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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지금은 최장집·박세일이 꿈꾼 나라 되짚을 때
 
2023-12-01 15:31:42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사회과학 분야에서 우리말로 쓰인 대표적 저작을 꼽으라면 나는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박세일 교수의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을 들고 싶다.

개인적으로 두 사회과학자를 어느 정도 알고 지내왔다. 최장집은 1980년대 초반 대학원 석사과정을 다닐 때 만났다. 비판사회학회 전신인 산업사회학회 공부 모임에서 처음 만나 서구사회 국가론을 직접 배웠다. 그 시절 그로부터 익힌 안토니오 그람시와 니코스 풀란차스의 국가론은 나의 공부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최근까지 그를 지속적으로 만나왔고, 존경하는 스승의 한 분으로 그는 내게 작지 않은 가르침을 안겨줘 왔다.

박세일을 처음 만난 것은 2000년대 초반 신문사 좌담 등을 통해서였다. 내가 개설한 학부 강의에 그를 초청해 강연을 들었고, 그가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연구했을 때 다시 만나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그의 ‘창조적 세계화론’ 서평 등을 쓰면서 그의 생각을 이론적·실천적으로 숙고하게 됐다. 최장집만큼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어렵지만, 그의 선진화론은 나의 사회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데 작지 않은 도움을 안겨줘 왔다.

널리 알려졌듯 최장집은 민주화론을 체계화한, 박세일은 선진화론을 주조한 21세기의 첫 20년 동안 우리 사회를 대표한 정치학자와 법학자다. 박세일은 그가 다뤘던 넓은 주제들을 보면 정치경제학자라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최장집과 박세일이 우리 지식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를 각각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점이다. 나를 포함해 후배 또는 제자 세대는 두 사람으로부터 오랜 시간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아왔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주요 내용

민주화 시대가 한 사이클을 마감하는 것으로 보이는 현재, 그렇다면 최장집의 민주화론과 박세일의 선진화론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21세기 대전환기를 맞이해 새로운 시대정신을 모색해야 한다면, 그 중요한 출발점의 하나는 민주화론과 선진화론에 대한 다각적 성찰에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여기서 다뤄보고 싶다.

마침 최장집과 박세일은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선명히 담은 대표 저작을 발표한 바 있다. 앞서 말했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와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2006)이 바로 그것이다.

40년 전 최장집을 처음 만난 이후 학교는 달랐지만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봐 왔다. 최장집은 내가 아는 한 우리 사회 최고의 모범적인 사회과학자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최장집은 이론과 실천을 생산적으로 결합한 정치학자다. 그가 지식사회를 넘어 시민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 담론은 1998년 김대중 정부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아 발표한 ‘민주적 시장경제론’이다.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국가-시장-시민사회 간의 생산적 균형을 요청한 정책 담론이다. 중도진보적 성향의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진보는 물론 보수에도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둘째, 최장집은 지적 성실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식인이다. 올해로 여든을 맞이한 그는 요즘도 매일 자신의 연구실에 출근하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고려대에서 은퇴한 지 15년이 지났는데도 그가 책 읽기와 글쓰기에 전념하는 모습을 가까이 지켜보노라면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환갑을 넘긴 나의 경험을 돌아볼 때 평생 매일매일 연구에 전념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깊은 사랑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최장집은 그동안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한국 노동운동과 국가’(1988)를 위시해 여러 중후한 저작을 내놓았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연구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책의 부제는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다. 2005년 개정판이 나왔고, 2012년에는 미국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에서 영어판 ‘Democracy after Democratization: The Korean Experience’가 출간됐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네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2002년의 시점에서 최장집은 한국 민주주의가 안락한 보수주의에 빠져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이런 보수적 민주화의 역사적·구조적 기원을 추적하며, 민주화 시대에 관찰할 수 있는 국가의 무능, 시장으로의 전환, 시민사회의 명암을 분석한 다음, 결론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과제를 탐색한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성취한 이론적·실천적 기여는 세 가지다. 첫째, 한국 민주화를 냉전분단국가 형성과 자본주의 산업화 과정 속에 위치시켜 조명한다. 둘째, 허약한 대표성, 정당체제의 미성숙, 지역주의 정치를 한국 정치의 현주소로 진단한다. 셋째, 시민사회 균열을 제대로 반영한 정당정치와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한국 민주주의의 당면 과제로 제시한다.

최장집 민주화론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정당정치의 정상화에 대한 일관된 논리다. 이 논리가 체계적으로 탐구되고 반영된 저작이 바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다. 현대 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다면, 그가 강조하듯 국민 다수의 의사를 정치적으로 대의하고 대표하는 정당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는 말한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는 민주정부를 강하고 능력 있게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가 민주주의적 정치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야 하며, 그 중심적 메커니즘이 정당정치이므로 정당과 정당체제를 바로 세우고 튼튼한 사회적 기반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민주화 시대의 핵심적 문제는 ‘어떤 민주주의’를 이룰 것인지에 있었다. 이 중대한 질문에 최장집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선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위한 실질적 민주주의를 한국 민주주의의 목표로 내세웠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의 확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불평등의 강화를 주목할 때 최장집의 대안은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2012년 대선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가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부상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였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론에 이어 최장집이 내놓은 담론이 ‘진보적 자유주의’다. 그는 자율적 결사체의 강화를 통해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국가 및 시장의 관료화에 맞서는 정당과 정당들 간의 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자유주의’를 강조했다. 이러한 자유주의가 사회경제적 평등을 모색하는 진보적 방향성을 갖는 것이 ‘진보적’ 자유주의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민주적 시장경제론의 21세기 버전이다.

최장집 민주화론에 대한 대표적인 반론은 사회학자 조희연에 의해 제기됐다. 조희연은 최장집이 참여민주주의를 과소평가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조희연에 따르면, 민주화 시대에 우리 사회 민주화를 이끌어온 주요 동력은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이었다.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는 한국 민주화 과정을 특징짓는 현상이었다.

최장집이 물론 운동정치와 참여민주주의의 역할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치학자답게 사회운동보다 정당의 역할을 더 중시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정당정치의 정상화가 더 중요한지, 정당정치와 사회운동의 생산적 공존이 더 중요한지는 정치를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정치학과 사회학의 차이를 반영한다. 정치학의 관점에서 보면 정당에 우선성을 부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견해일 것이다.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의 주요 내용

박세일은 문제적 지식인이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박세일은 보수 담론의 일대 혁신을 모색한 지식인이다. 그 혁신 담론이 선진화론이다. 둘째, 박세일은 학문과 정치를 결합한 대표적인 경세가(經世家)다. 경세가란 ‘뜻을 이룰 상황이면 세상에 나아가 경륜을 펼치지만,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 학문에 전력하는 이’를 지칭한다. 조선시대의 정도전, 이이, 정약용은 경세가의 전형이었다. 박세일의 삶을 지탱한 두 기둥은 지식인의 정체성과 정치인의 정체성이다.

박세일의 출발은 지식인이었다. 서울대에서 법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기회가 주어지면 그는 정치사회로 나갔다. 김영삼 정부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정당 국민생각 대표가 그가 걸어온 궤적이었다. 정치인 박세일에게는 영예와 좌절이 공존했다. 그러나 지식인 박세일이 발표한 선진화론은 우리나라 보수의 국가 비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박세일은 2017년 세상을 떠났다. 지식인 박세일이 남긴 3부작이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창조적 세계화론’(2010), ‘선진 통일 전략’(2013)이다. 이 가운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은 선진화론의 출발점을 이룬다. 선진화론의 핵심 아이디어는 우리 현대사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어 선진화가 새로운 국가목표가 돼야 한다는 데 있다.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은 네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의 변화와 도전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시작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국가의 목표와 이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선진화의 과제와 전략의 탐구를 거쳐, ‘누가 선진화를 이끌 것인가’에 대한 선진화세력 양성론으로 종결된다.

선진화론을 떠받치는 두 중심 개념은 ‘공동체 자유주의’와 ‘선진화 5대 핵심 전략’이다. 공동체 자유주의는 선진화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 철학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자유주의 이념을 뜻한다. 박세일은 연대성과 보완성을 공동체 자유주의의 구성 원리로, 정보 공유와 협치를 운영 원리로 삼는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성찰적 배려와 자율적 책임을 중시하는 공동체 자유주의는 보수의 새로운 정치철학으로서 그 위상을 갖는다.

선진화 5대 핵심 전략은 보수의 새로운 개혁 담론이다. 박세일은 5대 반(反)선진화 사상을 지적한다. 수정주의(신좌파적) 역사관, 결과평등주의, 집단주의(전체주의), 반(反)법치주의,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이 그것이다. 이러한 반선진화 사상에 맞서 그가 제시한 선진화 5대 핵심 전략은 교육과 문화의 선진화(최고 핵심 전략), 시장 능력의 선진화(선진경제), 국가 능력의 선진화(선진정치와 행정), 시민사회의 선진화(선진시민사회), 국제관계의 선진화(선진외교안보)다.

선진화를 통해 박세일이 이룩하려는 나라는 ‘부민덕국(富民德國)의 선진일류국가’다. 부민덕국이란 부자 국민과 소프트파워 강국의 결합을 뜻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진정한 선진국, 진정한 일류국가는 국민 개개인의 정신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가 보장되면서 동시에 소프트파워 면에서 국제적으로 신뢰국가, 모범국가, 매력국가가 되는 것, 즉 덕 있는 나라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적 세계화론’에서 박세일은 선진화의 목표를 ‘창조적 세계화’로 이름 짓고, 이를 위한 10대 발전 전략을 내놓는다. 정신자본 중시, 지구촌과의 통합 확대, 세계화 부문과 비세계화 부문의 병진 발전, 인적 투자 효율 제고와 세계 지식생태계 활용, 성장·분배·환경의 공생적 발전, 고용극대화, 민관협치와 지방주권시대 추진, 자유민주주의 정착, 통일 한반도 시대에 기반한 세계 공헌 국가로의 도약, 현장과 역사를 중시하는 국가전략 수립이 그것이다.

박세일이 마지막으로 주조한 것은 통일 담론이다. ‘선진 통일 전략’에서 그는 ‘선진화 통일론’을 내놓는다. 선진화 통일론은 선진자유·자주공영·민주평화를 대원칙으로 삼는다. 여기서 그는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주변국을 상대로 한 적극적인 통일 외교를 특히 강조한다. 이렇듯 박세일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종합해 대한민국의 새로운 국가전략을 선보였다.

크게 보면 선진화론은 박정희주의에 이어 보수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 자유주의에 기반한 선진화 5대 핵심 전략은 2000년대 초반 위기에 빠진 보수 세력을 구해냈다. 박세일이 제안한 부민덕국은 보수적 ‘부국강병’의 21세기형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선진화론에 대해서는 비판을 제기할 수 있다. 선진화론은 성장과 개방에 무게중심을 둠으로써 분배와 복지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어느 나라든 불평등 해소가 새로운 시대적 과제로 부상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불평등 완화를 위한 정책 추진은 매우 중대한 경제적·사회적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반론이 물론 가능하다. 불평등 해소는 진보의 중심적 의제이지 보수의 중심적 의제라고 보기 어렵다. 박세일이 강조하려는 바는, 보수적 관점에서 창의적·혁신적 성장을 중시하고 개인주의에 공동체주의 가치를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화 시대의 회고

이쯤에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2023년 현재, 우리 사회는 여전히 민주화 시대인가, 선진화 시대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대인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를 넘어 무엇이 새로운 시대정신이 돼야 하는가.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 시대가 열린 것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통해서였다. 민주화 시대라는 말이 그 이전에도 사용됐지만, 광복 이후 우리 사회의 역사적 한 과정으로 자리 잡은 데에는 최장집과 박세일의 기여가 작지 않았다. 최장집은 우리 민주화 과정이 보여준 시대적 성취와 한계를 날카롭게 분석함으로써 민주화 세대에게 지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박세일은 광복 이후 우리 사회변동을 건국·산업화·민주화의 과정으로 정식화함으로써 우리 현대사의 시대 인식을 명료화하는 데 작지 않게 기여했다.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2020년대 현재 이 민주화 시대가 계속 진행되는지다. 이에 대한 답변은 민주화와 민주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먼저 민주주의가 모든 가치를 아우르는 ‘마스터프레임’이라면, 민주주의 시대는 역사적 구속을 뛰어넘는 규범적 목적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민주화가 국가가 추진해야 할 ‘국가 목표’라면, 민주화 시대는 역사적 구속을 받는 현실적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제시한 이는 박세일이다. 박세일은 민주화에 이어 선진화라는 새로운 국가 목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민주화 시대에는 명암이 존재했다. 한편에서 민주화 시대는 대내적으로 민주주의 원리들을 뿌리내리게 하고, 대외적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를 촉발했다는 점에서 모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화 시대에 외환위기가 발생했고, 이후 불평등이 점점 심화하는 역설적 결과가 나타났다. 민주주의란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증진시키는 제도일 터인데, 외환위기 이후 불평등이 심화하고 구조화돼 왔다는 것은 ‘민주화 시대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최장집은 바로 이점에 주목해 사회경제적 민주화라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구현을 우리 민주주의의 중대한 과제로 제시했다.

21세기에 들어와 한국 민주화가 마주한 과제는 ‘민주화의 민주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화의 민주화는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개념화한 ‘민주주의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democracy)’를 응용한 것이다. 기든스가 제시한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세계화 시대에 요구되는 권력의 지방 이양, 국가와 시민사회의 이중 민주화, 공공영역의 쇄신, 행정적 효율성의 증대, 직접민주주의의 강화, 그리고 위험 관리자로서 정부 역할의 제고 등을 포괄한다. 이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서구사회가 세계화와 정보사회의 진전으로 후기현대사회로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기든스가 주조한 개념이다.

민주주의란 본디 국민주권 정신의 기반 위에 서로 다른 견해를 수용하고 토론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제도다. 문제는 다원주의의 빈곤과 정치적 타협의 부재가 2020년대 현재 우리 민주주의가 직면한 현실이고, 이러하기 때문에 새로운 성장과 불평등 완화에 대한 국민적 합의의 모색이라는 과제를 우리 정치가 등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약화된 성장 동력과 심화하는 불평등이 가져오는 경제 양극화, 반(反)다원주의와 반(反)타협주의로 무장한 정치의 양극화라는 ‘이중적 양극화’가 우리 민주주의가 놓인 자리라고 볼 수 있다.

민주화의 민주화가 겨냥하는 목표는 바로 이 이중적 양극화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 대응은 경제 양극화를 완화할 수 있는, 즉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경제·사회정책을 추진하는 것과 정치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즉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생산적인 정당정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오늘날 어느 나라에서든 민주주의에 대해 분명한 사실은 하나다.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정치제도가 부재하다는 게 그것이다.

요컨대 민주화 시대는 국가 목표라는 측면에서 어느덧 시대적 소명을 다해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진술이 물론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화 시대는 저물어가더라도 민주주의는 여전히 우리 사회 최고의 가치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 점에 주목해 나는 최장집과 박세일의 견해를 대립적인 게 아니라 보완적인 것으로 읽고 싶다.

민주화와 선진화는 서로의 존재 조건이자 목표다. 선진화가 담고 있는 것이 성숙한 민주사회라면, 민주화가 겨냥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책임이 공존하는 선진사회다. 선진화 없는 민주화가 사회발전의 정체를 가져올 수 있다면, 민주화 없는 선진화는 성장제일주의로 되돌아갈 수 있다. 민주화론과 선진화론의 성과를 숙고해 새로운 시대정신을 이끌어내는 것은 최장집과 박세일이 후학들에게 남긴 지적 숙제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아서

이쯤에서 지난해 치러진 대통령선거의 시대정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제를 채택한 우리나라에서 대선은 새로운 시대정신의 시험대를 이루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민주당의 전통적 의제인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한반도 평화에 기본소득 등의 기본사회를 새로운 국가 목표로 제시했다. 이에 맞선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대내적으로 정부보다 민간을 우위에 두는 시장경제, 대외적으로는 한미동맹에 기반한 글로벌 중추국가를 국가 목표로 내세웠다. 더해 두 후보 모두 공정사회의 구현을 강조했다.

이러한 국가 목표 의제들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 시대에서 다음의 시대로 이행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한반도 평화가 민주화 시대의 시대정신을 집약한다면 기본소득, 역동적 시장경제, 글로벌 중추국가, 공정사회는 민주화 이후 시대의 사회변동을 반영한다. 전체적으로 지난 대선에서는 민주화 시대가 마감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그렇다고 그다음의 시대정신이 선명하게 제시된 것은 아니었다. 예상컨대 민주화 이후 시대정신은 2027년 대선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제기될 것이다.

민주화 이후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할 역량을 나는 갖고 있지 못하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새로운 시대정신이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숙고하기 위해서는 2020년대 현재 우리 사회의 선 자리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요구된다.

그 성찰의 출발점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구적 사회변동에 대한 인식이다. 구체적으로 경기 하강과 뉴노멀의 시작, 과학기술혁명의 가속화와 플랫폼 비즈니스의 약진, 중국의 부상과 미·중 경제전쟁의 개막, 포퓰리즘의 발흥과 민주주의의 위기, 불평등의 강화와 사회갈등의 증대, 정보사회의 진전과 탈진실 시대의 도래, 기후 위기와 지구민주주의의 요청, 개인주의와 부족주의의 동시 심화, 그리고 바이러스 폭풍과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 인류의 삶과 사회를 뒤흔들어 왔다.

이러한 현상들을 관통하는 세 키워드는 ‘경제적 뉴노멀, 사회적 불안, 글로벌 위험’이다.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변화한 게 뉴노멀이었다면, 이 변화를 겪는 마음의 상태는 불안이었다. 이 와중에 글로벌 위험으로 다가온 팬데믹과 신냉전 질서와 마주했다. 변화의 방향은 이제 예측하기 어렵고, 거기에 속도까지 더해져 우리 인류는 낯설고 두려운 풍경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다.

시대정신이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가치의 집약이다. 우리나라도 어느덧 선진국의 문턱 위에 올라서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뉴노멀, 불안, 위험사회는 우리 사회의 현재가 마주한 가장 중대한 현실이다. 여기에 저출생과 고령화를 우리 사회의 특수한 과제로 더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새로운 시대정신을 모색한다면, 그 시대정신은 뉴노멀, 불안, 위험사회, 그리고 저출생과 고령화에 대한 적극적 대처를 포괄하고 있어야 한다.


두 지식인이 품었던 소망

이점에서 나는 민주화 이후 시대정신이 품어야 두 문제의식이 ‘새로운 회복’과 ‘민주적 혁신’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새로운 회복이 일차적으로 겨냥해야 할 것은 불안과 분노를 해소할 포용적 성장 및 불평등 완화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갈등을 증대시켜 온 것을 주목해 불평등에 대처하는 데서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된다. 한편 민주적 혁신도 중요하다. 오늘날 인공지능과 플랫폼의 시대가 만개하는 만큼 과학기술혁명에 내재한 승자독식을 완화할 민주적 혁신이 요구된다. 더해 포퓰리즘과 탈진실 시대에 맞서서 다원적 공론장 및 시민사회의 민주적 활력을 북돋아야 한다.

시대정신은 어느 한 집단의 소유물이 아니다. 정치인과 국민, 그리고 지식인이 함께 토론하면서 발견해 가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국민 모두 골고루 누릴 수 있는 선진화된 국가를 만들어가는 것은 최장집과 박세일이 품었던 소망이자 민주화 시대 이후 우리 사회에 부여된 역사적 과제일 것이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새로운 시대정신! 새로운 회복과 민주적 혁신이라는 문제의식을 적극 담아낼 수 있는 민주화 이후 시대정신에 대한 활기차고 진지한 토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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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5 [문화일보] “포퓰리즘이 망친 한국 사회… ‘국가가 도와주겠지’ 기대, 자조의식 쇠퇴” 23-11-23
2094 [여성경제신문] ‘페널티가 된 내 새끼’ 저출산 블랙홀 韓···“100조 쏟아부어도 해결.. 23-11-22
2093 [일요신문] 한반도선진화재단, ‘조화로운 양성평등 운동 보수가 이끌자’ 정책세미나.. 23-11-07
2092 [뉴시스] "사교육 카르텔, 대학교수도 문제…버젓이 업체 임원으로" 23-10-11
2091 [스타이데일리] ‘국민이 주인되는 국회의원 공천시스템 개혁’ 대토론회 성료 23-10-11
2090 [신동아] “낮은 경제교육 수준이 물질만능주의 사회 원인” 23-10-10
2089 [한국일보] "기업인에 평가 박한 국내 교과서…이병철·정주영 다뤄야" 2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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