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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 사회적 논의 없는 산재 인정 확대
 
2022-03-23 10:13:34
◆ 이승길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반도선진화재단 고용노동정책연구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올해 초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후 산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자주 사고 기사가 반복되며 기업의 우려와 걱정도 심화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고용노동부의 산재 인정기준 고시 개정안 처리 여부가 또 하나의 ‘뇌관’으로 등장했다. 개정안 골자는 일부 업종에서 근무한 자에게 발생한 근골격계 질병을 더 쉽고 신속하게 산재로 보상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국무조정실 규제개혁위원회의 심의 절차만을 남겨 두고 있다.

산재 인정은 업무와 상병 발생 간 ‘상당인과관계’를 근로자가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고시 개정안은 건설·조선·자동차·타이어 제조 사업장에서 최소 1년 이상 근무한 자에게 발생한 근골격계 질병 일부에 대해 상당인과관계의 입증 없이 바로 ‘추정’하도록 규정했다. 고용노동부는 이 원칙을 적용해 조사 과정을 대폭 생략함으로써 산재 처리 기간 단축을 기대하고 있다.

‘추정’이란 불확실한 사실을 반대 증거가 제시될 때까지만 맞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에 철저한 조사를 통해 추정이 적절한지 검증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고시 개정안은 상식에 반하는 꼴이다. 추정은 하되 조사절차 및 범위를 축소하니 실무상 산재로 추정된 사건에 대해 사업주가 반증을 제시하기가 매우 곤란해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산재 처리가 구조적으로 한 번 추정되면 그 결과를 뒤집기 힘든 불합리한 상황이 고착화될 것이다.

경영계는 고시 개정 추진에 크게 반발해왔다. 고시 개정으로 추정의 원칙 적용 대상인 잠재적 근로자가 사업장마다 최대 70~80%에 달하는 등 현장에 파급 효과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단순히 산재 근로자가 많이 발생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근골격계 질병은 매년 신규 환자 수만 500만 명이 넘는 대표적인 퇴행성 질환이다. 이를 산재로 쉽게 인정하는 것은 산재 판정의 공정성을 크게 저해하고 산재보험료 인상을 유발해 기업에 지나친 인적·물적 부담을 지운다. 아울러 기업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최대 수억 원이 소요되는 안전보건진단 명령 이행 및 수시 유해 요인 조사를 거의 매년 시행해야 한다. 산업 현장의 작업환경 개선 등을 위해 활용해야 할 비용과 행정력이 필요 없는 곳에 소모되고 노사 갈등을 부추긴다면 분명 문제다.

고용노동부는 어찌된 일인지 고시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지난 2020년 근골격계 질병 신청 건수가 9925건으로 3년 만에 1.94배 급증했고 121.4일로 연장된 평균 처리 기간이 주된 근거다. 그런데 세부 내용을 보면 의아스럽다. 먼저 고시 개정 시 추정의 원칙 적용 건수는 약 300~400건으로 전체 건수의 3~4%에 불과해 처리 기간 단축에 별로 기여하지 못한다. 추정의 원칙으로 미적용 건에서 미실시한 의학 자문 절차를 거쳐야 해 처리 기간도 효과가 없다. 반드시 고시로 개정해야 할 시급한 과제라고 보기 어렵다. 가뜩이나 코로나19 대유행의 경제 위기 상황에서 특정 업계가 강력 반발하는 고시 개정을 강행할 이유가 적은 것이 사실이다.

곧 새로운 정부가 새판을 짜고서 출범할 것이다. 정부 정책의 일관성은 정권 교체가 되더라도 대체로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첨예한 노사 갈등이 예상되는 사안은 무리하게 추진할 필요가 없다. 산재 처리 기간의 단축은 운영 개선, 인프라 확충 등으로도 얼마든지 효능을 높일 수 있다. 고시 개정안은 원점에서 순리에 따라 천천히 재고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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