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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대법원장의 거짓말, 사법부 신뢰 무너뜨렸다
 
2021-02-19 11:15:43
◆김종민 법무법인(유한) 동인 변호사는 한반도선진화재단 사법개혁연구회 회장 · 프랑스연구포럼 대표로 활동 중입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1974년 8월 사임한 것은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이 결정적 계기였다. 1972년 사건 발생 이후 2년 넘게 계속된 언론 보도와 측근들의 증언에도 닉슨이 버텼으나 은폐했던 18분 분량의 백악관 집무실 녹음테이프 제출을 연방대법원이 만장일치로 결정하자 마침내 손을 들었다. 공개된 녹취록을 통해 닉슨이 사건 발생 엿새 만에 연방수사국(FBI)에 수사 중지를 명령했고 국민을 속여 왔음이 드러났다.  
  

법치주의는 시민의 신뢰가 생명
사법의 정치화, 공정성에 치명타

당시 닉슨 측은 원활한 국정 수행을 위해 대통령과 보좌관들이 나눈 대화의 비밀 보장 필요성과 대통령 면책특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판결문을 직접 쓴 워런 버거 대법원장은 대통령의 비밀 보호와 면책특권도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충돌하면 제한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 그 판결은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남겼다.  
   
미국의 법치주의를 지탱하는 두 축은 연방 헌법과 독립된 사법부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다수의 폭정에 의한 ‘권리 보장 없는 민주주의’를 가장 두려워했다.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고 법치주의 실현을 위해 독립적인 사법부가 필수적이라는 점에 인식을 같이한 결과로 탄생한 것이 연방대법원이다.  
   
워런 버거 대법원장은 닉슨 대통령이 임명했지만, 정의와 진실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법안에 대해 연방대법원은 “이례적인 상황에서 이례적인 조치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초헌법적 권력을 창출하거나 확대할 수 없다”며 위헌 판결로 제동을 걸었다. 미국 연방대법관들이 ‘Justice’로, 연방대법원장이 ‘Chief Justice’로 불리는 이유다.  
   
자유민주주의는 법과 견제·균형 시스템에 따라 권력을 억제하고 규제하는 복합적인 제도다. 정치 질서는 정당성에 근거하며 정당성 있는 지배로부터 권위가 나온다. 그러한 정당성은 법치주의의 존중으로 확보되고 본질은 국가 권력에 제한을 두는 것이다. 법치주의가 적절히 기능하려면 제도와 절차만큼 규범적 문제가 중요하다. 시민들이 법을 존중하고 따르게 하려면 그 법이 근본적으로 공정하다고 믿고 사법부가 공정한 판결을 내린다는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한다. 헌법에서 사법부 독립을 보장하고 법관의 신분 보장을 규정하는 것도 정의의 최후 보루로서 헌법과 법치주의를 수호하라는 국민적 명령의 표현이다.  
   
사상 초유의 전직 대법원장 구속까지 이어진 ‘사법 농단’ 수사는 큰 충격이었다. 파격 발탁된 김명수 대법원장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사법부 독립을 확보하고 사법개혁을 추진해 나가야 할 중대한 책무가 있었다. 하지만 임기 4년 동안 남긴 성과는 참담하다. 우리법연구회, 국제인권법연구회 등 이념과 성향을 같이 하는 특정 그룹 판사들이 대거 중용되면서 사법의 정치화와 공정성에 대한 우려가 심각하다.  
   
임성근 부장판사에 대한 국회의 탄핵 소추 사태에도 사법부 수장으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탄핵 사유에 대한 국회 차원의 조사가 전혀 없었고,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사건에 대한 사법부 길들이기 차원의 ‘정치 탄핵’이었지만 침묵했다.  
   
공개된 녹취록에서 대법원장이 권력 앞에 굴종하고 법관 탄핵을 방조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이 드러났다. 명예와 신뢰의 상징이어야 할 대법원장의 거짓말은 대한민국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사람의 본성을 알고 싶으면 그에게 권력을 주어보라”고 했다.  
   
지금 대법원장에게 사법부는 무엇인가. 정의와 법치주의는 무엇인가. 진실은 오로지 은폐를 두려워할 뿐이다. 사법제도의 신뢰와 사법부 구성원의 명예를 위해 더는 걸림돌이 되면 안 된다. 멈출 때를 아는 것(知止)이 지혜의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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