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nsun Brief 통권374호
1. 혁신을 회피하는 유럽
2. 유럽보다 더 심한 한국
3. 혁신의 토양이 무너진 결과
4. AI 혁명에 대응한 한국의 규제개혁 과제
한국 경제가 저성장 고착화를 넘어 역성장 국면에 들어설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이런 가운데 미국 주도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AI 혁명은 산업 지형의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지난 20년간 한국의 역할 모델은 안정을 추구하는 유럽이었다. IMF 외환위기가 남긴 충격은 높은 사회 안전망과 분배를 강조하는 유럽식 모델을 새로운 이상향으로 만들었다. 성장 중심의 미국식 모델을 비판한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2004년)’은 당시 좌파 정부의 나침반이 되었다. 대량 해고의 트라우마가 짙었던 사회 분위기 탓에, 뒤이은 우파 정부마저 이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작 동경했던 유럽은 심각한 성장 저하의 늪에 빠져 있다. 따라서 유럽의 현실을 냉철히 진단하고, 이를 통해 한국이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
1. 혁신을 회피하는 유럽
2023년 7월 유럽 국제정치경제센터(ECIPE)가 내놓은 보고서는 충격적이다. 만약 유럽이 미국의 한 주(州)라면 독일과 프랑스의 GDP는 각각 미국 내 39위, 49위 수준에 불과하다. 2008년 이후 미국의 성장 속도는 가팔라진 반면, 유럽의 성장은 정체 상태다. IMF는 2028년이면 양측의 GDP 격차가 50% 이상 벌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시가총액 기준 세계 30대 기업 중 유럽 기업은 단 한 곳뿐이다.
2024년 9월,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는 ‘유럽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에서 그 원인을 세 가지로 진단했다. 미국·중국에 비해 뒤처진 산업 혁신, 높은 에너지 비용, 그리고 지정학적 위험이다. 보고서는 유럽의 현실을 정확히 지적했다. 하지만 실제 해결로 이어지리라는 기대는 크지 않다. 회원국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고 EU의 의사결정 구조가 지나치게 복잡하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혁신에 적대적인 제도와 문화다. 전통 산업과 안정적인 직업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는 소프트웨어 산업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개인, 생명과 같은 가치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인공지능이나 첨단 생명공학 기술 발전에 스스로 족쇄를 채웠다. 결국 생산성 높은 신산업 대신 혁신이 멈춘 전통 산업에 의존하는 구조적 문제가 고착되었다.
과도한 규제 역시 혁신의 발목을 잡는다. 특히 중소기업일수록 부담이 크다. 유럽의 디지털 시장법(DMA)은 규제가 낳은 역효과의 대표적 사례다. 미국 빅테크를 견제하려다 유럽 소비자의 서비스 선택권을 제한하고, 자국 소프트웨어 기업에는 더 큰 규제 부담을 안겨 격차를 더욱 벌리는 결과를 낳았다. 독일의 느린 행정, 프랑스의 높은 공공 비중으로 대표되는 강한 관료주의와 경직된 노동 구조 또한 생산성 향상의 걸림돌이다. 이는 팬데믹 이후 빠른 회복 과정에서 생산성을 급격히 끌어올린 미국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혁신 기피 성향은 ‘인더스트리 5.0’ 개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EU의 혁신 담당 부처가 “혁신의 주인공은 로봇이 아닌 사람”이라고 선언할 정도다. 이러한 사고의 깊은 뿌리에는 1986년 발간된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가 있다. 이 책은 기술 발전과 금융 자본, 환경 파괴, 정보 사회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이후 유럽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적 틀을 제공했다.
혁신을 회피한 결과는 냉혹하다. 2025년 5월 EU 집행위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스케일 업(scale-up, 고성장 기업)’중 유럽 기업은 8%에 불과하다. 유럽에서 탄생한 유니콘 기업의 30%는 해외로 떠났고, 유럽 스타트업 M&A의 60% 이상은 비 EU 기업이 주도한다. 구글 AI의 핵심인 딥마인드가 영국에서 탄생해 미국 기업에 인수된 것이 상징적인 사례다.
유럽 혁신 부재의 원인은 사람이 아니라 제도와 문화다. AI 혁명을 촉발한 딥러닝의 대가 제프리 힌튼 등 3명의 학자는 모두 영국과 프랑스 출신이다. 하지만 이들은 캐나다와 미국에서 연구의 꽃을 피웠다. 코로나 백신을 선도한 모더나의 CEO 역시 프랑스인이었지만, 정작 프랑스는 백신 개발에 실패했다. 유럽의 인재가 만든 혁신의 과실을 미국이 거두는 역설이 현실이 되었다.
2. 유럽보다 더 심한 한국
한국은 R&D 투자나 창업 활동 면에서 유럽보다 활발했지만, 경제 성장을 이끌 혁신적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기존 산업마저 외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리는 상황이다. 그 배경에는 ‘유러피안 드림’을 좇아 무분별하게 도입하고 강화한 규제가 있다.
유럽을 따라 탈원전과 개인정보보호 강화를 추진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과정에서 정작 프랑스의 원전 비중이 한국의 두 배가 넘는다는 현실을 외면했다. 또한 소프트웨어 산업이 취약한 유럽의 개인정보 규제가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한국의 산업에 그대로 적용하면서 성장의 발목을 잡았다. 유럽을 모방했지만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 규제의 부작용만 커졌다. 더 큰 문제는 유럽 기업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만의 ‘갈라파고스’ 규제들이다.
첫째, 예방보다 처벌에만 집중하는 ‘중대재해처벌법’이다. 선진국처럼 산업안전보건법으로 현장을 관리함에도,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경영자에게 징역형 하한선을 둔 처벌법을 추가했다. 이는 ‘OINK(Only In Korea) 리스크’라는 신조어를 낳으며, 한국만의 독특한 경영 위험으로 자리 잡았다. 법의 실효성은 불투명한 채 중소기업의 피해만 키운다는 비판이 거세다.
둘째, 투명성과 국제 기준을 외면한 ‘화학물질 안전 규제’다. 한국이 벤치마킹한 유럽의 REACH 제도조차 현지에서는 과도한 부담으로 지목된다. 더 큰 문제는 불투명성과 중복 규제다. 주한 유럽상의 등은 꾸준히 규제의 불확실성을 지적하고 있으며, 노출량이 아닌 독성만으로 유해 물질을 지정하는 등 국제 기준에도 맞지 않는다. 아리셀 공장 화재 당시 고용부(산업안전보건법)가 아니라 환경부(화학물질관리법)의 법 적용 논란이 발생하는 것이 이 규제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셋째, 기업의 예측 가능성을 무너뜨리는 ‘노란 봉투법’이다. 노동계는 유럽의 ILO 지침 준수 요구 등을 근거로 법 개정을 주장했지만, 정작 주한 유럽상의는 '기업 철수'까지를 거론하며 강하게 반발한다. 하청 근로자가 원청 사업주에게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기업의 교섭 상대를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어 노사 관계의 근간을 흔든다.
넷째, 세계 유일의 ‘이중 규제’인 ‘신 의료기술평가 제도’다. 식약처의 의료기기 승인 후, 복지부의 의료 기술 승인을 또 받아야 하는 이중 규제는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로 작용한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도입한 ‘혁신의료기술’제도는 오히려 시장을 왜곡하고 있다. 검증이 덜 된 기술이 ‘혁신’이라는 미명으로 마케팅에 유리해지자, 기업들이 정식 ‘신의료기술’ 등재를 기피하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다섯째, 모든 것을 윤리의 잣대로만 재단하는 ‘생명윤리법’이다. 미국, 독일 등은 일반적 연구 심의와 배아줄기세포 같은 중대 사안을 분리하지만, 한국은 모든 연구를 생명윤리라는 단일 잣대로 평가한다. 그 결과, 유전자 검사 서비스 활성화를 두고 주무 부처 간 엇박자가 나고, 소비자가 원해도 기업은 데이터를 활용하지 못하는 등 산업 발전이 가로막혀 있다.
3. 혁신의 토양이 무너진 결과
앞서 살펴본 다섯 가지 사례는 개별 규제의 문제를 넘어, 한국의 규제 환경이 가진 근본적인 위험성을 보여준다. 제도와 문화가 다른 유럽의 규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한국식 접근을 추가했다. 그 결과 누구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규제를 만들었다. 이러한 토양에서는 아무리 AI(인공지능)와 같은 신기술의 씨앗을 뿌려도 제대로 싹을 틔우기 어렵다. 결국 생존과 성장을 갈망하는 기업과 인재는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한국의 기업과 인재 유출은 유럽만큼, 혹은 그보다 더 심각하다. 스타트 업이 규제와 투자 유치의 어려움으로 본사를 해외로 옮기는 ‘플립(Flip)’현상은 10년 만에 6배로 증가했다. 이공계 인재의 해외 유출 역시 10년 넘게 연 3만 명대를 유지하고 있다. 학령 인구 감소를 감안하면 유출은 더 늘었다고 봐야 한다. 2024년 AI 인재 순유출 순위에서 한국은 전쟁 중인 이스라엘 다음으로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AI 인재들이 떠나는 근본 원인은 국내에 경쟁력 있는 AI 기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AI 혁명은 이제 대학이 아닌 구글과 같은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젊은 인재들은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미국의 혁신 현장으로 떠난다.
이러한 위기는 변화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더욱 증폭된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35년간 이어진 평화와 자유무역의 시대는 저물고,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속에서 미국 주도의 양자 무역협정 시대가 도래했다. 이 새로운 시대의 핵심 경쟁력은 거대한 내수 시장이지만, 한국의 내수 시장은 작다. 통화가치 또한 기축통화인 유로에 비해 불안정하다. 지난 35년간 유로화는 그 가치를 유지했지만, 원화 가치는 절반 수준으로 하락했다.
4. AI 혁명에 대응한 한국의 규제개혁 과제
향후 35년을 결정할 상수는 AI 혁명이며, 한국 AI 혁명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 분야는 제조업이다. 최근 한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중국에 밀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미국 주도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기존의 로봇 자동화를 넘어 AI를 모든 공정에 도입하는 전면적인 혁신이 필요하다. 다행히 한국은 전통적으로 제조업 경쟁력이 높고, 노동자 1만 명당 산업용 로봇 수가 8년째 세계 1위를 기록할 정도의 자동화 수준이라는 강력한 기반을 갖추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약 700만 명에 달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대규모 은퇴는 중요한 변수다. 생산가능인구 감소 상황에서 이들의 빈자리를 AI 로봇으로 대체하는 것은 산업 구조를 혁신할 결정적인 기회다. 일각의 우려와 달리 AI 전환은 숙련 세대의 노하우를 상실시키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경험과 지식을 ‘암묵지’의 형태로 AI 시스템에 체계적으로 학습시켜 영구적인 시스템 자산으로 보존하는 과정이다. 만약 사회적 저항으로 이 기회를 놓친다면, 한국 제조업은 혁신의 동력을 잃고 청년 세대는 양질의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진다.
AI 혁명의 파급력은 바이오 분야에서 더욱 폭발적인 잠재력을 보여준다. 2024년 노벨 화학상은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AI ‘알파폴드’를 개발한 구글팀에 돌아갔다. 여기서 더 나아가 구글 딥마인드는 DNA의 비밀을 푸는 ‘알파게놈’을 개발하며 본격적인 유전자 탐구 시대를 열고 있다. 하지만 유전자 기술에 대한 국가별 대응은 큰 차이를 보인다. 유전자 가위 기술로 외래 유전자 주입 없이 품종 개량이 가능한 유전자 편집 식품의 경우, 미국과 일본은 상용화에 적극적인 반면 유럽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그래도 유럽은 일부 허용하려고 하지만 사회적 반발에 막혀 있다는 점에서 한국보다 나은 편이다. 한국은 강력한 윤리적 잣대에 막혀 관련 논의를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이 역동적인 기업가 정신을 잃고 규제의 늪에 빠진 것은 위험을 극도로 회피하기 때문이다. IMF 위기에서 대량 실직을 경험하면서 공동체를 경시하고 나와 내 가족만 소중히 여기는 풍조가 형성되었다. 이후 경제 성장 저하로 취업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런 인식은 더욱 확고해졌다. 직업을 보호하는 면허증이 중요해졌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혁신을 가로막았다. 정치권은 선거 승리만 보면서 여기에 동조했다. 그렇다고 한국이 더 안전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의 혁신성이 약해지면서 미래는 더 위험해졌다. 당장 눈앞의 작은 위험에만 매몰되어 도전할 기회를 잃어버림으로써, 다가올 더 큰 위험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AI 혁명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낡은 규제의 틀을 과감히 깨고 기업가 정신이 마음껏 발휘될 수 있는 혁신의 토양을 다시 일구는 것, 그것이 곧 다가올 미래 35년을 준비하는 유일한 생존 전략이 될 것이다.
※ 본고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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