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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논문집--유학과 현대] 왜 공동체자유주의인가?
 
2014-06-19 14:07:12

박약회 논문집--유학과 현대---14-6-14

 

왜 공동체자유주의인가?

 

박세일

(한반도 선진화재단 명예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법경제학)

 

 

1: 문제제기

 

이 글을 쓰는 이유는 20세기적 左右대립과 保革대립의 갈등과 혼란을 넘어서 국민을 이념적 사상적으로 통합하고 대동단결하여, 우리 모두가 함께 대한민국의 先進化와 한반도 統一의 길로 나아가자고 주장하기 위하여서이다. 본래 낡은 사상 간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려면 반드시 새로운 사상의 제시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2000년 초부터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사상으로 ‘共同體自由主義’----공동체를 소중히 하는 자유주의--를 주장하여 왔다.

 

공동체자유주의에서의 자유주의는 서양에서 발전되어 온 ‘個人主義的 自由主義’에 가깝다. 그리고 공동체자유주의에서의 공동체주의는 동양사상에서 발달되어 ‘東洋的 共同體主義’에 가깝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유교적 공동체주의’ 그리고 ‘불교적 공동체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자유주의와 동양의 공동체주의를 圓融시킨 공동체자유주의여야 20세기적 이념의 미망을 벗어나지 못한 현재 대한민국의 左右대립과 保革갈등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국민을 통합하고 국가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사회는 현재 큰 이념의 갈등과 대립을 겪고 있다. 극심한 사상과 사고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이념과 사고의 혼란은 국가정책과 국가전략의 혼선으로 나타난다. 이대로 가면 21세기 우리나라의 선진화와 한반도 통일의 달성은 점점 어려워질지 모른다. 시대착오적인 낡은 이념과 극단적 사상들이 거리를 활보하면서 국민을 분열시키고 대립갈등하게 만들면, 國魂은 위축되고 國力은 쇠잔해 진다. 새로운 역사의 발전과 창조는 불가능해진다. 이래선 안 된다. 20세기 산업화와 민주화를 빛나게 성공시킨 대한민국이 21세기 선진화와 통일이라는 새로운 국가비전과 국가과제 앞에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은가?

 

과거 20세기는 크게 보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自由主義’와 파시즘(우파독재) 혹은 공산주의(좌파독재)라는 ‘全體主義’ 사이의 싸움의 시기였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자유주의가 승리하였다. 자유주의 승리의 환호는 20세기 말 冷戰의 종식과 더불어 공산주의가 붕괴되면서 그 정점에 달했다. 이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가 즉 ‘민주자본주의’가 인류의 보편적 정치-경제질서로서 확고히 자리를 잡는 것 같았다. 더 이상의 좋은 제도와 질서가 없다는 결론을 냈다. 그래서 ‘歷史의 終焉’이라는 책도 나왔다. 이제는 확실한 답이 나왔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논쟁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로 들어오면서 자유주의가 自由萬能主義(liberal-fundamentalism) 내지 過剩자유주의(hyper-liberalism)로 발전하면서, 그리고 자유주의의 기초가 되는 개인주의가 과잉개인주의(hyper-individualism), 즉 ‘이기적 개인주의’로 변화하면서, 오히려 국가발전이 후퇴하고 사회분열과 갈등이 크게 증대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우선 과잉자유로 인하여 민주주의가 포퓰리즘(populism)화 하는 경향이 커졌다. 조직된 집단이 목소리를 높이어, 국익을 희생하면서도 자신들의 집단이익을 관철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리고 정치지도자들 사이에도 이러한 잘못을 고치기보다는, 그러한 흐름에 아부하여 표만을 얻으려는 인기영합적 경향이 생겼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公益과 共同善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목소리가 큰, 조직화된 소수에 의하여 국가운영이 끌려 다니는--정치지도자들도 이러한 경향에 영합하는---포퓰리즘으로 타락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제는 민주주의가 선동가들이 이미지정치에 좌우되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지고 노는 ‘衆愚민주주의’로 변질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건강한 ‘民本的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또한 자본주의도 과잉자유--이기적 자유--로 인하여 ‘賤民자본주의화’ 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즉 자유공정경쟁이 깨지고 독과점 구조---독점대기업의 등장---와 특권과 기득권구조---요즈음 이야기하는 官피아 政파아 法피아 등등---가 등장하면서, 그 동안 ‘건강한 자본주의정신’으로 예찬되어 온 ‘근면 정직 성실’의 職業倫理가 없어지고, 물질만능과 황금만능의 사조가 온 사회에 넘쳐 나게 되었다. 이렇게 천민자본주의가 등장하게 되면 그 사회의 건강한 ‘人本的 자본주의’는 파괴되기 시작한다. 이상의 두 가지--衆愚민주주의와 賤民자본주의--모두가 사실은 이웃과 공동체를 배려하지 않는 과잉자유주의, 이기적 자유만능주의의 폐해인 것이다.

 

 

요약하면, 전체주의와의 투쟁에서 자유주의의 승리는 바람직한 역사의 발전이었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한 자유주의가 과도하게 자유지상주의, 자유만능주의로 질주하면서, 자유주의의 부작용이 심각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의 덫에 걸리고 자본주의가 과도한 황금만능주의, 즉 천민자본주의의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세계의 위축과 더불어 공동체의 가치와 연대가 약화되고 바람직한 건강한 정치경제적 기본질서--민본적 민주주의와 인본적 자본주의---가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러한 과도한 자유주의-이기적 물질적 자유주의의 문제점을 고치는 길이 다시 20세기적 전체주의로---개인부정과 국가지배로-- 돌아가는 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즉 우리나라 舊좌파 즉 ‘낡은 진보’들 --종북좌파(NL)나 레닌적 좌파(PD)들--이 주장하는 시대착오적인 노동해방 계급투쟁 反美自主 의 세계가 우리의 미래대안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舊우파 즉 ‘낡은 보수’처럼 과잉한 물질적 이기적 자유의 문제---과잉자유로 인한 賤民민주주의와 정치적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 등)의--- 부작용을 고치려 하지 않고, 과잉자유주의가 만든 특권이나 기득권에 안주하여, 개혁을 거부하는 守舊的 右派의 입장도 우리의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러면 우리의 미래의 대안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서양적 자유주의와 우리의 전래의 동양적 공동체주의의 통합과 융합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1945년 이후 우리는 서구의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제도(institution)로서의 자유주의'를 들어오는 데만 급급하였다. 그래서 서구에서 제도를 수입할 때 서구의 개인주의적 정신과 문화는 함께 들어 왔는데, 서구의 공동체적 정신과 문화는 제대로 들여오지 못했다. 본래 서구의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적 가치와 공동체적 가치간의 나름의 균형과 조화 위에서 발전되어 온 사상이다. 그런데 서구의 공동체적 가치---노블레스 오블리주, 紳士道, 시민정신, 자유와 책임 등등--는 전혀 들여오지 않고, 제도로서의 자유주의만을 들어오는 데만 급급하였다. 반면에 우리의 전래의 정신과 문화 속에 있던 儒佛仙의 공동체적 가치와 전통은 쉽게 내팽개쳤다.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온 우리의 선조들의 지혜와 경험이 녹아 있는 우리의 좋은 전통을 前근대적인 것이고 낙후된 것으로 만 치부하여, 외면하고 무시하여 왔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자유주의 제도는 들어 왔는데 그 제도를 뒷받침 할 가치 그리고 정신/문화--특히 개인주의를 균형있게 조화시킬 공동체주의적 가치와 정신/문화가 부재한 상황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사회의 생각의 혼란과 대립--죄우대립과 보혁대립--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자유주의 속에--지금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속에-- 공동체가치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충분히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격렬한 좌우대립과 보혁대립까지는 오지 아니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동양적 공동체사상에 의하여 보완되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2: 왜 自由主義여야 하는가?

 

21세기는 어느 나라든지 두 가지 문제를 풀어야 한다. 하나는 어떻게 국가를 발전시킬 것인가? ‘국가발전의 원리’ 내지 이념은 무엇인가? 다른 하나는 어떻게 국민을 통합시킬 것인가? ‘국민통합의 원리’와 이념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우선 국가발전원리로서는 당연히 자유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국가발전의 원리가 자유주의--개인의 존엄과 창의, 자유와 선택을 소중히 하는 자유주의--가 되어야 하는가를 살펴보자.

 

지난 250년간 인류는 비약적 예외적 경제 발전을 하였다. 그 발전의 원인 내지 발전의 동력은 자유주의---‘개인주의적 자유주의’에서 왔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BC(기원전) 1000년 전에 지구위에 살던 인류의 일인당 평균소득은 어느 정도였을까? 요즈음 가격으로 환산하면 미화로 약 150불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면 AD(기원후) 1750년, 즉 지금부터 약 250년 전의 지구촌의 인류의 일인당 평균소득은 어느 정도였을까? 약 180불이다. 결국 약 2700여년간 인류는 겨우 150불에서 180불 수준으로 밖에 경제가 발전하지 않은 셈이다. 너무 오랫동안 경제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참 오랫동안 인류는 물질적으로는 대단히 가난하게 살아 왔다.

 

그러면 AD (기원후) 2000년에는 어느 수준이 되었을까? 약 6,600불로 나온다. 지난 250년간 인류는 실로 눈부신 飛上을 한 셈이다. 한마디로 180불에서 6,600불로의 비상이다. 도대체 이러한 기적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답은 자유주의에서 찾아야 한다. 개인의 창의와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는 자유주의의 확산 때문에 위와 같은 인류의 경제적 물질적 도약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경제성장이란 무엇인가? 경제성장이란 한마디로 생산성의 향상을 의미한다. 생산성의 향상이란 노동자 한사람이 만들어 내는 물건이 매년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생산성의 향상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답은 分業(division of labor)의 細分化, 환언하면 勞動特化의 정도(degree of specialization)에서 온다. 우리가 물건을 만들 때 그 工程을 몇 개 분야로 나누어 만든다. 예컨대, 책상을 만들 때 그 만드는 공정을 몇 분야로 나누어 만드는 것을 分業이라고 한다. 한 사람은 나무를 자르고 다른 사람은 나무를 대패질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못을 박고 그리고 나머지 사람은 도색을 하고 등등으로 나누어 작업을 하는 것이 분업이다. 또한 공정을 세분화하여 노동자들이 각자 맡은 특정 작업에만 집중하는 것을 노동특화라고 한다. 물론 노동을 특화하면 할수록 기술과 기능은 올라갈 것이다. 이와 같이 공정을 몇몇 분야로 나누는 분업을 세분화하면 할수록, 그래서 노동특화의 정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생산성은 당연히 올라간다. 그래서 책상을 한사람이 전 공정을 책임지고 만드는 것 보다 여러 사람이 나누어 만들면 생산성은 크게 오른다. 예컨대, 한사람이 하루에 책상하나를 만들 수 있었다면 4사람이 분업을 하면 10개를 만들 수 있고 10사람이 분업을 하면 40개를 만들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생산성 향상의 비밀이다.

 

그러면 분업의 세분화내지 노동특화의 정도는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 그 답은 ‘시장의 크기’이다. 시장이 커야 그 물건에 대한 시장수요가 커지기 때문에, 작업공정--분업을 보다 세분화할 수 있고, 그래서 생산성을 올릴 수 있다. 시장이 작으면 수요가 적어 분업의 세분화의 여지도 없고 그래서 생산성을 높일 수도 없다. 그래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환언하면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시장의 크기, 즉 시장의 확대이다.

 

그런데 과거 AD 1750년 전에는 시장의 확대를 제약하는 국가규제가 많았다. 해외 거래를 막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같은 나라 안에서도 이웃 마을과의 거래를 막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봉건영주마다 이웃봉토와의 거래에 대하여 세금을 부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시장 형성은 각각 봉건영주지배권 안에서만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시장이 동네마을시장 내지 ‘지역시장’ 중심이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마을간 지역 간 무역에 대한 규제와 세금을 점차 풀어 나가면서, 一國내 ‘국내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점차 외국과의 거래를 풀어--소위 開港하고 경제를 개방하여 --점차 ‘세계시장’이 형성되어 왔다.

 

그래서 오늘날은 세계화의 시대(Age of Globalization)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시장규제를 점차 풀어 왔는데 그 힘이 ‘경제적 자유주의’사상의 확산에서 왔다. 그로 인해 시장의 획기적 확대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로 분업이 세분화되고 그래서 생산성의 획기적 제고 즉 고도 경제성장이 이루어져 왔다. 따라서 지난 250년의 경제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바로 시장에 대한 국가개입과 간섭을 줄이고, 시장규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경제적 자유주의’ 사상이었다.

 

경제발전 즉 생산성 향상을 위해 ‘시장의 확대’와 더불어 중요한 또 하나의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이다. 그런데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될 때만 가능하다. 中世 때는 사상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지배적 종교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사상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았다. 당시는 地動說을 주장하면 감옥에 가게 되어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과학과 기술은 발전할 수 없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점진적으로 시작되어 온 사상적 자유주의가 1875년 이후 급격히 확산되면서 그 이후 과학기술의 획기적 발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장의 확대’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생산성의 향상 즉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면 그 성과가 시장 확대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하여 노력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경제발전이 지속적이 될 수 있다. 생산성 향상의 결과를 즉 노력의 결과를 정부가 다 가져 간다든가 아니면 이웃 도적들이 와서 다 약탈해 간다면 경제성장은 지속될 수 없다. 그래서 私的財産權(private property right)의 보호’를 보장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 입헌주의, 법치주의 등--이 필요하게 된다. 정치적 자유주의가 없으면 국가권력이 혹은 이웃이 개개인 노력의 결과를 임의로 침탈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선 누가 분업과 노동의 특화를 통하여 생산성을 높이려 노력하겠는가? 누가 새로운 과학과 기술을 개발하려 노력하겠는가? 결국 한마디로 경제성장이 이루어 질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1875년 이후 지구촌 위에 경제적 자유, 사상적 자유, 그리고 정치적 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인류는 역사상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하게 되었던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주의가 ‘발전의 원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3: 왜 共同體主義여야 하는가?

 

‘국가발전의 원리’가 자유주의라고 한다면 그러면 ‘사회통합의 원리’는 무엇인가? 여기서 공동체주의의 필요가 등장한다. 인간은 본래가 個體的이면서도 공동체적--關係的 존재이다. 그래서 개체적 욕구도 있으면서 공동체적--관계적--욕구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본래 利己的 욕구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利他的 욕구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유주의가 발전을 가져 오지만 자유주의가 이기적 자유주의로 폭주하여 공동체의 가치, 연대 등을 파괴하게 되면 인간의 불만은 폭등하게 된다. 인간의 本性--개체적이면서 관계적인 본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자유주의 그 자체가 지속가능하지 않게 된다.

 

서양에서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개체적 존재]로 파악하여 모든 논의를 인간의 개체성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사회도 국가도 기본적으로는 개체적 인간들이 서로의 계약을 통하여 만든 合意物로 본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인간을 처음부터 [관계적 존재]로 파악한다. 인간을 개체와 개체와의 관계적 존재, 개체와 전체와의 관계적 존재, 그리하여 個體性과 共同體性을 함께 가진 존재, 더 나아가서는 개체와 전체의 통일적 내지 융합적 존재로서 파악한다. 이것이 동양사상의 특징이다.

 

예컨대 佛敎는 인간을 因-緣-果의 [緣起的 존재]로 파악한다.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니 이것이 있다]는 상호의존적 상호작용적 연기적 존재로 파악한다. 그리고 이 연기적 관계는 복합적 중첩적으로 重重無盡으로 나타나며,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한 없이 확산되어 나간다. 그래서 이 연기의 관계를 떠난, 연기와 무관한 개체의 존재를 주장하기 어렵다.

 

儒敎도 인간을 기본적으로 [관계적 존재]로 파악하여, 인간과 인간간의 올바른 관계설정의 중요성을 그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부모는 부모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 父父子子)는 주장에서 나오듯이 기본적으로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본다. 三綱五倫 그 자체도 바로 올바른 관계에 대한 원리이다. 부모 없는 자식의 의미는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이렇게 동양은 개체 그 자체보다는 개체와 개체와의 관계, 혹은 개체와 전체와의 관계를 중시하고 거기에 사상의 중심을 둔다. 사실은 여기에 동양사상의 眞髓가 있다. 사실 공동체주의는 이미 오랫동안 동양인의 생각과 삶 속에 체화되어 온 사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동양의 삶 자체가 원래 親공동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양보다 동양에서 공동체주의의 수용이 이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보다 용이하다. 그래서 서양의 공동체주의보다 동양의 공동체주의가 보다 풍부한 공동체적 가치를 다양하게 많이 강조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가 주장하는 공동체자유주의에서는 세 가지 공동체를 소중히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사회공동체이다.

 

인간은 본래가 이웃과 더불어 사는 존재이고 특히 복잡다기하게 엮어진 사회적 분업망(social division of labor)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의 생존을 의지하고 있다. 내가 먹을 곡식을 내가 직접 심고 가꾸지 아니하고도 나는 식사를 거르는 일이 별로 없다. 내가 입을 옷을 내가 직접 만들지 아니해도 나는 옷을 입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 농민과 노동자들의 사회적 분업 때문이다. 나의 삶의 풍요가 그분들의 노동에 의지하여 있다. 또한 나의 노동--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노동--이 여러 형태로 여러 과정을 통하여 그 분들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데 기여가 된다. 이렇게 사회 속에서 우리의 서로의 삶이 넓고 깊게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인간의 행복도 아담스미스(Adam Smith)가 이야기 한 대로 혼자 느끼는 행복도 있으나, 대부분의 행복은 동료들과의 共感(sympathy with fellowmen)에서 온다. 대부분의 인간 행복은 부모와 자식 간의, 형제자매간의, 그리고 친구와 친구간의 서로의 感情移入 즉 共感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서로가 같은 느낌을 가질 때---동양에서 이야기하는 易地思之할 때 같은 느낌을 가지면--- 가장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주위의 행복한 얼굴을 보면서 나도 행복해진다. 주위가 괴로워하면 나도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건강한 가족-사회공동체의 유지 발전은 나와 남 모두의 ‘생존’-사회적 분업을 통한 생존--과 ‘행복’--상호공감을 통한 행복--을 위하여 불가결하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주의를 하되 가족-사회공동체를 소중히 하는 자유주의를 하여야 한다.

 

 

둘째는 역사공동체이다

 

인간은 본래가 시간적 존재이고 역사적 존재이다. 개인도 역사 속에서, 先朝들의 사랑과 기도 속에서 출생하였고, 자신의 後孫들에게 선조들의 집단적 지혜인 전통과 문화를 물려 줄 의무를 가지고 있다. 아니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전통과 문화보다 더 좋은 전통과 문화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남겨 주어야 한다. 그러한 사명과 책무가 있다. 더 나아가 좀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남겨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인간은 본래 역사 속에서 자기의미를 찾고 삶의 목표와 가치를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임금은 천하를 영토로 삼으나 선비는 만고를 영토로 삼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이 바로 선비들의 역사의식, 역사공동체에 대한 존중과 배려이다. 우리는 자유주의를 하되 역사공동체를 소중히 하는 자유주의를 하여야 한다.

 

 

셋째는 자연공동체이다.

 

인간은 본래가 自然이란 큰 생명체의 일부이다. 자연생명에 대한 파괴는 결국은 인간의 자기 파괴이고 자기부정이다. 지난 250년간의 인류의 물질적 경제적 성장의 눈부심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이러한 경제성장은 자연파괴, 생태계파괴를 수반하여 왔고 오늘날 그 파괴의 정도가 대단히 심한 상황에 이르렀다. 더 이상의 성장이 지속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한 환경보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미 상당부분 파괴된 생태계의 ‘생명력의 복원’에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21세기에 우리는 자연주의-생명주의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 생태계의 생명력복원 노력없이 개인적 자유주의의 더 이상 지속은 어려울지 모른다. 동양에서는 노자와 공자 때 부터 사람이 기계를 쓰면 機心이 생기고 人心이 없어지니 機械를 너무 좋아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인간은 본래가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 역사적 자연적 존재’이다. 사회적 역사적 자연적 관계를 떠나서 생물학적으로 존재할 수도 정신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도, 그리고 靈的으로도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도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개인행복과 국가발전을 함께 이루기 위해서는 개인적 자유주의에 기초를 두되 올바른 사회의식 역사의식 환경의식이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자유주의이다.

 

 

4: 왜 공동체자유주의여야 하는가?

 

다시 정리하면 인간은 독존적, 개체적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관계적, 공동체적 존재이다. 인간은 본래가 공동체적 관계를 떠나서 개인으로서만, 原子化된 개인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 공동체도 개인들의 자발적 적극적 기여와 배려 없이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것이 인간과 인간 공동체의 생생한 본래의 모습이다. ‘인간존재의 실상’이다. 이 존재법칙을 역행하면 자기부정이 일어난다. 즉 인간이 개인적 자유만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면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이 어렵게 되고, 그래서 개인적 자유 자체도 지속가능하지 않게 된다. 결국 개인적 자유의 자기부정이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개인적 자유주의의 발전은 항상 공동체의 유지 발전과 조화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공동체주의의 필요가 등장한다. 공동체주의는 인간을 원자화되고 破片化된 개별적 독자적 개인으로 이해하지 않고, 공동체와 불가불리의 존재로서 이해한다. 그리하여 개인과 공동체와의 연대, 개인과 공동체간의 상호작용, 그리고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 공동체적 전통과 가치 등을 중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인간이 본래 개체적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관계적 존재이고 공동체적 존재라고 하는 ‘인간존재의 실상’, ‘인간본성의 모습’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한 가지 주의를 요하는 것이 있다. 共同體主義(communitarianism)를 개인주의를 거부하는 集團主義(collectivism)혹은 全體主義(totalitarianism)와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집단주의 내지 전체주의는 집단이나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혹은 위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존엄이나 창의 그리고 자유를 부정하지만, 공동체주의는 개인의 존엄과 창의 그리고 자유의 존중을 기본으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공동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공동체주의에서 이야기 하는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자유공동체]이다. 다만 개인의 자유를 기본으로 하되 공동체의 발전과 개인자유와의 조화가 필요함을 강조할 뿐이다. 개인의 자유의 가치와 공동체의 발전의 가치가 균형되고 조화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화의 방식은 교육과 설득과 솔선의 방식을 통하여 자발적 주체적으로 만들어 나간다. 국가에 의한 외적 강제를 통하여서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동체주의는 극단의 개인주의와 극단의 집단주의라는 兩邊을 함께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불교의 中道사상, 그리고 兩邊을 조화한다는 의미에서 유교의 中和사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자유주의는 동양보다는 서양에서 많이 발전되어 왔고 제도화되어 온 이념이고 가치이다. 반면에 공동체주의는 실은 서양보다는 동양에서 많이 발전되고 생활화되어 온 이념이고 가치이다. 서양에도 물론 공동체주의적 전통과 주장이 있어 왔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공동체논의가 주로 사회공동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우리가 여기서 주장하는 사회공동체 만이 아니라 역사공동체 그리고 자연공동체까지를 포함하는 공동체주의는 서구사상의 주류에서는 찾기 쉽지 않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인간을 사회공동체만이 아니라 역사공동체 자연공동체의 일부로 파악하여 왔다. 따라서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가 주장하는 공동체자유주의의 공동체주의는 ‘동양적 공동체주의’에 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다.

 

 

5: 국가정책의 원리로서의 공동체자유주의

 

지금까지는 공동체자유주의를 국가발전과 국민통합원리 내지 이념으로서 논하여 왔다. 그러나 공동체자유주의는 개별 국가정책을 결정할 때도 올바른 정책선택의 원리로서도 그 가치가 크다. 공동체자유주의는 단순히 관념적 이론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 정책선택원리로서 활용될 수 있다.

 

공동체자유주의에 기초하여 국가정책을 선택하려 할 때, 우선적으로 가장 중시하여야 할 것이 정부의 모든 제도와 정책이 국민 개개인의 창의와 자유를 신장하는가? 개개인의 선택의 폭을 넓히고 선택의 질을 높이는가? 그리고 그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한가? 등이 되어야 한다. 결국 ‘자유 확대’와 ‘투명성과 공정성 제고’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자유주의적 입장에서의 국가정책의 기본방향을 선택한 다음에는 반드시 공동체주의적 보완을 해야 한다. 즉 그 국가정책이 공동체적 가치와 연대와 책임을 강화하는가? 아니면 훼손하는가? 를 검토하여야 한다. 비록 자유주의의 원리에 의하여 선택된 국가정책이라 하여도, 반드시 그 정책이 공동체적 가치, 연대, 책임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체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이미 채택한 자유주의적 국가정책에 대하여 공동체주의적 수정과 보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구체적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예컨대 올바른 교육정책을 세우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교육정책의 영역에서 ‘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은 학생들의 자유와 선택, 그리고 학교의 자율과 책무를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와 정책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학교에서의 敎育需要者 사이(학생, 학보모 등)의 자유선택과 자유경쟁의 폭을 높일 뿐 아니라 敎育供給者 사이(교사, 학교, 교육부 등)의 자율과 자유경쟁도 반드시 촉진시켜야 한다. 선택과 경쟁 없이는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교육수요자들이 다양한 학교와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부의 학교나 교육프로그램에 대한 규제는 가능한 최소화하여야 한다. 다양한 학교와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이 등장할 수 있도록 그래서 교육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가 이 다양한 학교와 교육프로그램 중에서 본인들이 선호하는 학교와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러 학생들이 선호하는 학교나 프로그램이 제한적이면 선택경쟁--혹은 입시경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선택경쟁이 너무 심해지는 것을 줄이려면 공급을 즉 ‘좋은 학교나 좋은 프로그램’을 늘릴 생각을 하여야 하지, 선택경쟁자체를 못하게--예컨대 평준화 같이-- 정부가 나서서 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유주의적 교육정책에 맞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학생들 간의 경쟁은 많았으나, 학교와 교사 등 교육 공급자들 간의 ‘좋은 교육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경쟁’은 거의 없었다. 이들 간에도 경쟁을 시키고 그 성과를 평가를 하는 것이 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이다. 왜 그런가? 교육정책의 목표는 좋은 교육서비스를 학생--그 교육에 맞는 학생들-- 에게 공급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 교육에 맞는가 여부는 선택경쟁 혹은 입시경쟁을 통하여 결정하면 될 것이다. 여하튼 학생들에게는 ‘선택의 폭’을 넓히고 교사들에게는 ‘경쟁의 정도’를 높이는 것이 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이다.

 

그리고 학교 내에서 이러한 자유주의적 교육혁신(educational innovation)--- 새로운 학교의 등장,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과 교육기법의 등장 등---이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도록 제도와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교육혁신이 자유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학교의 지배구조(school governance)--학생과 교사와의 관계, 교사와 교장과의 관계, 교장과 이사장과의 관계, 교장과 교육감/교육부와의 관계 등--- 를 혁신지향형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학교지배구조 자체가 폐쇄적이고 권위적이면 새로운 자유주의적 교육혁신이 마음껏 시도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적 개혁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반드시 공동체주의적 보완이 있어야 한다.

 

첫째; 아무리 공정하고 자유스러운 교육환경을 만든다 하더라도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자체가 원초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학습부진아와 낙후지역 학생들, 그리고 영세저소득층의 학생들이 그 경우에 속할 것이다. 따라서 학습부진아나 낙후지역 학생들에 대하여는 특별교육프로그램이 필요할 것이고 빈곤층 학생 등에 대한 장학금제도의 일종인 교육 바우처(boucher) 제도와 같은 보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둘째; 개인의 자유선택에만 맡겨서는 공동체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人性 및 도덕교육, 역사와 문학과 철학 등의 人文교육, 그리고 기초과학과 기술교육 등등이 그러한 분야이다. 이들 분야에 대하여는 자유주의적 교육시장에만 맡기면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충분한 교육이 일어나지 않는다. 자유주의 교육시장에만 맡기면 인기분야, 인기학과, 인기대학--법학, 경영학, 의과대학 등등--으로만 학생들이 몰릴 수 있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개인의 완성과 공동체발전을 크게 막는 길이 된다. 그래서 자유주의에 만 맡기지 말고 공동체적 입장에서 인성과 도덕교육, 인문교육, 기초과학교육 등의 분야에 정부가 별도의 교육정책과 지원정책을 반드시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자유주의적 정책과 공동체주의적 정책을 最適結合(optimal mix)시켜 국가발전과 국민통합을 함께 이루는 교육개혁을 할 때 우리는 그것을 ‘공동체 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다.

 

 

6: 미래를 향하여: 선비민주주의와 선비자본주의

 

공동체자유주의에서 주장하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구체적으로 어떠한 비중내지 구성으로 결합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양 원리의 최적 결합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사실 이 문제는 대단히 어렵고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두 가지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하나는 그 나라의 ‘경제의 크기’ 이고 다른 하나는 그 나라 경제의 ‘발전의 단계’이다. 이 두 가지에 의하여 최적결합의 비율이 결정된다고 본다. 구체적으로는 그 나라의 경제규모가 크면 클수록 자유주의의 비중이 공동체주의보다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경제발전의 단계가 높을수록, 즉 선진경제에 일수록, 자유주의의 비중이 공동체주의보다 클 수밖에 없다고 본다. 반면에 경제규모가 작은 경제 그리고 아직 경제발전의 초기에 있는 경제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공동체주의의 비중이 크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우리는 공동체자유주의가 唯一無二한 정답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 보다 많은 연구와 토론을 통하여 보다 심화되고 발전되어야 할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동체자유주의에 대한 논의가 오늘날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념과 사상의 혼란과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여 나가는 하나의 단초가 되기를 희망한다. 앞에서 간단히 보았듯이 21세기 들어오면서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점차 [衆愚민주주의]가 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점차 [賤民자본주의]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앞으로 필자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禁慾과 先公을 주장하는 ‘선비정신’에 의하여 보완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선비민주주의’와 ‘선비자본주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본다. 정치지도자들이 ‘큰 선비정신’을 가질 때 그리고 국민들이 ‘작은 선비정신’을 가질 때,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진정한 ‘民本的 민주주의’--백성의 이익을 하늘처럼 생각하는 민주주의--, 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나라 기업인들이 ‘큰 선비정신’을 가질 때, 그리고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작은 선비정신’을 가질 때, 우리나라 자본주의가 진정한 人本的 자본주의--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선비민주주의가 되어야 이 땅에 진정한 ‘民本的 민주주의’가 등장할 수 있고, 선비자본주의가 되어야 이 땅에 진정한 ‘人本的 자본주의’가 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래야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의 선진화와 한반도 통일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선비민주주의와 선비자본주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정신적 기반, 사상과 철학이 바로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공동체자유주의’---동양적 공동체주의와 서양적 자유주의의 융합--라고 생각한다. 이 공동체자유주의가 우리나라 뿐 아니라 21세기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의 여러 개별국가들이 ‘민본적 민주주의’와 ‘인본적 자본주의’를 찾아가는, 그래서 국가발전과 국민통합의 大道를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사회에서 앞으로 ‘공동체자유주의’에 대한 보다 심층적이고 생산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논의가 많이 있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개인의 인격완성과 자아실현 그리고 공동체의 건강과 발전이 함께 이루어지는 그러한 좋은 세상, 그러한 理想사회---弘益人間, 大同사회, 佛國정토,--- 를 만들어 나가는데, 오늘 우리가 논의하는 공동체자유주의가 의미있는 기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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