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nsun Brief 통권375호
지난달 25일 한미정상의 첫 회동이 전례 없이 ‘양자회의(Bilateral Meeting)’로 격하되고, GDP대비 일본보다 많은 대미투자를 약속하고도 아직 합의서 한 장 받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4일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에서 300명의 한국인 근로자가 비자 문제로 체포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많은 국민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있지만, 사실 미국은 지난 탄핵 정국에 여러 차례 한국에게 자유진영, 동맹국으로서 합당한 처신을 하도록 시그널을 보내왔다. 일례로, 올해 3월 미국 에너지부는 대한민국을 ‘민감국가’ 명단에 올렸고, 4월 한국에 있던 패트리엇과 사드 1기를 중동으로 반출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 외에도 주한미군을 감축할 수 있다는 경고는 미국 조야에서 수차례 나왔다. 이러한 시그널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정부와 보수 진영은 자중지란으로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식을 앞당긴 것으로 화답한 셈이 됐다.
한미관계를 회복하고,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미국의 입장에 서 볼 필요가 있다. 최근 미국의 일련의 행보는 패권국 지위를 강화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인식키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강대국을 이해하는 길잡이로 1987년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만한 책이 없을 것이다. 요약하면 150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등장한 강대국들은 공통적으로 무리하게 국방비를 쓰고, 자국의 경제력을 과신하다 쇠락했다는 것이다. 최근 트럼프 2기 정부가 우방에게 관세인상과 대미 투자를 독촉하고, 유럽 우방들에게 GDP의 5%를 국방비로 쓰라고 압박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트럼프 정부가 자유진영 내 결속과 기강을 바로잡는 목적은 두말할 나위 없이 중국을 미국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다. 우선 대미 수출로 세를 키워 미국에 도전해 온 ‘괘씸한’ 중국에 대해서는 1차 관세로 발을 묶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초 중국을 상대로 145% 관세를 예고해 간담을 서늘케 한 뒤 4월 30%로 줄여줌으로써 관세를 올리고도 중국에 감사 인사를 받는 특유의 협상전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어 지난 6월 최첨단 B2 폭격기를 동원한 ‘한밤의 망치’ 작전 역시 표면적으로는 이란의 핵시설 제거가 목표였지만 원유 저장고도 함께 파괴함으로써 중국의 에너지 수급에 막대한 차질을 줬다. 중국은 이란산 원유의 90% 이상을 구매하는 최대 고객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 원유를 수입하는 나라에 100% 이상의 2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한 것 역시 중국의 에너지 확보를 차단하려는 큰 그림을 본 것으로 풀이된다. 러시아는 2020년 석유 수출의 51%가 유럽을 향했지만, 2025년 상반기 11%로 줄어들었고, 현재 중국이 최대 수입국으로 지목된다.
미국의 일련의 행보를 볼 때, 당분간 친중·반미 노선의 국가는 그에 해당하는 경제적, 정치적 응징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에서 이재명-트럼프 회담 중 있었던 뒷얘기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겠지만, 현재 드러난 한미관계의 경색국면은 결국 우리가 자유진영의 일원으로 합당한 처신을 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며, 이를 바로잡는 것이 한미관계 회복의 첩경이 될 것이다. 우선 현재 한미간 불협의 원인이 돈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3500억달러는 지난해 한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20.4%에 해당한다. 에너지 구매를 포함하면 25%이며 이는 기업 차원의 대미 투자는 뺀 수치다. 7월 합의 기준 일본의 대미 투자 규모는 GDP 대비 13.1%이며 EU의 6.9%에 비하면 우리가 3배나 큰 출혈을 약속한 셈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잘못된 외교노선에 있다는 가설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이번 한미회담 일주일 전인 8월 18일 트럼프 정부 실세들이 모여있는 아메리카퍼스트 정책연구소의 칼라 샌즈 수석연구원은 한 매체에 “이재명 정부는 미중 모두를 포섭할 수 있다고 믿지만 그만한 외교력이 없다”고 기고했다. 전 덴마크 대사로 그린란드 이권을 놓고 교섭에 앞장섰던 미국의 유력인사가 사실상 친중하면 트럼프 대통령에게 된서리를 맞을 것이라 훈수를 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양자회담 하루 전 워싱턴DC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에서 ‘안미경중’ 노선의 포기를 선언했고, 트럼프 대통령의 면전에서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도 매듭지었다고 했지만 미국을 말로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현재 미국은 이재명 정부의 말이 아닌 ‘행동’을 주목하고 있다. 우선 북한을 주적이라 말하기를 주저하는 인사를 국정원장으로 임명한 것이 미국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는 향후 한미간 정보공유에 큰 차질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된다. 앞서 문재인 정부 역시 1985년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 배후인물로 지목돼 2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았던 인사를 국정원 기조실장에 기용해 논란이 일었다. 최근 통일부가 2018년부터 매년 발간해 온 북한인권보고서를 비공개하기로 한 것도 자유 우방으로서 신뢰를 잃을 수 있는 처사였다. 과거 서독은 분단 기간 기록보존소를 운영, 동독의 만행을 빠짐없이 수집, 기록했다. 동독 경비병들이 1989년 11월 여행허가 소식에 서베를린으로 가겠다고 몰려나온 동독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못한 것은 기록보존소에 이름이 올라가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이 첫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을 흡수통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의도와 관계없이 미국과 우방들의 우려를 샀을 것으로 본다. 이는 최근 100년 사이 분단과 통일 경험한 베트남, 독일, 예멘이 모두 흡수통일이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며, 북한의 잘못된 폭정체제를 인정하겠다는 메시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북한 인민들에게 자유와 인권을 전해온 대북 풍선과 국정원의 대북 방송을 전면 중단한 것, 대북 확성기를 먼저 철거한 것을 국제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고민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한미 회담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미숙한 외교도 미국의 신뢰를 잃는데 한몫을 했다. 지난 7월 11일,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전작권 환수 논의가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후 13일 위성락 실장은 그런 논의는 없으며, 핵 재처리나 미사일 사거리 연장 문제도 관세협상의 안건이 아니라고 일축했다. 이를 두고 전작권 환수를 일종의 협상카드로 써서 미국의 양보를 받아내려다 거센 항의를 받은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이 외에도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의 나토 초청을 거절하고, 중국의 전승 기념행사 초대에 즉각 불가 입장을 표하지 않은 것도 큰 외교적 실책으로 지목된다.
많은 전문가들이 방송과 신문지상에서 한국을 우대하지 않는 트럼프 정부를 이단아로 취급하고, 그런 미국을 비정상이라 진단한다. 그러나 일방적 수혜를 당연시해왔던 기존 한미관계가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이라는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 오히려 이번 관세 협상을 계기로 한미 관계가 지속가능한 상호호혜, 쌍무적 계약관계로 진화할 수도 있다. 이를 위해 현 여권이 먼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운동권식 정치를 청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수순일 것이다.
위기는 항상 기회와 함께 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이번 2기 트럼프 정부와 적극 협력해 이란과 시리아를 제압하고 국가안보의 초석을 다진 이스라엘, 관세 소나기 속에 US스틸을 인수해 새로운 먹거리를 찾은 일본의 대미 외교를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 본고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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