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3 13:35:39
지난 10일 치러진 총선 패배로 사퇴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민심은 언제나 옳다”는 말이 곱씹힌다. 선거 결과에 승복했으니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민심이 언제나 옳다고는 볼 수 없다. 민심이 언제나 옳다면, 민주국가는 올바른 정치로 영원히 번영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실패한 민심이 수두룩하다.
민주주의의 고향인 고대 아테네만 하더라도, 짧은 전성기를 빼고는 늘 흔들리는 민심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진흙탕을 헤맸다. 마지막에는 최후의 결전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지휘관들을 헛소문에 홀려 사형시켜 버렸다. 곧바로 치명적인 실수를 깨닫고 가슴 쳤지만, 이미 떠나버린 버스에 손 흔드는 격이었다. 현대에는 잘못된 민심으로 민주정치가 무너진 경우가 무척 많다. 지난 세기에 독일의 나치 히틀러는 국민의 대대적인 지지를 얻고 집권해 민주제도 자체를 깨 버렸다. 낙농 선진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국민의 잘못된 판단으로 허름한 나라가 됐고, 석유 수출로 풍요를 누렸던 베네수엘라는 빈곤의 악순환을 겪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는 선거 민심이 옳다고 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대학생 딸을 개인사업자로 탈바꿈시켜 ‘사기 대출’을 받은 경기 안산갑의 양문석 후보나, ‘이화여자대학생 미군에 성(性)상납’ 주장이나 위안부 피해자들을 ‘성적 노리개’로 비하하는 망언을 한 경기 수원정의 김준혁 후보가 반듯한 상대 후보들을 제치고 당선됐다. 지역구의 선택은 존중돼야 하지만 안타깝다.
서울 종로구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위인 곽상언 후보가 부인의 명의로 산 미국 아파트 매매대금의 명세를 밝히라는 유권자에게 “모욕죄에 해당한다”며 위협하고, 의혹을 제기하는 상대 후보에게 “감옥에 갈 수 있다”고 협박했다. 그는 애국심과 청백리로 소문난 최재형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 물론 인천 계양을에선 수많은 범죄 혐의로 법원을 제집 드나들듯이 하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민심이 천심’이라든가 ‘국민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vox populi, vox dei)’라는 정치 잠언(箴言)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해진다. 이것은 고대 군주 시대에 최고 권력자인 왕의 오만과 변덕을 견제하기 위한 말이었다. 최고의 권력자에게는 거리낄 바가 없어서 도덕 준칙조차도 구속력이 없는 법이다. 그러기에 최고의 권력자를 견제하고자 민심이나 국민의 목소리를 동원했던 것이다.
민주사회에서는 민심이나 국민의 목소리로 최고 권력자를 견제할 수 없다. 최고의 권력자가 국민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민심은 천심을 닮아야 한다’거나 ‘국민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를 닮아야 한다’며 도덕성의 최후 보루인 하늘이나 신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천심이나 신의 목소리도 변덕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고대 중국의 은나라에서는 큰일이 있을 때마다 하늘의 뜻을 알아보고자 갑골로 점을 쳤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하늘이 변덕스러웠기 때문이다. 고대 서양에서도 신들은 변덕쟁이였다. 늘 서로 시기·질투해 싸우고, 최고의 신인 제우스가 나서야 잠잠해졌다. 인간사에도 간섭했는데, 사람들은 신의 약속을 믿고 나섰다가 낭패하기 일쑤였다.
만일, 한국의 자유주의 정치가들이 변덕스러운 민심의 바다를 헤쳐 나가려면, ‘민심이 천심이라며 언제나 옳다’는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마키아벨리의 충고처럼 천심의 변덕스러운 포르투나(Fortuna·행운)보다는 자신들의 꿋꿋한 비르투스(Virtus·덕성)를 믿고, 용감하게 자유주의 정치 문법에 맞는 정치를 해야 한다.
선거 때에 당일치기하듯 변덕스러운 민심을 좇지 말고, 미리부터 자유주의 정치 상징들을 드높이고 자유 이념에 맞는 정책들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이왕 특정 세력의 전유물이 된 5·18 묘역에 가려면, 먼저 자유 세력의 상징 자산인 전남 영광의 염산교회나 충남 논산의 병촌성결교회를 들러야 한다. 6·25 때 인민군이 홀로코스트를 저질렀던 곳이다. 상대 세력의 무리한 포퓰리즘 정책에 대해서도 상식과 정의에 맞는 자유주의 정책으로 적극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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