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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un Brief 통권405호
1. 특수의지(特殊意志)가 법(法)을 대신할 수 없다
2. 사법부의 무력화 - 법률로 헌법을 고치다
3. 형사사법의 해체와 자기면책의 문제
4. 민주적 공론장의 파괴 - 언론 관련 입법
5. 다수결과 입헌주의 그리고 특수의지
1. 들어가며 - 특수의지(特殊意志)가 법(法)을 대신할 수 없다
법치주의(法治主義)의 요체는 법이 ‘일반적(一般的)’이라는 데 있다. 법은 특정인을 겨냥하거나 특정인을 위하여 만들어져서는 안 되며, 사전에 정립된 일반적·추상적 규범으로서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루소 이래의 정치철학이 일반의지(volont? g?n?rale)와 특수의지(volont? particuli?re)를 구별해 온 까닭이 여기에 있다. 특정인의 이익이라는 특수의지가 법의 형식을 빌려 그것을 압도하거나 대신하는 순간 법치(法治)는 형해화된다. 헌법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제11조 제1항)라고 선언한 것은, 다수결로도 넘을 수 없는 이 법의 일반성을 확인한 것이다. 헌법학이 특정 사건·특정인을 개별적·구체적으로 규율하는 이른바 ‘처분적 법률(Einzelfallgesetz)’을 경계해 온 것도 같은 이유다. 그것은 규범의 외피를 두른 처분이자, 법으로 위장한 특수의지이기 때문이다.
특수의지가 법을 대신할 수 없다는 명제는 단순한 형평의 요구가 아니라 법 개념 그 자체에 관한 문제다.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는 그 발원(누가 정하는가)에서만이 아니라 그 대상(누구에게 적용되는가)에서도 일반적이어야 한다. 특정인을 겨냥한 규율은 설령 의회 다수결을 거쳤더라도 이미 법률이 아니라 의지의 행사이며, ‘다수결을 거쳤다’는 논거가 그 실질적 흠결을 치유하지는 못한다. 나아가 법의 일반성은 입법자 자신에 대한 자기구속(自己拘束)의 장치이기도 하다. 자신이 세운 규범이 장차 누구에게 미칠지 알 수 없기에 입법자 스스로도 그 규범 아래 놓이지만, 규율의 표적이 처음부터 특정 되어있는 순간 이 상호성은 무너지고 입법자는 자신을 규범 밖에 둔 채 타인만을 겨냥하게 된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법에 의한 지배(rule of law)가 아니라 사람에 의한 지배(rule of men)이며, 법치는 그 이름만 남긴 채 실질을 잃게 된다.
이 글의 논지는 하나다. 최근 거대 여당이 주도한 일련의 입법과 정치 행태가, 법의 일반성을 훼손하고 특수의지를 법의 형식으로 관철하는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수법은 노골적인 헌법 파괴가 아니라 합법의 외양을 갖춘 파괴, 곧 독재적 합법주의(autocratic legalism)에 가깝다. 사법·검찰·언론이라는 견제 장치를 차례로 무력화하면서 그 하나하나를 ‘개혁’과 ‘입법’이라는 명분과 형식에 담아 처리하는 방식이다. 필자는 2024년 12월 계엄 선포 이후 이어진 탄핵·파면과 권력 재편의 과정을 넓게 보아 ‘의회의 연성(軟性) 쿠데타’로 평가해 왔고, 그 귀결로 등장한 현 여당의 입법 독재를 그 연장선에서 읽는다. 핵심은 정권 교체 이후 여당이 사법부·검찰·언론을 겨냥해 전개하는 입법의 내용과 의도가 헌법원리와 충돌한다는 데 있다.
2. 사법부의 무력화 - 법률로 헌법을 고치다
1) 재판소원 - 헌법사항을 법률로 처리하다
위헌(違憲)의 지점은 재판소원 제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법률로 도입했다는 방식에 있다. 재판소원(裁判訴願)의 도입은 대법원의 판결을 헌법재판소가 다시 심리하여 그 판결을 취소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이것은 헌법재판소를 대법원의 상위기관으로 올려 ‘최고법원’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행 헌법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관계를 병렬적 지위로 놓고 있을 뿐이다. 헌법 제101조 제2항은 대법원을 ‘최고법원’으로 세우고, 제107조는 법률의 위헌 판단을 헌법재판소에, 명령·규칙·처분의 위헌·위법 판단을 대법원에 나누며, 제111조는 헌재의 관장 사항을 다섯으로 한정 열거한다. 두 기관 사이의 권한 경계를 설정하는 일은 헌법사항이지 법률사항이 아니다. 헌재 스스로도 96헌마172 등 결정(1997년)에서 법원의 재판을 헌법소원 대상에서 제외한 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1항을 원칙적으로 합헌으로 받아들이고, 단지 헌재가 위헌으로 결정한 법률을 적용해 기본권을 침해한 재판에 한해서 예외적으로 재판소원을 인정했으며, 이 구도를 2026년 3월까지 기본적으로 유지해 왔다. 이 일관된 자기구속은 그 경계가 입법자가 손쉽게 옮길 정책선이 아니라 헌법 차원의 좌표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모든 확정판결을 대상으로 삼는 전면적 재판소원은 이 제한적 예외와 질적으로 다른, 사법권의 권한 배분 구조 자체의 변경이며, 그것을 바꾸려면 헌법 제130조의 헌법개정 절차로 가야 한다. 법률로 이를 처리한 것은 헌법개정 절차의 잠탈이다.
일부에서는 헌법 제111조 제1항 제5호가 “법률이 정하는 헌법소원”이라고 규정하므로 그 외연은 입법형성권의 몫이라는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 문언이 맡긴 것은 헌법소원의 종류와 요건을 형성하는 일이지, 대법원의 재판을 헌재의 심사 아래 두어 두 사법기관 사이에 새로운 심급관계를 창설하는 권한이 아니다. 앞의 것은 헌재의 내부 설계이지만, 뒤의 것은 제101조 제2항이 대법원을 최고법원으로 세운 헌법의 결단에 관한 문제이다.
2) 대법관 증원 - 최고법원성(最高法院性)의 파괴
개정 법원조직법은 대법관을 14명에서 26명으로 늘린다(2028년부터 매년 4명씩 3년에 걸쳐 단계 증원). 대법원의 ‘최고법원’이라는 지위는 단순한 심급 상의 정점이 아니라 법령 해석의 통일과 법 발전의 선도라는 본질적 기능을 담보하며, 이 기능은 대법관 전원이 참여해 토론하는 단일의 전원합의체(one bench)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미국(9명)·캐나다(9명)·영국(12명)·일본(15명) 등 주요국 최고법원들이 소수 정예의 단일 재판부를 유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6명 체제에서는 단일 전원합의체 운영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져, 대법원은 최고법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여당은 ‘재판 지연 해소’와 ‘구성의 다양화’를 명분으로 들고 독일 연방보통법원(BGH)의 법관 수가 많다는 비교를 제시하나, 독일의 연방보통법원은 헌법상 단일 최고법원이 아니므로 이 비교는 성립하지 않는다. 재판 지연의 본질적 해법은 대법원 규모 확대가 아니라 하급심의 확충 및 재판의 충실성이며, 대법관 증원은 오히려 하급심 부실화와 재정 부담이라는 ‘풍선효과’를 낳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속도와 장악 의도이다. 개정법대로면 현직 대통령은 임기 중 증원분 12명 전원과 정년으로 교체되는 기존 대법관의 후임까지 합쳐 총 22명을 임명하게 되는데, 한 정부가 대법관 26명 중 22명을 임명하는 것은 1949년 법원조직법 제정 이후 76년간 단 한 번도 없던 일이다. 1937년 미국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법관 증원안(코트 패킹)이 상원 사법위원회의 “일찍이 시도된 바 없는 사법권 침해”라는 반대로 부결된 전례가 상기되는 대목이다.
3) 법왜곡죄 - 법관 압박의 통로
법왜곡죄(형법 제123조의2)는 법관·검사 등이 당사자에게 유리·불리하게 법을 왜곡하면 최대 10년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며, 즉시 시행되었다. 독일의 입법례가 있고 사법책임성 강화가 필요하다는 반론이 있으나, 우리 형법에는 이미 직권남용죄(제123조)·직무유기죄가 있어 별도 신설의 정당성이 약하다. 무엇보다 ‘독일에도 있다’는 주장은 같이 비교할 바가 못된다. 독일 형법 제339조(Rechtsbeugung)는 판례가 그 성립을 법관이 의식적·중대하게 법에서 이탈해 자신의 독자적 기준으로 재판한 ‘중대한 법 위반’으로 극도로 축소하고, 재판을 통해 저질러진 다른 범죄는 법왜곡죄가 함께 성립할 때에만 처벌하는 이른바 차단효(법관 특권)로 처벌의 문턱을 이중으로 높여 사법 독립을 보호한다. 우리 신설 조문은 이러한 축소해석·차단효라는 안전장치 없이 ‘법의 왜곡’이라는 넓은 외형만을 이식했다. 더욱이 독일에서도 ‘법의 왜곡’이라는 개념의 불명확성(명확성 원칙)과 그것이 법관 길들이기의 수단이 될 위험(사법독립과의 긴장)을 둘러싼 위헌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조문이 존속해 온 것은 오직 그 극단적 축소해석 덕분이다. 그러한 제어장치가 결여된 채 판결에 대한 불만이 형사고발로 전환되는 통로만 열린다면, 헌법이 보장한 법관의 독립(제103조)은 심각하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3. 형사사법의 해체와 자기면책의 문제
2025년 9월 26일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검찰청 폐지가 확정되었고, 2026년 3월 공소청법·중대범죄수사청법이 통과되어 2026년 10월 2일 검찰청은 사라진다. 기소는 법무부 소속 공소청이, 수사는 행정안전부 소속 중수청이 나누어 맡는다. 여기에 조작기소 의혹 특검과 공소취소 문제가 겹친다. 여당은 특검에 공소취소 권한을 부여하는 방안을 추진해 왔고, 대통령은 취임 1주년 회견(2026년 6월 8일)에서 최종 판단을 국회에 맡기겠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수사·기소 분리는 검찰의 비대한 권한을 분산한다는 세계적 흐름에 부합한다는 것이 여당의 논거다. 그러나 검찰청 폐지는 헌법이 전제하고 있는 검사(檢事) 제도 자체와 충돌할 소지가 있다. 우리 헌법은 이례적으로 특정 국가기관인 ‘검사’를 명시한다. 제12조 제3항과 제16조는 체포·구속·압수·수색과 같은 강제처분을 할 때 반드시 ‘검사의 신청’에 따라 법관이 발부한 영장에 의하도록 정하는데, 이는 영장청구권을 검사에게 독점적으로 맡긴 것이다. 헌법이 이처럼 특정 기관의 권한을 직접 규정했다는 것은, 검사 제도가 입법자가 임의로 없앨 수 있는 법률상의 기구가 아니라 헌법이 스스로 예정한 제도임을 뜻한다. 그런데 검찰청을 폐지하고 수사(중수청)와 기소(공소청)를 별개의 기관으로 갈라 놓으면, 헌법이 상정한 ‘검사’가 어디에 남으며 수사를 담당하는 기관이 영장청구권을 어떻게 행사하는지가 불분명해진다. 강제수사의 주체와 영장 신청권자가 분리되어 수사 공백과 혼선이 생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헌법이 그 골격을 정해 둔 제도를 법률만으로 해체한다는 점에서 이것 역시 앞서 본 ‘법률로 헌법을 고치는’ 격이다. 더 나아가 근본적인 것은 이해충돌이다. 공소의 제기·취소는 검사의 권한이며(형사소송법 제246조 국가소추주의, 제255조 공소취소), 대통령 자신이 피고인인 사건의 공소를 그가 임명하는 특검이 취소하도록 설계하는 것은 “누구도 자기 사건의 심판자가 될 수 없다”(nemo judex in causa sua)는 법의 근본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일반 국민에게 허용되지 않는 방식의 사건 소멸이 특정 권력자에게만 작동한다면, 이는 특수의지 관철의 가장 노골적인 형태이다.
4. 민주적 공론장의 파괴 - 언론 관련 입법
현재 여당이 추진한 언론 관련 입법은 개별로 흩어져 있으나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된다.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장악, 뉴미디어에 대한 통제 확대, 그리고 비판 언론에 대한 징벌적 입막음이다.
개정 정보통신망법(법률 제21305호, 2026년 7월 7일 시행)은 ‘허위조작정보’를 신설하고 ‘법익을 침해하는 정보’라는 포괄적 개념과 ‘증오 선동 정보’라는 새 범주를 도입하며, 고의 유통에 손해액의 최대 5배에 이르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부과한다.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 어떤 법익을 어떻게 침해했을 때 규제 대상인지 예측할 수 없어 명확성 원칙에 위배될 소지가 크다. 헌법재판소는 2010년에 이미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한 자”를 처벌하던 구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제1항을, ‘공익’이라는 개념의 불명확성을 이유로 명확성 원칙 위반으로 위헌 선언한 바 있다(2008헌바157등, 소위 ‘미네르바’ 사건). 그나마 ‘공익을 해할 목적’이라는 한정 요소가 있었음에도 위헌이었다면, 그보다 모호한 개념을 동원한 개정법의 위헌 소지는 한층 무겁다. 둘째, 징벌적 손해배상은 형식은 민사책임이나 실질은 언론과 플랫폼에 막대한 타격을 가하는 위축효과(chilling effect)를 노린 사후검열로 기능한다. 미 국무부는 법 통과 직후인 2025년 12월 31일 이례적으로 “심각한 우려(significant concern)”를 표명했다.
방송3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 2025년 개정·시행)과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신설은 공영·민영방송의 이사회·사장 선임과 편성권 체계를 역전시키고, 기존 규제기관 위원의 임기를 강제 종료시켰다. 헌법재판소는 방송편성의 자유가 방송의 자유의 핵심이며, 그 간섭은 “국가권력은 물론 다양한 사회세력”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음을 재판관 전원일치로 확인한 바 있다(헌재 2021. 8. 31. 2019헌바439). 지배구조를 법률로 재편해 편성권의 실질적 주체를 교체하는 것은 이 헌재 결정이 경고한 ‘방송 장악’의 전형에 해당한다.
여당은 가짜뉴스의 피해 구제와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명분으로 든다. 그러나 금지되어야 할 표현은 그 ‘내용’이 아니라 ‘불법행위 유발의 위험성’을 기준으로 가려야 하며, 민주적 토론의 자정 기능을 신뢰하고 법적 규제는 최소화하는 것이 입헌주의와 언론자유의 정신이다. 독립성을 명분으로 내세운 입법이 오히려 특정 세력의 영구적 장악 구조를 제도화한다면, 그것은 개혁이 아니라 개혁의 언어를 앞세운 장악이다. 명분과 정반대의 결과를 제도로 못 박는 순간, 그 독립이라는 명분은 위장이었음이 드러난다.
5. 종합 평가 - 다수결과 입헌주의 그리고 특수의지
이상의 입법들은 저마다 ‘개혁’의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를 관통하는 공통의 위험은, 다수결의 산물이라는 이유만으로 헌법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사고다. 입헌민주주의에서 다수는 만능이 아니다. 권력분립(헌법 제101조), 사법권의 독립(제103조), 표현의 자유(제21조)는 다수가 침해할 수 없도록 헌법이 설정한 방벽이며, 이를 다수결로 허무는 것은 민주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그 자기부정이다. 합법의 형식을 갖추었다는 사실이 이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형식적 합법성 뒤에서 실질적 법치를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독재적 합법주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특히 문제는 일반성의 결여다. 사법부 재편, 검찰 해체, 공소취소, 표현 규제가 하필 특정 정치인의 사법 리스크가 첨예한 국면에서 그 리스크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된다면, 그것은 형식만 법률일 뿐 실질은 처분이며 특수의지의 관철이다. 특수의지가 법을 압도하거나 대신해서는 안 된다 - 이 명제야말로 지금의 정치가 배반하고 있는 법치주의의 최소 조건이다.
법치주의는 정권의 편의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정권을 구속하는 헌법의 명령이다. 다수 의석은 그 명령을 해제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입법의 속도가 아니라, 헌법이 설정한 한계에 대한 자기 억제다. 견제받지 않는 다수와 특수의지의 결합이 법의 외피를 두를 때, 민주주의는 형식을 유지한 채 그 실질을 잃게 된다. 그 퇴행을 막는 마지막 방어선은 제도적 견제의 회복과, 그것을 요구하는 시민적 각성이다.
※ 본고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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