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nsun Brief 통권349호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에서 태어나 1965년 하와이에서 서거하실 때까지 그의 90년 평생을 관통한 철학은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독립과 발전이었다. 그러나 그분이 이 나라의 독립과 건국, 호국과 국력 신장에 쏟은 공헌과 업적은 세월과 함께 잊혀지고 있다. 소설가 복거일 씨는 그가 5권으로 나누어 쓴 이승만 박사 일대기의 제목을 <물로 씌어진 이름>으로 붙였다. 그는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를 인용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는 사람의 악덕은 청동에 새기지만 공로나 업적은 물에 새긴 것처럼 잊혀진다고 했다. 지금 이승만 대통령의 공헌과 업적은 학자들의 세계에서는 가끔 논의된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관심권에서는 거의 멀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의 엄청난 공헌에도 불구하고 상응하는 국민적 보답이 따르지 않는 데는 우리 정부가 북한의 대남 심리전 공세를 제대로 파악 대처할 능력 부족에 기인한다. 우선 북한의 김일성 집단과 남한에 있는 북한 동조 세력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민족 분열의 원흉이라는 터무니없는 프레임을 씌웠다. 대한민국이 유엔감시 자유총선거를 통해 나라를 세우고 유엔총회가 한국을 유엔이 인정하는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하는 바로 그날 그 순간부터 오늘날까지 민족분열의 모든 책임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들씌우고 있다.
한국 현대사는 민족분열의 원인이 소련의 38선 이북의 북한 지역을 점령한 데 있다고 증언한다. 북한 지역을 점령한 소련 군정사령부는 1946년 2월 미소공동위원회와의 사전 협의나 대화도 없이 일방적으로 북한 지역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간판으로 정권을 수립하고 그 정권 명의로 북한에 거주하는 지주들의 토지와 기업주들의 공장 시설 등 모든 생산수단을 몰수하고 국유화하는 한편 지주들에게서 무상으로 몰수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조치를 취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한마디로 소련이 북한에 세운 공산당의 위성정권이다. 소련은 동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련군대가 점령한 지역에는 예외 없이 자국에 우호적인 정권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위성 정권을 세웠다. 해방된 민족의 자유의사를 묻는 절차도 없이 북한 지역에 정권을 세운 것이다. 남한을 배제한 단독정권이라면 민족 분열의 모든 책임은 소련과 그들의 괴뢰인 김일성 정권이 져야 할 것이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이 제시한 4대국에 의한 5개년의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그 대안으로 유엔감시하에 한반도 전역에 걸친 자유총선거를 통해 독립정부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그는 신탁통치는 “한국에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를 세우기로 결의한 카이로 선언에 위배된다”고 지적하고 유엔 주도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부합한 독립정부 수립을 요구했다. 마침내 유엔총회는 이승만 안을 지지, 유엔감시 아래 총선거로서 대한민국이 탄생했을 진데 이승만은 민족분열의 원흉이라는 프레임을 써야 할 까닭이 전무하다. 분단의 모든 책임은 이승만이 아닌 김일성이 져야 한다. 그러나 북한 공산당은 자기들의 과오를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역선전을 전개, 이승만 죽이기 심리전에 전력투구했고 남한의 좌파들도 북한선전에 오염되어 이승만 죽이기를 합창했다.
이승만에 뒤이은 역대 정부들은 북한 대남공세의 타깃이 자기 정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북한의 이승만 죽이기 심리전을 방치하거나 외면했다. 그러나 북한이 노리는 것은 자연인 이승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성립의 정당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라는 자조적 발언이 우리 국민들이 선출한 대통령 입에서 튀어나왔고, 주사파로 불리는 젊은 층들의 상투어로 변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에 뒤이은 역대 정부는 대한민국 성립의 정당성에 흠집을 내기 위한 북한의 이승만 죽이기 심리전을 사실상 방치해 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4·19혁명과 더불어 정적들로부터 새로운 프레임을 하나 추가하게 되었다. 독재자 프레임이다. 필자는 대학 3학년일 때 4·19혁명에 앞장서서 자유당 독재 타도를 부르짖었다. 당시 23세의 대학생의 안목에서는 이승만은 나이가 그 당시 80대 중반이라면 초고령 나이였음에도 권력만을 추구하는 노욕의 화신으로 보였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공직생활과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여러 저서를 읽게 되고 한국 분단사,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면서부터 이승만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에 변화가 생겼다.
크게 보면 두 가지 측면에서 생긴 변화다.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탄생할 수도 없었고 존속할 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해방정국의 혼란과 곧 이어진 6·25 동란을 보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내치외교에서 대한민국의 오늘이 가능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다른 하나는 독재자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독재자는 자기 생명과 정권의 운명을 일치시킨다. 따라서 진짜 독재자는 국민이 하야하라고 해서 권좌를 버리고 물러나는 독재자는 없었다. 내가 아는 한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이승만은 4·19 혁명을 보면서 불의 부정 앞에 항쟁할 수 있는 젊은 대학생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학생들이 흘린 피에 보답한다면서 부정선거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지고 하야했다. 민주주의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따른 자유와 민주를 신봉하는 정치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이승만 대통령을 새롭게 인식한 것은 내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결론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지식과 정보의 양만큼 생각하고 표현한다. 어릴 때 생각과 어른 된 후 생각이 달라지듯이 나의 이승만 관(觀)도 변했다. 인생 8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가 되어서도 23세 때 가졌던 이승만 이미지에 아직까지 나를 묶어 놓고 있다면 ‘나’라는 존재는 역사의 쓰레기에 불과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공부하면 할수록 그분의 인격과 리더십에 감동치 않을 수 없었으며 1945년 조국 해방의 시기에 그분을 우리에게 지도자로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분의 존재, 그분의 리더십으로 말미암아 한국의 오늘이 가능했음을 거듭 상기하면서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 활동에 나의 인생 후반기의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 기쁜 일이다. 감사할 일이다.
※ 본고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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