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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칼럼] 대한민국 건국사 바로알기
 
2020-09-07 13:18:11

◆ 이영일 전)국회의원의 칼럼 입니다.

이글은 지난 89일 대한민국사 연구소가 물맺돌 평생수련원강당에서 주최한 대한민국 포럼 제1회 모임에서 이영일 전)국회의원이 PDF 파일로 발표한 글을 풀어쓴 것입니다.  


1. 조국광복의 역사적 배경

대한민국 건국사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해방전후사를 객관적 사실을 중심으로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해방은 우리의 독립운동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식민모국이었던 일본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의 끈질긴 독립운동은 국제사회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명분이 되었고 일본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통한 조선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할 정신적 지주였다. 그러나 우리의 독립운동역량은 일본을 파멸시킨 실질적 힘은 아니었다. 한반도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을 궤멸시킨 미국과 미국의 요청으로 태평양 전쟁에 뒤늦게 참전한 소련군에 의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 결과 외세의 영향과 간섭을 벗어날 수 없는 해방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 신탁 통치를 둘러싼 찬반운동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분할 점령하고 있는 한반도 문제의 전후처리수단으로 5년간의 신탁통치안을 제안하였다. 소련은 이를 즉각 수락했지만 해방된 국내 정국의 민족진영은 한민족의 독립역량을 무시한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즉각 독립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국민들의 열망을 모아 신탁통치반대 범국민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북한공산집단은 소련의 지령에 따라 신탁통치를 지지했다.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은 처음에는 반탁을 지지했다가 북한의 지령과 신탁통치에 대한 소련 측의 해석을 들은 후 태도를 표변, 반탁에서 신탁으로 노선을 바꿨다. 미국은 신탁을 4개국(,,,)에 의한 5개년 신탁통치(Trusteeship)안을 내놓았는데 소련 측에서는 신탁통치가 강대국에 의한 독립 후견(Tutelage)이라 설명하면서 북한과 남조선노동당이 이를 수용하도록 지령했다. 소련은 공산세력이 막강한 조직력을 가진 한반도를 공산화할 절호의 기회가 신탁 통치와 함께 올 것으로 예상, 기대했기 때문이다.

미소 양국 정부는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 신탁통치 실시를 추진했지만, 이승만, 김구 등 민족진영의 절대다수인사가 이를 거부하기 때문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고 구체적인 정부 수립 방식을 놓고 국내정치세력 간에 협상을 갖자는 미국 측 안에 대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세력의 협상참여를 소련이 거부한다고 함으로써 미소공동위원회는 사실상 마비되었다. 여기서 신탁통치안은 사라진다.

 

. 소련이 북한에 세운 위성정권.

 

소련은 1945920일 당시 치스챠코프 소련 군정 사령관에게 스탈린이 보낸 비밀지령을 보내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와 관계없이 북한지역에 소련이 조종하는 위성 정권을 세우기 시작했다.(소련 붕괴 후에 밝혀진 구소련문서에서 지령내용이 밝혀졌다) 1946년 북한을 점령한 소련당국은 소련군 대위로서 북한 점령군으로 입북한 김일성 등을 내세워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기구가 중심이 되어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구호하에 북한지역의 모든 토지와 자산을 국유화했다. 농민들에게는 경자유전(耕者有田)원칙을 말했지만 그들에게 돌아간 토지는 없었으며 모든 농지와 공장, 시설은 국유화조치를 통해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갔다. 토지는 개혁이 아닌 국유화였다. 표현은 인민적 소유, 협동적 소유라지만 개인이 주인이 되는 농지는 사라졌다.

 

뒤이어 1947년에는 일본이 남긴 무기와 소련제 무기로 인민군대가 편성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북한지역은 소련 점령군이 펼친 철의 장막 속에서 외부세계 모르게 소련 위성 정권(A Satellite regime)이 세워진 것이다. 위성 정권은 주권행사를 소련이 지배하는 콤민테른에 의해 제한받는 정권이다. 체코의 자유화 운동(1968)이나 헝가리의 민주화운동(1958)을 소련군이 탱크로 진압한 명분이 바로 제한주권(制限主權)론이었다. 이를 매스컴에서는 후에 브레즈네프 독트린이라고 정의했다.

 

동유럽지역에 대한 제한주권론은 고르바쵸프가 집권한 후 소련(蘇聯)이 해체되면서 각국은 자기의 갈 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라진다. 뉴욕타임스는 소련의 제한 주권론 폐기를 시나트라 독트린이라고 표현했다. 시나트라의 팝송 My Way를 빗댄 표현이다.

. 민족진영의 선택과 갈등

 

신탁통치안이 힘을 잃으면서부터 북한지역의 소련 위성국가화는 탄력을 받아 가속화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민족진영은 미 군정의 하지(Hodge) 군정장관이 신탁 통치의 대안으로 추진하겠다는 좌우합작 정부안에 동조하는 인사들이 있었는가 하면 북한에 단독정권이 들어선 마당에 좌우합작 정부는 어불성설이라면서 남쪽에라도 즉각적으로 주권을 가진 독립 정부를 세우고 북한지역에서 소련군을 철수 시켜 통일국가를 만들자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전자를 대표하는 분이 김규식 박사, 여운영 선생이라면 후자를 대표하는 분이 이승만 박사였다.

 

이 당시 이승만 박사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중에서 가장 국제정세에 밝았다. 로버트 올리버라는 미국인 교수와 에밀 쿠베로라는 러시아인을 비서로 고용, 미소 공동위원회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는 하지 군정장관을 만나 미소 공동위원회를 통한 좌우합작 정부 성립의 부당성과 불가능성을 지적하면서 남한에라도 정부 같은 기구를 만들어 통일 독립을 추진해야 한다고 설득했으나 본국 정부의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이승만의 주장을 묵살 했다. 이에 실망한 이승만은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전국 유세 중 전라북도 정읍 유세(遊說)’에서 남한에라도 과도정부를 세워 통일 독립을 강력히 추진할 기구를 만들어야 할 시기적 필요성을 강력히 역설했다. 유명한 정읍(井邑)발언이다.

 

. 이승만의 미국방문과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

이승만은 하지 미 군정 장관을 상대로 교섭하는 것을 포기하고 단신으로 미국을 방문, 유엔감시하에 자유총선거를 실시, 통일 독립된 민주 한국을 건설할 방도를 구상, 미국의 국무성과 의회 지도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미국은 미 국무성의 조지 케난(George kennan)을 단장으로 하여 한반도의 전략 가치를 평가한 결과 미국의 국익에 무익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 처리케 함과 동시에 일본군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파병한 주한미군을 1948년까지 완전 철수키로 하는 한편 한국재건지원을 위해 계상했던 경협자금 500만 달러마저도 유럽의 전후 부흥을 위한 자금으로 전용하였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미국을 상대로 이승만이 펼친 유엔감시 자유 총선거를 통한 한국 문제처리방안은 당시 상황에서 미국의 외교적 이익에 맞아떨어졌다. 미국은 아무런 대안없이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감시 아래 1948년 안에 한반도 전역에 걸친 자유 총선거를 실시, 통일독립 정부를 수립한 후 주한미군을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방식이 훨씬 더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미군 철수 일정만 1948년에서 정부 수립 후인 1949년으로 1년 연기할 뿐이었다.

 

. 자유총선거와 대한민국 수립

 

유엔은 1948년 유엔총회결의로 유엔감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전 한반도에 걸친 자유 총선거를 통해 독립 국가 수립을 결의했지만 소련은 자기들이 북한에 세운 위성정권의 해체를 우려, 유엔감시위원단의 북한 방문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 전역에 걸친 총선실시는 어려워졌다. 그러나 유엔 소총회는 선거 가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총선거를 실시하고 이렇게 설립된 정부를 유엔이 인정하는 합법 정부라고 결의하였다.

이때부터 북한 김일성은 소련의 지령에 따라 유엔감시 하의 자유 총선거를 통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 조선공산당이 주도하는 전국에 걸친 파업과 폭동, ? 194843일을 기해 제주폭동 유발 ? 김일성주도로 1949419일 평양모란봉 극장에서 남북한 제 정당 사회단체지도자 연석회의를 열자고 제안하였다.

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김일성이 주도한 남북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인데 평양에서 열린 이 회의에 김구, 김규식, 조소앙, 김원봉, 홍명희 등 항일독립운동지도자들이 참석한 것이다. 4.3 폭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열린 이 연석회의는 김일성 주도로 수립된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설립을 지지하고 북한이 만든 인민군대의 사열를 받는 행사로 시종 되었으며 김구 선생이 제안했던 통일 독립을 위한 정치지도자 회담은 아예 열리지조차 않았다.

이 때 평양을 방문한 인사 가운데 홍명희, 김원봉은 북한에 그대로 남고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는 서울로 돌아왔다. 이들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성립을 지지해주는 들러리 역을 하고 돌아온 셈이다. 이 회의에 다녀온 후 김구는 유엔감시 하의 총선거를 통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이 5.10 총선거에 출마하는 것조차 반대했다. 명분은 남북한을 망라한 통일 정부 수립 아닌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것이었다. 북한에 소련이 만든 위성국으로서의 김일성 정권이 수립된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와서도 남한에서 실시되는 자유 총선거를 반대한 것이다.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의 비극이다. 훌륭한 독립운동가였지만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한 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 소남한 단정반대투쟁구호의 출현

 

이때부터 북한 공산당의 대남선전은 이승만이 주도한 이른바 소남한 단정반대운동”(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운동의 약칭)으로 투쟁구호를 통일하고 1948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같은 목소리로, 같은 구호로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 구호가 1970년대 후반부터 활성화된 주사파 학생운동권에 침투되어 대한민국을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 정의가 부정되고 기회주의가 판친 나라, 민족분열을 초래한 나라로 왜곡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런 구호가 전교조가 주도하는 역사교육에 침투, 청소년의 역사 인식까지를 왜곡시킨다. 이러한 인식의 치유 없이는 대한민국의 정당성, 정체성은 위기를 맞는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다.

. 결론

 

대한민국이 유엔감시 하에 실시된 자유 총선거로 수립된 것은 소련 군정이 콤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일방적으로 수립한 북한 정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건국의 정통성, 정당성이 완벽하다. 대한민국은 가장 민주적이고 가장 합법적 정부다. 유엔은 1948년 파리 유엔총회에서 한국을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유엔총회결의는 결의의 어느 부분에도 유엔감시가 불가능한 지역에 대한민국과 정통성을 경쟁하는 다른 정치 실체가 존재한다는 규정이 없다. 이는 국제사회가 한국만을 한반도에 세워진 합법 정부로 인정한 것이다. 다만 한반도를 대표하는 정부라는 표현이 결의에서 빠진 것은 유감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가 후대들에게 제대로 전수되고 되풀이해서 강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요즘 세대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거나 관심이 없어 좌익들의 거짓 선전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正體性危機). 우리 사회는 이런 도전에 직면하여 마치 주눅 들린 사람들처럼 진리를 말해야 할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다. 강단에서 학자들이, 언론에서 지식인들과 기자들이 침묵하고 있다. 이제 입을 열어 진실을 말하고 허위와 거짓과 의 투쟁해서 이겨야 우리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지켜진다. 대한민국사 연구소가 창립된 까닭이고 대한민국 포럼은 닫힌 입을 열기 위해 모였다.

 

2. 이승만의 공헌 평가

 

. 가장 유능한 지도자 이승만

 

해방 조국에서 나라를 바로 세우고 국정을 제대로 이끌어 갈 인물을 꼽으라면 이승만 박사 한 분이었다고 단정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생과 성장 배경은 말할 것도 없고 시대의 문제의식과 경력, 학력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했다. 해방된 나라에 이런 인물을 지도자로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만큼 훌륭한 지도자였다. 독립운동 지도자 가운데 나이도 가장 많은 1875년 생으로 김구선생 보다 한 살 더 많았지만 아시아 지도자들 가운데 장제스, 모택동, 호지명, 네루, 터어키의 케말파샤보다 나이가 많았고 학문이나 경륜에서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뛰어난 지도자였다. 특히 그는 한일합병 후에는 4~5개의 국내외에 세워진 임시정부들에서 하나같이 대통령 아니면 총리로 추대되었고 임시정부가 상해임시정부로 단일화되었을 때 초대대통령으로 옹립되었다. 해방된 후에도 공산당이 주도한 건국준비 위원회마저 대통령으로 추대할 만큼 높이 평가받았던 지도자였다.

 

. 이승만 대통령의 공헌

 

그분은 해방정국에서 미소 냉전이 한반도에 미칠 영향을 정확히 내다 본 유일한 지도자로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첫째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로 독립정부를 세울 것을 주창,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 낸 지도자였다. 만일 그분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한반도는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 동유럽의 공산정권의 신세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국제정치를 전공한 분으로서 주권행사를 제한받는 소련 위성국가의 길을 거부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꽃피는 자유민주국가의 길을 선택했다.

 

둘째로 그분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주소를 바꾸었다. 신라 통일이래 한반도는 지정학적 주소를 항상 대륙세력의 꼬리에 묶어 두면서 북방민족을 섬겨왔다. 그 결과는 끝없는 외침과 굴종과 가난을 강요받는 역사였다. 한말(韓末)에도 친러파와 친청파 간의 갈등으로 나라의 갈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좌고우면하다가 일본의 속국, 식민지배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승만은 이러한 지정학적 현실을 통찰하고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주소를 대륙세력의 꼬리에서 해양세력의 대륙진출 교두보로 바꾸었다. 그분은 이 길을 택함으로써 오늘날 한국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신생독립국가 중에서 국가건설(Nation Building)에 가장 성공한 국가가 될 토대를 쌓던 것이다.

 

셋째로 그분은 일제에서 해방된 한국이 선진 민주국가로 발돋움할 기초가 태부족한 상태임에 유의, 민주주의가 성장할 기초를 하나씩 다져나갔다. 인구 87%의 문맹률을 한글 깨치기 운동을 펼쳐 문자 해득률을 80%로 끌어 올렸고 해방 후의 가난한 재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배워야 산다면서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추진하였으며 농지개혁을 단행, 조선조 이래의 적폐인 소작농체제를 자영농 체제로 바꾸었다. 양반만이 학문을 배우고 재산을 가질 수 있었던 조선조의 유산을 일거에 제거했다. 민주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만들고 기초자치단체장 선거를 면 단위까지 실시하는 등 미국 민주주의를 모방했다. 이 제도들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넷째로 6.25 북한의 남침에서 국가를 수호했고 한미방위동맹을 체결, 건국 후 70년 동안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했다. 6.25 동란을 거치면서 한국 사람들은 최초로 반공,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3. 이승만과 친일문제

 

.기본입장

 

친일문제에 관해서 이승만이 최초로 자기 입장을 밝힌 것은 194511월 서울 종로 국일관에서 열린 임시정부요인 귀국환영연회 자리였다. 이 모임에서 독립운동의 국내파와 해외파 간에 친일문제를 놓고 설전이 벌어졌다. 해외파들은 자기들만이 친일하지 않고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고 주장한 데 대해 국내파들은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받으면서 사업을 일궈 독립운동 자금을 만들어 보내는 등 나름대로 어렵게 독립지원사업을 벌여왔다고 응수했다. 오히려 국내에서의 운동이 해외에서의 운동보다 더 어려웠다고 반박하면서 고성이 오갔다.

이때 이승만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당시 조선의 주권자인 조선 국왕이 일본의 겁박에 눌려 총 한 발 쏘지 않고 나라를 일본에게 바침으로써 2천만 민중이 친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고 지적하고 따라서 친일책임을 묻는다면 조선 국왕에게 물어야지 일제 치하에서 어렵게 살아남은 동포들끼리 서로 친일책임을 놓고 설전을 벌인다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지적한 후 이제 우리는 너나없이 뜻과 힘을 합쳐 나라 세우는 데 힘쓰자호소, 좌중을 안정시켰다.

 

. 조선멸망의 법적 근거

 

일본의 조선합병은 세계 제1차대전도 발발하기 전인 1910년의 일이다. 사기(詐欺), 강박(强迫)에 의한 국가합병은 원천무효라는 국제법 원칙은 1932 미국 국무장관 스팀슨 독트린으로 구체화 되었는데 한일합병(韓日合倂)은 국제법의 이러한 원칙이 확립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이승만은 처음부터 국가를 일본에 빼앗긴 것은 무능한 조선 국왕과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내세운 시대착오적 유생들과 무능한 양반계급에 있다고 보았다. 미국에서 망국 소식을 듣고 이승만은 보기 싫은 조선왕과 양반계급, 그 꼴 사나운 상투가 떨어진 것은 다행이지만 그래도 나라를 잃은 것에 분통이 터진다면서 국권 회복과 독립에의 의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 친일청산조치

 

첫째 그분은 해방 후 정부 수립과 동시에 나라를 망쳐놓고도 일본 황실이 공동관리하던 이왕가(李王家) 재산으로 식민지 시대에 호의호식했던 이왕가(李王家) 재산을 모조리 국유화하였다. 친일행위 처벌의 하나였다.

 

둘째 제헌국회를 선거할 당시 친일행위자들로 간주 될 인사들의 국회의원 출마를 막았다.

 

셋째 특히 초대 내각은 독립운동의 경력을 가진 분들로만 구성했고 한국민주당이 추천한 내각 인물 중 독립운동의 경력을 가진 김도연(金度演)을 제외한 나머지 인사들은 독립운동경력이 없다고 내각 인선에서 배제했다.

 

넷째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중 외교에서 철저히 반일노선을 고수, 이승만 라인을 선포, 평화선을 설치했고 6.25 전란 중 일본인들의 참전문제도 고려하라는 맥아더 사령부의 구상을 단호히 배격하였다. 또 미국의 강도 높은 압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1910년에 조선과 체결한 합병조약의 원천무효( originally null and void)를 수용치 않기 때문에 한일수교를 거부했다.

 

. 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위원회를 통한 처벌

 

흔히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를 통한 친일분자 청산 미흡을 과오의 하나로 지적한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국회가 제정한 반민족행위자 처벌특별법에 따라 반민특위를 구성했으며 반민특위가 요구한 친일분자 559명을 체포하고 221명을 기소한 데 이어 38명을 재판에서 처벌했다. 당시 이 대통령은 반민특위가 요구한 대상들을 일률적으로 처벌하기보다는 친일 악질분자로 지탄받는 자들만 선별 처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때 사고가 발생했다. 반민특위의 완장을 차고 다니면서 분별없이 사람들을 잡아 가두거나 고문을 자행, 특경대가 공분을 샀다. 이를 계기로 특경대는 해체시켰지만 반민특위는 해체시킨 일은 없다. 친일 악질분자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국론이 갈리는 와중에 김일성의 6.25남침이 시작되었다.

3년간 계속된 전쟁이 휴전으로 끝나면서 국내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반민특위가 처벌할 인물 가운데 전쟁 중에 사망했거나 실종된 자도 나왔고 또 국내상황도 6.25 전란 기간 중 용공 부역 행위자들의 적발, 처벌이 시국의 우선적 과제로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반민족행위자 처벌 문제가 사실상 실종된 것은 유감스럽지만 그렇다고 이승만 대통령을 친일파와 결탁했다고 비판하고 그분이 직접 조성한 국립묘지에서 그분의 시신을 파내자고 짖어 대는 것은 국민적 분노를 일으킬 망발이다.

 

. 북한의 친일파 척결 평가

 

흔히 북한은 친일파 척결에 과감했다고 말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대상이나 인물에 대한 자료, 특히 재판기록조차도 없다. 친일파를 완전히 숙청했다는 선전만 있었을 뿐이다. 또 북한의 초대내각에는 친일분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김일성의 실제 김영주는 일본 관동군에서 잔뼈가 굵은 인간이지만 조선노동당 조직부장을 역임했다. 북한에서 발행된 조선전사()에는 김일성이 일제 강점기에 각 분야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배척하지 말고 활용하라고 지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 친일파 논쟁의 정치적 의미

 

1945년의 해방은 독립운동가들에게나 식민지상태를 살아오던 온 겨레에게 기쁜 사건이었다.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비록 타율적인 해방이긴 해도 독립의 꿈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뻤고 식민지상태에서 살아온 동포들도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났기 기뻤다. 해방과 함께 친일파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해방 후 친일파가 있다면 일본이 다시 재기하여 이 나라를 다스려주기를 바라는 자일 것이다. 그러한 친일파는 있어 본 일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이 땅에는 해방과 동시에 일본 시대에 배웠던 지식과 경험과 정보를 바탕으로 해방된 조국을 국가다운 국가로 만들기 위해 너나없이 새 국가건설에 나섰다. 일본군에 복무했던 자들은 국가안보를 위해, 기업에서 실무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전문경영인으로 발돋움하면서 경제발전의 기수가 되었다. 일본의 조선 통치기구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중앙과 지방정부의 요직을 맡아 새 국가건설의 기초를 다졌다. 결국 이들은 오늘날 발전 경쟁에서 일본을 따라잡는(catch up with Japan) 극일(克日)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스포츠에서도 한일간의 경기에서는 일본만은 이겨야 한다는 필승의 신념을 공유했다. 이 러한 시기에 친일파는 더 이상 존재할 여지가 없어졌다.

 

. 반일정서를 악용하는 좌파 심리전

 

극일운동의 심리적 이면에는 일본을 반대한다는 심리가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한국에서 친북좌파들이 겨냥하는 친일파 논리는 국민의 내심에 잠재하는 반일감정을 역이용, 좌익들이 자기들이 등장을 반대하는 우익을 견제하고 국민들과 이간시키는 심리전 도구였다. 친북 좌파들은 대한민국의 우파 집권층을 친일파청산을 소홀히 했다면서 이들에게 고의로 친일파 프레임을 씌우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집권세력을 친일매판세력, 반민주독재세력, 수구 꼴통 세력으로 악마화(惡魔化), 죄인화(罪人化)한다. 자기네들은 반일 민족세력‘, ’반독재 민주세력‘, 양심적인 진보세력이라고 주장, 도덕적 우위성을 내세운다. 이러한 대위법은 좌파들이 한국정치게임에 개입하기 위해 만든 조작일 뿐 실제 상황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작의 위험성을 알고 이를 격파하는데 앞장설 훈련된 우파가 없었다는데 문제가 있다.

 

. 극일운동의 주역

 

일제 강점기에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분야를 지키면서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해 왔다. 삼성, LG, 현대 등 대기업 역시 일본을 배워 일본을 제압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좌익 운동권 가운데 어느 분야에서나 일본을 제압하거나 따라잡은 실적 있는 인물은 전무하다. 이론 분야에서도 좌파들은 일본 서적에서 배워오고 그것에 맹종한다. 그러나 좌파들은 남한 사회에 존재해야 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일본식민지 시대를 잘 견뎌낸 사람들을 일거에 친일파로 몰면서 자기들을 반일 민족세력으로 대위한다. 그러나 그들은 친일파가 아니라 오늘날 극일 운동의 주역들이다.

 

 

. 친일프레임은 심리전 수단이다

 

좌익들은 그들이 군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펼친 반 독재투쟁을 민주화운동으로 포장하고 있다. 이 땅의 좌파들은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이 타도해야 할 적을 항상 악마화, 죄인화하는 수법의 하나로 친일파의 프레임을 씌운다. 2020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광복회장 김원웅의 말대로 이승만은 친일파와 결탁했고 박정희, 백선엽은 친일의 확실한 근거가 있다면서 이분들의 묘를 국립묘지에서 파내자고 선동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성립을 부정하고 북한 정권에 항일투쟁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논리다.

이 논리대로 라면 김일성의 6.25남침은 그들 말로 친일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민족해방전쟁이기 때문에 이 전쟁에 참전하여 목숨을 잃은 호국영령들은 민족해방전쟁을 반대한 역적들이기 때문에 누구도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다는 모순에 빠진다.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을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동조하지 않는 한 누구를 막론하고 친일파로 몰릴 수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는 친일파는 존재할 수 없고 오직 극일파만 있을 뿐이다. 앞으로 이 정권은 의도적으로 친일파 척결운동을 벌이는 한편 그 대안으로 친중파의 등장을 추진할지 모른다.

 

4. 이승만 이후의 한국사 바로 알기

 

. 북한의 4대군노선

 

6.25 전쟁이 끝난 후 한국 사회는 반공 민주국가로 국민적 정체성이 확립되고 한미군사동맹을 체결, 튼튼한 안보 토대를 구축하였다. 따라서 6.25와 같은 북한의 남침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은 휴전이후 모든 역량을 동원, 이른바 4대 군사 노선을 정비, 구축했다. ?전 인민의 무장화, ?전군의 간부화 ?전 국토의 요새화, 장비의 현대화를 추구했다. 1970년 조선노동당 제5차 당 대회에서 김일성은 4대 군사 노선의 완성을 선언하면서 대남 공세를 강화했다.

 

이 당시 베트남 전쟁의 판세는 공산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감에 따라 김일성은 중국을 방문, 모택동과의 담판에서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중국이 이번에만 도와주면 기필코 남조선 해방을 완수하겠다고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소련의 위협에 대비,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김일성의 협력 요청을 거부하고 김일성에게 중국공산당의 성공적인 혁명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라고 권면했다. 중공이 장제스(蔣介石) 군대와 싸워 이긴 것은 무력이나 경제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인민들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다면서 교사, 노동자들에게 공산당의 주의, 주장에 동조하도록 조직화할 것을 강력히 권면했다.

 

. 간접침략의 개시

 

이때부터 김일성은 삼척, 울진지구에 무장간첩을 상륙시키고 통일혁명당 식의 지하당 공작 같은 이른바 혁명 투입, 전략을 강화하는 대신에 이를 지하화 시키고 남한 내의 초중고등학교 교사들과 노동자 세력,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포섭, 북한지지 쪽으로 유도하는 대남혁명역량을 강화해 나갔다. 특히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픽션(Fiction)임을 내세워 친일파에 대한 증오심을 조작하고 5.18의 광주를 미화하는 등의 심리공작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다. 이러한 공작이 추진되어 가는 속도에 비례해서 언론계에도 손을 뻗치고 장학사업을 통해 대학생들의 좌경화(주사파)운동을 후원하고 미래 법조인사들을 친북 동조세력으로 양성하기도 했다.

 

. 박정희, 전두환의 간접침략 분쇄조치

 

박정희는 북한의 대남무력도발이 강화되는 추세를 내다보고 두 가지의 조치를 강구한다. 첫째는 남북한의 대결구조를 대화 구조로 전환함으로써 북한의 무력 남침 의지에 제동을 걸었다. 북한에 사람을 보내어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둘째로는 북한이 남북대화를 앞세워 전개해 올 남북한의 사상전, 조직전, 심리전에 대비하는 조치를 강구한다. 북한의 전면 남침은 한미연합방위태세 때문에 성공하기 힘들겠지만, 북한의 대남 심리전, 사상전, 조직전(組織戰)에 밀리면 월남처럼 북한의 비군사적 방식에 의한 적화통일여건이 조성될 수 있다면서 이를 차단하는 조치를 취한다. 즉 간접침략을 막는 조치를 적극 강구하였다.

 

. 전교조와 민노총의 불법화

 

누구나 바둑에서 이기려면 상대방이 놓고 싶은 자리에 먼저 바둑을 놓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한 후 강점은 지키면서 약점을 보완하는데 간접침략 방지의 중점을 두었다. 그는 교육의 목표설정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우수한 석학들을 동원, 국민교육헌장을 만들고 이를 교육의 내용과 실천으로 확산시키는 한편 민족사적 정통성을 살리는 역사교육을 강조했다.

이런 사업을 위해 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동시에 스승이어야 할 선생님들이 노동자로 자기들의 위치를 끌어내리는 노조결성을 막았다. 아울러 노동자의 민주적 단결권은 인정하되 개발도상국인 한국에서 노동자들의 폭력적 강성파업은 이를 철저히 불법화하면서 단속했다. 이러한 조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와 충돌하기 때문에 많은 논란이 일었지만 민주주의의 물질적 기초를 다지는 국력배양을 위한 조치라고 명분을 세웠다. 이런 방식으로 북한 간접침략의 여지를 차단했기 때문에 김일성은 박정희를 제거하지 않고는 대남적화사업이 어렵다고 판단, 박 대통령을 바로 시해할 목적으로 청와대를 기습한 19681. 21 사태를 일으켰다. 박정희의 간접침략 분쇄조치는 전두환 정권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 간접침략의 통로를 열어준 민주화 시대의 출현

 

노태우의 6.29선언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만개시키는 조치였지만 그 역설로서 자유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릴 간접침략의 통로를 크게 열어주었다. 주사파들이 주도하는 민주화 시위는 명목은 자유민주주의였지만 그 본질은 민중 민주주의 활동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시위였기 때문에 전교조와 민노총, 민언련(民言聯), 민주 변호사회, 참여연대 등이 등장할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주사파 활동은 그 절정기를 맞이했다. 학생운동권은 민족해방(NL)운동 이외에도 여성, 환경에 까지도 그들의 영향력을 키우면서 정부와 국민을 이간시키는 선전 조직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좌파가 득세할 공간이 이처럼 넓어지면서 결국 정권은 김영삼에게로 넘어갔고 김영삼은 자기의 민주화 공헌을 내세우기 위해 5.18의 광주사건을 국가공인의 민주화운동으로 격상시키고 광주에 5.18 국립묘지를 만들었다. 민족정기 확립 차원에서 조선총독부 자리의 중앙청을 없애고 반일(反日)의 기치를 올렸다.

 

. 김대중 정권의 전교조, 민노총 합법화

 

뒤이어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은 재임 중 그때까지만 해도 유보적이었던 전교조를 이해찬 당시 문교부 장관의 요청으로 합법화시켰고 아울러 오랜 현안이던 민주노총도 산업민주주의 실천이라는 명분으로 그 존재를 합법화했다. 이런 조치로 대학은 주사파의 활동무대가 장악되었고 초중고등학교의 교사들은 전교조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산업현장은 민노총이 장악, 북한 공산당이 오랫동안 노려온 간접침략 성립의 토대가 구축되었다. 그간 국민적 지지와 기대를 모았던 이들의 민주화운동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로서의 민주화가 아니라 민중민주주의 내지 인민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주사파 활동의 공간을 보장하고 확장하는 의미의 민주화였다. 이들은 장차 북한 공산주의 정권과의 합작 통일을 노리는 체제변혁노선을 추구했다. 마침내 촛불시위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헌법 이념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가 대내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 북한이 교시한 인민민주주의(민중민주주의)의 투쟁방법

북한은 자기 체제 내의 저항세력을 반동분자, 반혁명분자로 악마화(惡魔化), 죄인화(罪人化)하여 처단한다. 장성택의 죽음이 바로 그 실례다. 한국에서는 자기들에 대한 모든 도전세력에 대해 국민들의 증오 유발에 편리한 용어를 사용한다. 국민들의 역사적인 반일감정을 이용, 친일파로 몰아가는 수법을 우선 선호한다. 둘째는 매판세력 내지 부패세력으로 몰아 죄인화를 도모한다. 셋째는 반민주 독재세력으로 단죄한다. 자기들 파가 아닌 모든 집권세력은 친일파거나, 매판, 부패세력이거나 반민주독재세력으로 몰면서 자기들을 반일민족세력, 양심적 민주세력으로 포장, 도덕적 우위를 도모한다. 이런 악마화, 죄인화 선전공작으로 대중을 세뇌하여 지지세력의 저변을 넓힌다. 집권세력을 골 빈 윌빙 세력으로 몰아붙이고 헬 조선, N포세대 등의 구호가 촛불시위의 자양분이 되어 박근혜 정권을 퇴진으로 몰아넣었다.

5. 북한 대남전략의 허실(虛實)

 

.북한 혁명노선의 본질

 

김일성은 196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열린 비동맹정상회담에 참석, 그의 유명한 3대 혁명 전략을 발표했다. 첫째 북한을 전 한반도에 걸친 사회주의 혁명의 든든한 보루로 만든다. (북한의 사회주의 혁명역량) 둘째 남한 내에 북한의 혁명에 공감하고 지지할 세력을 키운다. (남조선 혁명역량) 셋째 북한의 대남공작을 민족해방투쟁으로 전 세계가 긍정하도록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보한다(국제 혁명 지원역량)는 것이 이른바 3대 혁명역량이다. 그는 며 이러한 역량이 농축되는 시기를 결정적 시기로 보고 전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을 완수하겠다고 했다.

 

. 허구로 끝난 3대 혁명역량

 

김일성이 3대 혁명역량을 부르짖으면서 역량비축을 시작한 이래 어언 6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한이 창조와 개발을 향한 선의의 경쟁에 나서자고 제안한 지도 50년이 지났다. 이 시기 동안 남북한의 역량에는 엄청난 변화가 발생했다. 총량 GDP1인당 GDP에서 6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을 앞섰던 북한이 1972년을 기점으로 한국에 추월당하기 시작, 2020년 현재 남북한의 격차는 한국이 총체적 역량에서 북한을 50배 이상 앞선다. 북한은 지금 지구 최빈국이며 한국은 세계랭킹 12위의 국가, G20 국가의 반열에 올라 있다.

 

. 핵무기에서 우선?

 

군사력 분야에서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서 앞서 있다고 하지만 재래식 군비에서는 한국이 북한을 완전히 제압한다. 핵과 미사일 전력도 한국이 핵확산금지조약(NPT)과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라는 국제적 규범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북한을 제압할 능력이 넘친다. 북한은 지금 식량, 의료, 에너지의 태부족 상태이고 기술 수준도 세계의 흐름에서 한참 뒤져있다. 그들은 핵무기를 사회주의 혁명의 보검이라고 강조하지만, 국제사회는 핵무기 비확산 조약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11개에 달하는 대북제재 결의를 통해핵과 미사일 포기를 북한에 강도 높게 요구, 압박하고 있다.

 

. 성립 불능의 연방제 공세

 

지금 김일성이 말한 3대 혁명역량은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확보된 것이 없다. 3대 혁명역량은 하나의 허구에 그치고 말았다. 요즘 한국에는 북한을 존중하고 남북한 간의 화해와 협력에 큰 비중을 두는 주사파 정권이 출현, 유사 파시즘 통치행태를 보여 일견 남조선 혁명역량이 농축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북한 자체의 사회주의 혁명 역량은 고갈상태다. 미국 Pitch 신용평가회사는 작년도 북한의 경제성장률을 ?8.5%’로 추산하고 있을 정도다. 따라서 오늘의 북한은 한국과의 대등한 차원에서의 폭넓은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거나 감당할 능력이 없다.

그간 여론 상으로는 남북한 연방제나 연방의 정도를 낮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실시문제가 심심찮게 거론되고 20006.15선언을 전후하여 실제로 남북한 지도자들 간에 논의된 바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비핵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떠한 논의도 진척될 수 없다. 연방구성체 간에 일방은 핵을 보유하고 있는데 타방에 핵이 없다면 군사력의 비대칭성으로 연방의 구성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한쪽 다리씩을 묶어 2()3()을 이루는 낮은 단계의 연방을 무리하게 추진한다고 하더라도 남북한의 현 상황에서 보면 성과가 나기보다는 공도동망(共倒同亡)이 우려된다.

6. 전망

 

. 비전과 개혁구상이 없다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현 정부는 갈수록 법치주의를 비롯한 자유민주주의의 기재(Mechanism)들을 약화시키면서 그간 대한민국을 유지, 발전시켜온 역사를 부정적으로 몰아간다. 사회 전반에 대해 뚜렷하고 올바른 개혁프로그램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적폐청산으로 대체하고 있다. 적폐청산은 부분적으로 일시적인 효과를 얻을 수는 있지만 지속적인 효과를 만들지 못하고 스스로가 적폐로 변해간다.

또 정권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나 가치를 제시하지 못한다. 적폐청산만 내세울 뿐 미래상을 제시하지 못한다. 적폐청산만으로 이루어낼 성공모델이 없고 그러한 역사도 없기 때문이다. 집권수단은 오직 저항세력의 악마화와 적폐를 내세운 희생양(Scapegoat) 만들기뿐이다.

대한민국을 어디로 이끌어 갈지 방향과 비전을 내놓지 못한다. 결국 세금복지정책을 통해 대중들의 환심을 사는 방법만 구사한다. 국민들에게 미래를 향한 비전 제시 없이 그때그때의 인기만을 추수하고 편 가르기를 통해 자기 지지세력만 감싸는 통치 수법을 Populism이라고 정의한다면 현 정부는 여기에 해당한다. 학자들이 유사(類似) 파시즘이라고 규정하는 정치행태다.

 

. 대중시위의 효율성

 

자유민주주의자들이 이러한 세력과 맞서서 싸울 가장 좋은 방도는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가 아니더라도 자유를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 할 과제는 많다. 민주국가에서 가장 합법적으로 타당하고 효율적인 투쟁방법은 비폭력적 대중시위이다. 헌법이 보장한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활용하여 대중들이 쉬지 않고 비폭력적 시위를 이어가는 것이다.

미국 사회학자 Franchesca polletta는 그녀의 명저 Freedom is An endless Meeting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부단히 궐기하여 파쇼권력을 상대로 시위를 멈춰서는 안 된다면서 폴란드의 카친스키 정권과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정권이 치중했던 언론통제, 사법 장악 기도 등 자유 억압의 Populism을 막는데 큰 성과를 올린 선례를 제시하고 있다.

 

Erica ChenowethMaria Stephen은 전체 유권자의 3.5%가 전국에서 일거에 비폭력시위에 나서면 정권의 악행을 저지함은 물론이거니와 정권의 명줄까지 끊을 수 있음을 사례연구를 통해서 입증하고 있다. 모든 비폭력시위는 그 규모가 커지고 빈번해질수록 정권에 대한 공직자들의 충성심이 약화(弱化), 소진(消盡)되기 마련이다. 경찰이나 군인들의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흔들리면 정권변동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 앞으로의 대책과 전망

 

모든 Populism 정권은 그들을 성공시킨 방법으로서의 악마화, 죄인화의 허구를 파헤치고 까발림으로써 그들 존립의 근거를 무력화시켜야 한다. 그들은 매스컴을 통한 국민 기만술로 정권을 획득했고 유지하기 때문에 그 강점을 무력화시킬 대중계몽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여기에 역사교육의 필요성이 있다. 나아가 건전세력 모두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역사교육을 지역별로, 계층 별로 펼쳐야 한다.

현 정권의 대중 기만 공작이 시도될 때마다 안건별로 대중시위를 전개해야 한다. 2019년에 성공했던 다중시위를 펼치면서 여기에 대중교육을 병행해야 한다. 저서판매 활동도, 북 컨서트(Book-Concert)도 투쟁의 한 형태로 모색되어야 한다. 악마화와 죄인화를 역이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정치투쟁이 가장 효과적이지만 시민단체 운동과 정치 운동은 구별되어야 한다. 현재는 야당이 좌파들의 선전 공세로 오염된 여론에 짓눌려 효과적인 대중투쟁을 지도할 역량을 상실한 상태다. 모든 선전전, 조직전에서 현재의 여당과 경쟁할 수 없다. 여당의 실패와 실수를 통해 반사적 이익을 기대하면서 여당보다는 덜 해로운(lesser evil)세력으로 변모하는 자구(自救)노력이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김종인이 5.18 광주 묘지를 참배한 것은 구여당에 대한 현 집권세력의 공세에 선을 그으면서 앞으로 시민저항권을 무기화하겠다는 포석으로 보인다.

현재의 집권세력은 상대방을 타도하는 기술은 빼어나지만 정권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경륜과 철학이 부족하기 때문에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할 능력 부족, 코로나 19로 무너지는 경제 사정 악화 때문에 그간 허위선전으로 쌓은 지지의 비축(Reserve of Support)이나 정의와 공정, 도덕적 우위와 같은 상징자산(象徵資産)이 조만간 고갈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러한 사태 전개를 내다보면서 현 정권의 무능, 위선, 불의를 소재로 집권세력을 악마화하는 조직전과 선전전에 주력하는 노력이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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