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nsun Brief 통권318호
지난해 11월 초 망명한 리일규(52) 전 쿠바 주재 북한 참사관의 망명이 알려지며 북한 체제의 균열과 불안정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북한의 고위층이나 외교관의 한국 망명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다만 리일규 전 참사관이 쿠바 주재 북한 대사관의 이인자이고, 북한 최고의 ‘남미통’이자, ‘김정은 표창장’까지 받은 최고의 권력 엘리트층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북한의 고위탈북자들이 어떤 이유에서, 어떤 목적으로 한국행을 택하는지는 북한 체제의 내구력과 김정은 정권의 안정성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현재 북한 권력 엘리트층 내에서 어떤 균열이 발생하고 있고, 이러한 균열들이 북한 체제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 내부의 균열이 북한 급변사태로 이어질 가능성이 얼마나 있으며 우리는 어떤 통일 준비를 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1. 리일규 참사 망명의 ‘나비효과’
북한 엘리트들의 해외 망명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1991년 고영환 콩고대사관 1등 서기관의 망명을 시작으로 1997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2016년 태영호 영국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의 한국행에 이르기까지 북한 엘리트층의 ‘정치 망명’은 여러 차례 있었다. 공개된 사실보다 실제 밝혀지지는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지난 18일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리일규 전 참사관 외에도 작년에만 10여 명의 북한 엘리트들이 한국 망명을 택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북한 당국의 강력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북한 엘리트층들의 망명이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기간 해외 체류에 따른 사상적 이완으로 북한 체제에 대한 염증과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동경이 중요한 이유로 꼽힌다. 여기에 더해 해외공관이나 북한대표부 활동의 입지가 좁아지고 불법 외화벌이 강요에 따른 압박감 또한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북한 외교관들의 경우 평양 귀환 이후 자녀들의 미래와 교육 문제에 대한 걱정으로 해외 망명을 선택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북한 엘리트층들의 해외 망명은 세습통치와 공포통치가 부른 일종의 ‘풍선효과(Balloon Effect)’라고도 할 수 있다. 3대 세습으로 이어지는 세습통치는 북한의 미래에 대한 암담함을, 무자비한 숙청과 처벌이라는 공포통치는 북한 권력 엘리트들을 해외 망명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세습통치와 공포통치는 북한 엘리트층들에게 체제불안과 신변불안을 느끼게 해 북한으로부터의 탈출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당장에 북한 엘리트층들의 엑소더스(Exodus, 대탈출)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해외 체류 외교관들과 무역일꾼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통제가 강화되고 있고 이를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2중?3중의 감시체계와 인질 통치와 같은 통제장치도 더욱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교관 자녀들을 평양에 잡아두는 인질정치?볼모정치는 비인도적일 뿐만 아니라, 반인륜적인 통치행위이다. 그러나 억압에는 저항의 반작용이 있듯 북한 엘리트층들의 엑소더스가 당장에는 아니더라도, 북한 권력층의 동요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리일규 참사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1990년대 불었던 한류 바람은 물론이고, 태영호 전 의원 등 외교관 출신 탈북자의 성공적인 한국 정착도 탈북에 영향을 줬다”고 밝혔다. 태영호 전 의원의 망명이 리일규 참사관의 망명에 영향을 미쳤듯이 나비의 작은 날갯짓처럼 사소한 사건이 추후 엄청난 결과나 파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으로의 외부정보 유입이 증대되고 있고, 장마당을 통한 정보유통이 확대되는 등 북한 내부로부터의 변화 흐름이 강화될수록 나비효과는 빨라질 수 있다. 북한 외교관들의 망명 날갯짓이 북한 체제의 내구성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 작은 구멍 하나가 커다란 댐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이치와도 같다.
2. 북한 급변사태의 가능성과 함의
현재 김정은 체제는 겉보기로는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유지되는 모양새이다. 때문에 당장에 급변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집권 초기의 체제 불안정에 대한 우려와는 달리 안정적인 권력 유지가 지속되고 있다. 대량 아사나 대량 탈북, 내부 봉기 등과 같은 위기 징후가 포착되지는 않고 있다. 북핵 문제를 두고 대북 압박이 지속되고 있고 정권 불안정성 때문에 전면적인 개혁개방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못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중국과의 경제교류 확대나 러시아와의 군사동맹을 강화하는 등 외교?군사적 고립도 상당 부분 벗어나 있다. 남북관계도 오물풍선 살포 등 대남도발을 통해 적절한 긴장관계를 조성하며 체제 내부의 결속과 주민통제를 강화하는 명분으로 활용하며 체제단속에 적극 나서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북한 체제의 내구력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일시적인 ‘착시현상’일 수도 있다. 권력 엘리트층들의 불안과 불만은 계속되고 있고, 북한주민들의 동요는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실제 북한의 상황은 언제 급변사태가 나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고요 속의 태풍’과도 같다. 만약 통일의 문이 열린다면 그것은 북한 내부로부터 오는 불안 요소와 균열에 따른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우발적인 사건?사고가 민중봉기로 이어질 수도 있고 내부 권력투쟁이 급변사태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 급변사태가 통일의 기회로 작용할지, 한반도 대혼란의 서막이 될지는 우리 스스로의 준비 여하에 달려 있음은 분명하다.
급변사태 대비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 일각에서 급변사태 대비를 말하면 마치 흡수통일을 조장하거나 무력통일을 염두해 둔 양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극단적 시각이 있다. 물론 과도한 급변사태 논의나 여론화가 남북한의 긴장감을 높이기 때문에 조용히 준비하고 대비하자는 취지라면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급변사태 논의나 대비를 마치 극우적인 주장인 양 폄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급변사태 논의는 급변사태를 ‘조장하자’는 것이 아닌, 급변사태를 ‘대비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우리는 북한 내 내전 상황이나 대량 탈북 사태에 신속히 대응하거나, 북한 내 핵무기 및 대량살상무기를 안전하게 통제하기 위해 개입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 혼란과 내전에 따른 치안 관리나 주변국과의 외교적 협력관계 구축 등 전 국가적?전 국민적 대응 태세에 나설 수 있어야 한다. 통일이 소리 없이 찾아올 수 있듯이 급변사태는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김정은의 통일전략과 우리의 통일 준비
북한 주민의 통일에 대한 열망은 매우 높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2022년 4월에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북한에 있을 당시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91.4%(2010~2019년 평균)가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북한 주민의 통일 열망이 우리 국민의 2배가 넘는 수치이다. 북한 주민들의 높은 통일의지와 열망은 북한 당국의 통일에 대한 당위성 교육의 영향도 있겠지만, ‘이렇게 살 바에는 확 통일이나 돼버렸으면 좋겠다’는 현상타파 바램도 같이 내포하고 있다. 통일이 자신의 처지를 바꿔 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말 당 중앙위 제8기 제10차 전원회의를 통해 김정은은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규정하며 통일·민족 개념을 삭제하고 대한민국과의 통일은 성사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와 관련해 리일규 참사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김정은이 적대적 남북 2국가론을 제기한 이유가 북한 주민들의 통일 갈망을 차단하려는 데 있다”라고 했다. 북한식 사회주의로의 한반도 적화통일 가능성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김정은으로서는 흡수통일 당하지 않는 두 국가 체제로의 공존이 현실적 선택이다. 대한민국을 먹겠다는 망상보다는 대한민국에 먹히지 않을 방안 모색에 더 급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정은이 한류문화 확산이나 해외 체류 외교관들의 망명을 막는 등 전방위적인 체제방어에 나서고는 있지만 북한 주민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통일준비가 필요할까?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낮아질 대로 낮아진 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높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2023 통일의식조사’ 결과에서 우리 국민은 통일 필요성에 대해 43.8%만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당위만을 강요한다고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현시대에 맞는 통일담론에 대한 재정립과 당위로서의 통일이 아닌 현실로서의 통일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자기 객관화가 전제될 때 가능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통일준비는 국내적으로는 통일에 대한 청사진을 바탕으로 통일 필요성과 공감대를 확산하고, 다양한 방식의 통일교육을 활성화하며, 통일 인재를 다방면에서 양성할 필요가 있다. 국외적으로는 튼튼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주변국들과의 통일외교를 강화하여 대한민국 중심의 통일에 대한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또한 북한 내부를 상대로는 정보화?시장화?자유화라는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지원하면서, 북한 엘리트층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위로부터의 변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투 트랙(Two-Track)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 본고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