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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종전선언이 무조건 '평화'는 아니다
 
2020-10-28 09:56:05

◆ 이용준 전 외교부 북핵담당대사는 한반도선진화재단 대외정책연구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공산국가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들은 인간세상의 통상적 의미와 크게 다르고 그 이면에 다른 의도를 교묘히 은폐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아니고는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 대표적 사례 중 하나가 '평화'라는 용어다. 맑스레닌주의 교시에 따르면 '전쟁'과 '평화'는 공히 자본주의 타도라는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모순이 자본주의의 소멸에 의해 극복되어야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평화협정은 힘을 모으기 위한 수단"이라고 정의했다. 평화협정이 전쟁의 종료가 아니라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1973년 베트남 전쟁 종식을 위한 파리평화협정이 대표적 사례다.



북한은 베트남 평화협정에 고무돼 1974년 '대미(對美) 평화협정'을 제의한 이래 지금도 줄곧 이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말하는 '평화'와 '평화협정'은 바깥세상에서의 의미와 전혀 다르다. 북한이 대미 평화협정을 집요하게 주장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주한미군 철수, 주한유엔사 해체, 서해북방한계선(NLL) 철폐를 달성하고 북한 방식의 한반도 통일을 완성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북한의 의도는 김영삼, 김대중 정부에 걸쳐 2년간 남ㆍ북ㆍ미ㆍ중 사이에 개최된 '한반도 평화체제에 관한 4자회담'을 통해 수차례 확인됐다. 당시 회담에서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와 '미ㆍ북 평화협정(한국 배제)'을 양대 회담 의제로 설정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그것이 합의되기 전에는 실질 문제 협의를 개시할 수 없다고 고집했다. 결국 2년간의 회담은 의제조차 못 정하고 결렬됐다.


이런 시행착오를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 2007년 노무현 정부의 '종전선언' 구상이었다. 한반도 평화협정이 합의 불가능한 많은 난제를 내포하고 있고 더욱이 북한이 한국의 서명 자격 자체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어려운 쟁점 요소들을 모두 생략하고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서론 부분만 4개국이 간략히 합의해서 발표하자는 것이 종전선언 제안의 취지였다. 복잡하고 오랜 협상이 필요한 사안들을 모두 훗날로 미루고 '전쟁종결'이라는 원론적 사항만 조기에 발표함으로써 국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정치적 조급함의 산물이기도 했다. 종전선언 문제는 문재인 정부에 의해 승계돼 지금도 강력히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북한은 종전선언에 소극적 입장이고, 미국도 북한의 비핵화 없는 종전선언은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남북 간의 2007년 '10ㆍ4 선언'과 2018년 '4ㆍ27 판문점선언'에 '종전선언' 문구가 들어가 있기는 하나, 이는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요구를 수락하는 큰 양보의 대가로 어렵사리 포함된 타협의 산물로 보인다. 미국과 북한이 공히 종전선언에 미온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종전선언이 평화협정에 준하는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될 경우 북한은 이를 주한미군 철수, 유엔사 폐지, NLL 철폐 명분으로 이용할 것이기에 미국이 동의할 수 없다. 특히 NLL은 한반도 전쟁의 국제법적 종결 시 자동 소멸될 '해상휴전선'일 뿐이다. 반대로 종전선언이 법적 효력 없는 상징적 선언에 불과하다면, 북한은 이를 수용할 실익이 없다. 북한이 원하는 건 종전이나 평화가 아니라 주한미군 철수와 NLL 철폐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현상 변경은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대단히 신중히 추진돼야 한다. 실재하지 않는 평화를 평화협정이 창조할 수 없고, 실재하는 군사적 대치를 종전선언이 종식시킬 수도 없다. 70년간의 한반도 정전체제가 비록 비정상적이기는 하나, 그래도 70년간 한반도 평화를 유지해 온 토대였다. 평화체제도 종전선언도 명분은 그럴싸하지만, 진정한 평화 의지가 결여된 잘못된 합의는 그나마 70년간 유지돼 온 한반도 평화를 파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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