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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대만인’ ‘중국인’ 사이에 갈등하는 중화민국
 
2023-06-27 15:03:17
◆ 최창근 중국전략연구소 책임연구원이 기고한 칼럼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비슷한 두 나라.’
 
  비교정치학자들은 한국(대한민국)과 대만(중화민국)을 가리켜 이런 표현을 쓴다.
 
  우선 국호(國號)부터 유사하다. 한국의 공식 국호는 ‘대한민국(大韓民國·Republic of Korea)’이다. 대만의 공식 국호는 ‘중화민국(中華民國·Republic of China)’이다. 정치제도 면에서는 민주공화정을 채택하고 있으며 경제 부문에서는 시장경제제도를 근간으로 한다.
 
  역사 궤적도 유사하다. 1894년 발발한 청일(淸日)전쟁을 종식 지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으로 대만은 일본 식민지(1895~ 1945년)가 됐다.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다시금 승리했다. 그 결과 조선은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고, 1910년 강제합병되어 식민지가 됐다.
 
  1945년 일제 패망 후에는 각각 국공내전(國共內戰)과 6·25전쟁을 겪었다. 그 결과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권위주의 통치기를 경험했지만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에 성공하여 ‘한강의 기적’ ‘대만의 경험’이라 불리는 경제 기적을 일궈 홍콩·싱가포르와 더불어 ‘아시아 4마리 용(龍)’으로 꼽혔다. 198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로 이행하여 오늘날 대표적인 민주국가로 거듭났다. 요약하자면 한국과 대만은 식민통치, 내전,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행한 개발도상국의 모범사례다.
 
 
  정치 지형… 한국은 동서, 대만은 남북
 
  정치 사정도 비슷하다. 보수·진보 정당 간 이전투구(泥田鬪狗)가 치열하다. 치열함이 지나쳐 ‘의회 폭력’으로 오명(汚名)을 얻기도 했다.
 
  정치 지형도 묘하게 닮은꼴이다. 매번 선거 때마다 한반도는 동서로 양분된다. 영남(嶺南)을 중심으로 한 동쪽 지역에서는 보수정당이 호남(湖南)을 위시한 서쪽에서는 진보정당이 우세를 보인다. 반면 대만은 남북으로 나눠진다. 선거 개표 때마다 제1 항구도시 가오슝(高雄)을 중심으로 한 남쪽 지역은 녹색으로 타이베이(臺北)를 비롯한 북부는 파란색으로 물든다. 녹색은 현 집권당인 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민진당), 파란색은 제1야당인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의 상징색이다. 이를 대만의 푸른 하늘과 녹색 대지에 빗대 ‘남천녹지(藍天綠地)’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북쪽에서는 국민당을 위시한 범람(泛藍·pan-blue) 계열 정당이, 남쪽에서는 민진당을 비롯한 범록(泛綠·pan-green) 계열 정당이 우세하다.
 
  대만을 파란색과 녹색으로 나누는 ‘기준점’은 정체성(正體性), 족군(族群·ethenic group)과 더불어 통독(統獨·‘통일’ ‘독립’) 문제이다.
 
 
  ‘이민자의 섬’
 
  대만 사회에서 정체성은 복잡 미묘한 문제이다. 대만인의 정체성은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 문제는 중첩적이고 다원적이다. 이는 대만 역사와 맥이 닿아 있다.
 
  대만은 ‘이민자의 섬’이다. 오늘날 대만 국민의 97%를 차지하는 한족(漢族)계 주민이 이주하기 전 대만에는 남도어족(南島語族)이라 불리는 말레이계 선주민(先住民)이 거주했다. 대만을 중심으로 이들은 남태평양 도서(島嶼),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폴리네시아 일대까지 이주했다. 오늘날 ‘대만 원주민’이라 불리는 대만의 원주인이다.
 
  다수를 이루는 한족계 이민자도 시대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1590년 대항해 시대를 맞이하여 세력을 아시아로 확장해 가던 포르투갈이 대만을 발견했다. 그들은 녹색 대지의 대만을 보고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으로 ‘일랴 포르모자(Ilha Formosa)’라고 불렀다. 이후 포르모자(Formosa·美麗島)는 대만의 미칭(美稱)으로 남았다.

 포르투갈의 ‘지리적 발견’ 이후 대만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딘 서구인은 홍모인(紅毛人)이라 불리던 네덜란드인이다. 1625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오늘날 타이난(臺南)에 질란디아성(熱蘭遮城)이라 불리는 요새를 구축하고 남부 대만을 식민통치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필리핀에 거점을 두고 있던 스페인은 대만 북부 지역에 식민 거점을 세웠다.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대만을 분점(分占)하던 시기 중국 본토로부터 본격적인 한족 이주가 시작됐다. 네덜란드동인도회사는 쌀, 설탕 플랜테이션 경작을 위해 푸젠(福建)성 일대 주민을 이주시켜 개간을 실시했다.
 
  명(明)-청(淸) 정권 교체기이던 1661년 또 한 무리의 한인(漢人)이 대만에 발을 디뎠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농민반란군이 수도 베이징(北京)을 함락시켰다. 1356년 주원장(朱元璋)이 건국한 명은 멸망했다. 황족, 유신(遺臣)들은 난징(南京) 등 동남부로 도주하여 남명(南明)왕조를 세웠다. 명 부흥 운동은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만주족(滿洲族)의 청(淸)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
 
  남명 유신 정성공(鄭成功)은 대륙에서 명 부흥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만을 반공대륙(反攻大陸·본토 무력 수복)의 기지로 삼고자 했다. 1661년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내고 동녕왕국(東寧王國)을 건립했다. ‘정씨(鄭氏)’ 왕국은 정성공의 아들 정경(鄭經), 손자 정극상(鄭克?)까지 3대 22년간 이어진다.
 
  청 강희제(康熙帝) 재위기인 1683년 동녕왕국 3대 국왕 정극상이 항복함으로써 대만은 공식적으로 청의 영토로 편입된다. 청 정부는 푸젠성(福建省) 산하 ‘대만부(臺灣府)’를 설치하여 공식 행정구역에 편입시켰다.
 
  대만이 공식적으로 ‘중국의 일부’로 편입된 후 본토로부터 이주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들의 원적(原籍)은 인근 푸젠성, 광둥성(廣東省)이 주를 이뤘다. 이들은 오늘날 ‘본성인(本省人)’이라 부르는 대만 주민 다수의 선조이다.
 
 
  “일본 개가 떠나니 중국 돼지가 왔다”
 
  1894년 한반도를 전장(戰場)으로 벌어진 청일전쟁은 대만 운명의 전기가 됐다. 신흥 열강 일본에 패한 노(老)제국 청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서 대만과 펑후(澎湖)제도를 일본에 영구 할양했다.
 
  일본은 대만총독부(臺灣總督府)를 설치하고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일본은 첫 식민지여서인진 몰라도 대만을 조선과 달리 온건한 방식으로 통치했다. 헌병이 아닌 경찰을 주 통치 수단으로 삼았다. 총독도 해군제독이나 문관(文官) 출신으로 임명했다. 제3·5대 총독을 역임한 해군 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제외하고는 전원 거친 육군 대장으로 임명된 조선총독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부분이다. 1895~1945년 일제강점기 동안 대만은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에 성공했다. 이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식민통치와 더불어 대만인이 일본에 호의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이유로 작용했다.
 
  1945년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해 10월 25일, 안도 리키치(安藤利吉) 대만총독이 중화민국 국민혁명군(국부군)에 공식 항복했고, 대만과 펑후제도는 전승국 중화민국으로 반환됐다.
 
  그 무렵 본토에서는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긴장이 다시금 고조됐다. 이 속에서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대만을 통치할 관료나 군인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일반 행정단위인 성(省)을 대신해 대만행정장관공서(臺灣行政長官公署)를 설치했다. 푸젠성 정부 주석을 역임한 천이(陳儀)를 초대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에 임명했다. 육군 상장(3성 장군) 천이는 대만에 당도해 일종의 계엄통치를 실시했다.
 
  50년간 일본의 식민통치를 경험한 대만인들은 ‘조국으로 회귀한다’는 기대감을 가졌다. 천이의 통치는 기대를 저버렸다. 국민혁명군과 함께 건너온 소수 외성인(外省人)들이 행정장관공서 최고위직을 독점했다. 등용된 소수 본성인들도 임금·대우에서 차별받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군기(軍紀) 문란 문제도 있었다. 군인들이 부녀자를 희롱하는 것은 예사였고 ‘적산(敵産) 접수’라는 명목으로 재산을 강탈하기도 했다. 이 속에서 “일본 개가 떠나니 중국 돼지가 왔다(狗去?來)”라는 말이 세간에 퍼졌다.

2·28사건

 1949년 미국 국무부가 발간한 《중국백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신임장관 천이는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그 섬에 도착하였는데 수행원들은 교묘하게 대만을 착취하기에 바빴다. (중략) 군대는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비밀경찰은 노골적으로 민중을 협박하며 본토에서 온 중앙정부의 관리가 착취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자연 대만인(본성인)과 중국인(외성인) 간 긴장은 고조됐다.
 
  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에서 무허가 담배를 판매하던 한 여성이 대만성전매국(臺灣省專賣局) 단속요원에게 폭행을 당했다. 술·담배는 주요 세원(稅源)으로 정부 전매품목이었다. 과잉 단속에 시민들은 항의했고 진압 과정에서 청년 천원시(陳文溪)가 경찰 발포로 사망했다. 사건은 누적된 본성인의 불만을 폭발하게 하는 ‘방아쇠’로 작용했다. 2월 28일, 타이베이 전역에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속출했고, 격앙된 시민들은 라디오 방송국을 점거하고 ‘대만 전 주민 궐기’를 방송으로 호소했다. 시위는 대만 전역으로 번졌다.
 
  천이 행정장관은 온건 처리를 약속했으나 비밀리에 본토에 진압군 증파를 요청했다. 증원군이 도착한 3월 8일부터 대대적인 진압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대만 전역은 초토화됐고 인명 피해도 줄을 이었다. 사태는 3월 17일 장제스(蔣介石)의 심복 바이충시(白崇禧)가 군정장관으로 부임하여 과잉 진압에 제동을 걸고, 5월 16일 장제스 총통이 ‘사태 종료’를 선언한 후 일단락됐다. 5월 20일 대만 전역에는 계엄령이 선포됐다.
 
  2·28사건으로 기록된 사건의 희생자는 중화민국 정부 공식 사망자 수만 2만8000명에 달했다. 대만 현대사 최대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은 외성인과 본성인 간 갈등의 씨앗으로 자리했다.
 
 
  ‘미려도 사건’과 민진당 창당
 
  1949년 12월, 제2차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은 패했다. 장제스는 반공대륙 기지로 대만을 택했다. 장제스와 함께 군인, 경찰, 공무원과 그 가족 등 약 90만 명이 대만으로 이주했다. 국부천대(國府遷臺·국민정부 대만 파천)다.
 
  대만으로 이주한 중화민국 정부는 피란 정부 처지였다. 헌정(憲政)은 중단되고 1949년 2·28사건 후 선포된 ‘대만지구 계엄령’과 1948년 제정·시행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에 기반하여 국민당 일당독재가 지속됐다. 당금(黨禁·정당 설립 규제) 조치 속에서 국민당 외 정당 설립은 금지됐다. 보금(報禁·언론사 설립 규제)으로 인하여 국민당 기관지 《중앙일보(中央日報)》, 양대 민영지인 《중국시보(中國時報)》 《연합보(聯合報)》 외 신문은 사실상 발행이 금지됐다. 양대 민영지 발행인도 국민당 중앙상무위원을 겸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계엄령하 국민당 독재체제하에서 민주화를 위한 열망도 분출했다. 1979년 ‘미려도 사건’이 대표적이다. 정부의 규제 속에서 재야(在野) 인사들은 대만의 별칭에서 유래한 《미려도(美麗島·Formosa)》 잡지를 발행하고 정부 비판 목소리를 높였다. 1979년 12월, 《미려도》사는 남부 최대 도시 가오슝에서 세계인권선언기념일에 맞춰 야간 집회 허가를 신청했다. 정부는 이를 불허했고 《미려도》 측은 집회를 강행했다. ‘불법집회’로 규정한 경찰은 강경 진압했고 《미려도》 관계자들은 구속되어 군사재판에서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대만의 대표적인 시국 사건으로 민주화의 분수령이 됐다.
 
  1986년 《미려도》 관련자들이 주축이 된 당외(黨外·국민당 밖 재야) 인사들이 모여 대만 첫 야당 민주진보당 결성을 선언했다. ‘당금’ 조치하에서 불법단체였지만 장징궈(蔣經國) 총통은 이를 묵인했다.

장징궈, ‘위로부터의 민주화’ 추진

1975년 아버지 장제스 사망 후 행정원장(국무총리 해당)을 거쳐 1978년부터 총통으로 재임 중이던 장징궈는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적극 추진했다. 야당 설립을 묵인하고 1987년에는 《기네스북》에 세계 최장(最長) 계엄령으로 기록된 대만지구 계엄령을 38년 만에 해제했다. 계엄령 해제와 더불어 정당·언론 규제도 풀렸다. 그러다 이듬해인 1988년 1월 장징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장제스-장징궈 부자(父子) 총통 시대도 종식됐다. ‘중화민국 헌법’에 의하여 농업경제학자 출신의 리덩후이(李登輝) 부총통이 총통에 취임했다.
 
  첫 본성인 총통 리덩후이는 1988~ 2000년 재임 기간 동안 민주화를 본격 추진했다. 1991년 초헌법 조항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폐지하여 헌정을 정상화했다. 총통 직선제도 복원하여 1996년 사상 첫 직선 총통에 당선됐다.
 
  2000년 3월 대선에서 민주진보당 소속 천수이볜(陳水扁)이 당선되어 사상 첫 여야(與野) 간 정권 수평 교체가 이뤄졌다. 이후 2008년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후보가 정권 탈환에 성공하여 다시 한 번 정권 교체를 이뤘다. 이로써 민주주의 공고(鞏固)화를 가늠하는 ‘두 번의 정권 교체 테스트(two turnover test·일명 헌팅턴 테스트)’도 통과하여 대만은 명실상부한 민주주의 국가 반열에 올랐다. 그러다 2016년 차이잉원(蔡英文) 현 총통이 당선되어 선거라는 민주주의 제도에 의하여 여야 간 정권 교체가 다시 한 번 이뤄졌다.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 강화
 
  400년 동안 다층적으로 형성된 대만인의 정체성은 복잡하다. 역사를 기반으로 ‘대만인’을 범주화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중화민국 국적 보유자 ▲국민당 정부와 같이 이주한 외성인을 제외한 본성인 ▲한인이 아닌 원주민.
 
  지난날 대만 사회에서는 외성인과 본성인(원거주 한인+원주민) 간 갈등이 두드러졌다. 국민당 일당독재하에서 특권은 소수 외성인에게 집중됐고 본성인은 소외된 경험 때문이다. 다만 계엄령 해제, 민주화 진전 속에서 외성인-본성인 갈등은 점차 완화되는 추세이다. 더하여 대만에서 태어나고 자란 외성인 2·3세들은 ‘중국인’이 아닌 ‘대만인’으로 정체성이 강화되고 있다.

대만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또 다른 주제는 독립과 통일 문제이다. 민주진보당을 중심으로 한 범록계 정당은 ‘중화민국’과 구분되는 ‘대만’ 정체성을 강조하며 궁극적으로 대만 독립을 추구한다. 독립 시기와 방법에 있어 급진적이냐 덜 급진적이냐 차이만 있을 뿐이다. 중국 본토에 연원(淵源)을 둔 중국국민당을 비롯한 범람계 정당은 ‘하나의 중국(一個中國·One China Policy)’ 원칙을 존중하며 양안(兩岸) 재통일을 추구한다.
 
  대만의 가장 권위 있는 여론조사 기관 국립정치대 선거여론조사센터는 1992년부터 매년 대만 국민 정체성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1992년 첫 조사 시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6.4%는 자신을 ‘대만인이자 중국인’이라고 규정했다. 통일을 염두에 둔 ‘이중 정체성’이었다. ‘중국인’이란 응답이 25.5%였고, ‘대만인’이란 응답은 17.6%에 그쳤다. 반면 작년 조사에선 응답자의 63.7%가 자신의 정체성을 ‘대만인’으로 규정했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인 셈이다.
 
  이 속에서 매번 선거 때마다 독립과 통일 문제는 유권자의 향방을 결정하는 핵심 이슈이다. 각 정당별로 후보별로 입장이 다르다.

三人三色인 대선 후보들

 내년 1월 13일 치러질 총통·입법원 동시 선거를 앞두고 여야 3당 간 대진표가 확정됐다. 후보들의 성장 배경, 독립과 통일에 대한 입장도 각각 다르다.
 
  집권 민주진보당 후보 라이칭더(賴淸德) 부총통은 본성인이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명문 국립대만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공공위생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종합병원 내과 의사를 거쳐 정계에 입문했고 국민대회(國民大會) 대표, 입법위원, 민선 타이난(臺南) 시장을 역임했다. 2016년 차이잉원 1기 정부에서 행정원장으로 입각했고 2기 정부 부총통을 맡고 있다. 라이칭더는 ‘대만의 중화민국은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별개의 실질적인 독립국’이라고 주장하며 급진 독립노선을 지양하는 이른바 화독(華獨·중화민국 독립)파로 분류되는 차이잉원 현 총통보다 강경한 입장이다. 대독(臺獨·대만 독립)파라 할 수 있다.

제1야당 국민당 총통 후보 허우유이(侯友宜) 신베이(新北) 시장은 외성인 2세다. 아버지는 국민혁명군 군인으로 국부천대 시 대만으로 이주했다. 중앙경찰대학 졸업 후 경찰에 투신하여 형사·수사 분야 요직을 역임했다. 천수이볜 집권기인 2006년 49세로 최연소 내정부 경정서장(警政署長·경찰청장)에 올랐고 2008~2010년 중앙경찰대 교장을 역임한 후 퇴직했다. 이후 주리룬(朱立倫) 현 국민당 주석에게 발탁되어 신베이 부시장이 됐고, 2018년, 2022년 시장에 당선됐다. 양안 문제에 있어서는 화독파에 가까운 스탠스를 보이고 있다.
 
  제3후보 커원저(柯文哲) 대만민중당(臺灣民衆黨) 주석은 외과 의사 출신 정치인이다. 본성인 태생으로 국립대만대 의과대학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국립대만대병원 응급의학센터장을 지냈다.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타이베이 시장 도전을 선언했고 ‘무소속 열풍’을 일으키며 국민당 후보와의 대결에서 승리했다. 2018년 재선에 성공했고 2019년 대만민중당을 창당했다. 그는 “당선될 경우 중국과 문화·정치적 교류를 추진하겠다”며 기존 대만 독립 노선에서 중도로 선회한 입장을 밝혔다.
 
 
  중국의 대선 개입이 관건
 
  6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총통 선거에서 ‘중국 대륙과 대만, 홍콩, 마카오는 나뉠 수 없으며 중화인민공화국만이 전(全) 중국 유일 합법 중국 정부이다’라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둘러싼 세 후보 간 논쟁도 치열하다. 이들은 자신과 소속 정당의 기본 정체성을 지키며 양안 현상 유지(status quo)를 희망하는 중도층의 표를 얻으려 경쟁한다.
 
  초한전(超限戰·무제한 전쟁)을 전개하는 중국의 인지·심리전도 관건이다. 지난 2020년 대선에서 중국공산당은 친중 성향 후보를 집중 지원했다. 대만 정보 당국은 이번 선거에서도 가짜 뉴스 살포, 여론 조작 등을 통한 선거 개입을 경고했다.
 
  이 속에서 내년 1월 치러지는 대선은 향후 4년간 대만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물론, 동아시아 역내(域內) 안보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이정표가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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