, 헌법 또한 통일 지향성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정책과 담론에서 ‘두 국가 관계’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채택하는 것은 헌법과 명확하게 배치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또한 북한을 현실적인 협상의 상대, 사실상의 통치조직으로 인정할 수는 있지만 헌법상 ‘별도의 국가’로 인정하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 원칙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에 대해서는 외교·안보 채널을 통해 명확히 반박하고, 국제사회에도 한반도 통일에 대한 대한민국의 헌법적 입장을 지속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또 대북 인도적 지원과 교류 협력에 대한 의지는 피력하되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나 인권탄압은 물론 통일 말살 시도에 대해서는 제재와 압박, 규범적 비판을 병행하는 전략을 유지해야 한다.
특히 통일부 장관과 고위 당국자는 표현 한 마디가 북한과 국제사회, 국내 여론에 미치는 파장을 냉정하게 고려해야 한다. ‘평화’와 ‘공존’이라는 단어에 숨어 있는 전략적 함정, 즉 통일을 사실상 포기한 상태에서의 거짓된 평화를 선택하도록 유도·강요하는 북한의 공세를 직시해야 한다.
현충일을 계기로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것은 호국영령이 지키려 한 평화는 ‘굴종과 체념의 평화’가 아니라 ‘자유와 존엄이 보장되는 평화’였다는 점이다. 현충일은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당신이 누리는 이 자유와 번영은 누구의 희생 위에 서 있는가’라며 말이다. 또 ‘선열들께서 갈구하던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오늘 당신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물음도 던져지고 있다. 호국영령이 지키려 했던 대한민국은 분단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북한의 독재 체제를 또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는 소심하고 자기부정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그들이 꿈꾸던 나라는 자유와 인권, 법치와 책임이 한반도 전체에 뿌리내린 통일 대한민국이었다.
북한이 헌법까지 바꾸어 ‘적대적 두 국가론’을 헌법화하고, 우리의 통일부 장관이 ‘평화적 두 국가 관계’라는 허황된 표현을 거듭 사용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현충일은 절체절명의 경고가 되어야 한다. 통일을 포기한 평화, 정체성을 희미하게 만든 공존은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는 건 진리다.
역사와 지정학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통일의 기준선을 스스로 낮추면, 그 빈틈은 북한의 전체주의와 주변 강대국의 이해타산이 메우게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언젠가 통일이 되면 좋겠다’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호국영령이 목숨으로 지켜낸 대한민국의 가치와 헌법 질서를 한반도 전체로 확장하겠다’는 냉철한 결의다.
통일은 먼 미래의 이상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어떤 말을 쓰고 어떤 정책을 선택하며, 어떤 교육과 담론을 통해 미래를 일궈갈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현재진행형 과제다. 현충일은 그 소명을 외면하는 국민에게 말 없는 질책과 경고를 보내고 있다. 통일을 다시 대한민국의 국가적 목표로 세우는 일은 살아 있는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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