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허구의 상상력으로 빚어낸 창작물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에 기반을 둔 엄중한 학문이다. 최근 홍범도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가 좌우로 갈려 논란을 벌이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의 국수적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이 창작해낸 ‘상상으로서의 홍범도’와 ‘역사적 사실로서의 홍범도’간의 간격이 너무 크게 벌어진 결과로 빚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대다수 한국인이 ‘항일 무장 독립군을 이끈 불세출의 명장(名?)’으로 알고 있는 홍범도의 ‘역사적 사실’은 무엇인가?
1. 사실이 왜곡된 독립운동사
홍범도의 첫 번째 이력은 탈영병이다. 평양 감영 병졸 근무 도중 상관을 구타하고 도주한 그는 개마고원 일대에서 병졸 시절 배운 사격 솜씨로 직업 포수로 활동한다. 이 와중에 포수들을 결집하여 의병대를 조직,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힌다. 일본군에게 쫓겨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연해주로 망명, 연해주에서 의병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와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런 기록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공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부분으로 생각된다.
1919년 8월 8일 홍범도는 연해주에서 모집한 대한독립군 106명을 인솔하여 간도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최진동·안무 등과 손잡고 1920년 5월 대한북로군독군부(大韓北路軍督軍部)를 출범시켰다.
한국인들의 영혼 속에 봉오동·청산리 전투는 우리 독립군이 거둔 항일 무장투쟁의 위대한 승전보로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흥분하기 전에 기억해야 할 사실은 1916년 무렵 일본군의 전시 병력 규모가 163만 8,000명이었다는 사실이다. 와세다대학 국제법 교수 시노부 준페이(信夫淳平)는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세계 5대 열강, 세계 3대 군사 강국으로 정의했다.
그에 맞선 한국의 무장 독립군은 어떤 수준이었을까? 중국 구이저우(貴州) 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간도로 간 김홍일은 1921년 3월 29일, 장백현에서 대한독립군비단에 합류했다. 그가 몸담은 군비단은 장교 2명에 병사 255명. 그중 50명만 전투 경험이 있었다. 게다가 병력 255명이 보유한 무기는 소총 21자루가 전부였다. 병사 12명당 소총 한 자루 꼴(김홍일, 『대륙의 분노-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89쪽)이었다. 부대라고 칭하기조차 민망한 수준의 독립군이 무슨 신출귀몰한 전술 전략으로 세계 3대 군사 강국인 일본군 정규군과 싸워 대승을 거둘 수 있었을까?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발표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단 한 차례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의 피해를 입혔다. 반면에 우리 독립군은 전사 4명(장교 1, 병사 3), 중상 2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청산리 전투는 일본군이 1920년 10월부터 1921년 5월까지 8개월간 2만 5,000명의 병력으로 간도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최신형 대포, 항공기, 기관총 등 최신 무기를 동원하여 독립군 근거지를 포위했다. 독립군 지도자들은 10월 초 회의를 열어 피전(避?), 즉 도주하기로 결정했다. 근거지를 포위당한 독립군이 탈출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청산리 전투다.
10월 21일부터 7일간 10여 차례 진행된 청산리 전투에 대한 상해 임정의 공식 발표는 일본군 사살 1,254명,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약 1,600명 사살,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던 이범석은 회고록 『우둥불』에서 일본군 사상자 3,300명, 독립군 피해는 전사 60여 명, 부상 90여 명, 실종 200여 명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곳곳에서 봉오동·청산리전투의 독립군 대첩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다. 일본방위대 교수 사사키 하루다카(佐佐木春隆)는 『조선전쟁 전사로서의 한국독립운동의 연구』에서 일본 측 사료를 통해 봉오동 전투는 일본군 추격대가 한국 독립군 24명을 사살하고 부상자 다수를 냈으며,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 1명뿐인 일본군의 승리라고 밝혔다. 청산리 일대에서는 일본군 전사자 11명, 부상자 24명, 말 10필의 희생을 치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신효승(동북아역사재단)은 봉오동·청산리전투의 전과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한국 측이 주장해온 우리 독립군의 ‘압승’은 그럴듯한 소문에 기초한 신화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장세윤(동북아역사재단)은 여러 자료를 토대로 봉오동에선 일본군 100여 명 살상, 청산리에선 일본군 400~500여 명이 살상되었으며, 우리 독립군도 그에 못지않은 피해를 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장세윤,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명지사, 2005, 156쪽).
이러한 연구 결과가 사실이라면 봉오동·청산리전투는 우리 독립군의 대첩이 아니라 무승부 정도로 정정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 인식 아닐까?
2. 자유시 참변의 흑역사
포위되었던 한국 독립군은 각자도생 방식으로 일본군 포위망을 간신히 탈출했다. 이때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 정당을 조직한 이동휘가 “한국 독립군이 자유시로 들어오면 레닌 정부가 도와주기로 했다”라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은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금화 100만 루블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대일한로공수동맹(?日韓露攻守同盟)’을 체결했다. 조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산주의를 수용하며,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 중인 한인 무장 부대를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 편입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코민테른 자금을 받은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은 이후 집요하게 임시정부 공산화 작업을 진행했다. 이동휘는 “대한이라는 낡은 이름을 버리고 ‘조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자”라고 제안했으며, 태극기를 폐지하고 푸른 천에 세 개의 붉은 별이 있는 국기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마뜨베이 찌모피예비치 김 지음·이준형 옮김, 『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 역사비평사, 1990, 106쪽). 또 임정을 혁명위원회로 개편하고, 시베리아로 옮기려 했다.
임정을 탈퇴한 이동휘는 간도·연해주의 한국인 무장 부대를 시베리아 영내로 끌어들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홍범도를 비롯하여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무장 부대는 4,500여 명. 이들 중 홍범도·최진동·안무·이청천 등을 비롯하여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은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의 편입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절반 정도는 적군 산하로의 편입을 거부하자 소비에트 정부는 자신들의 명을 따르지 않는 한국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명령한다. 1921년 6월 28일, 소비에트 정부는 적군 편입을 거부한 한국 독립군을 포위하고 장갑차를 앞세워 공격했다. 홍범도, 이청천 등도 동료를 학살하는 소비에트 적군 편에 가담한 사실이 여러 사료를 통해 밝혀졌다.
김홍일은 자유시 참변 당시 희생된 한국 독립군은 700~800명, 부상자 수백 명, 벌목장으로 끌려간 인원수는 1,000여 명이 넘었다고 주장한다(김홍일, 『대륙의 분노』, 문조사, 1972, 106쪽). 적군의 포로가 된 독립군은 우수문 벌목장에서 강제노역 형에 처해졌다(박영석, 『한국독립군 병사의 항일전투』, 박영사, 1984, 179~181쪽). 이것이 한국 독립운동의 흑역사로 기록된 ‘자유시 참변’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한국인이었다. 항일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에서 한국 무장 독립군을 몰살시키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을 독립운동 연구자들은 열심히 연구해 놓고도 왜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것일까?
3. 홍범도의 공산 이력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의 편입을 수용한 홍범도를 비롯한 2,000여 명은 고려혁명군 여단으로 재편되었고, 홍범도는 제1대대장에 임명되었다. 자유시 참변 일주일 후인 1921년 7월 5일, 코민테른은 고려혁명군을 이르쿠츠크로 이동시켜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 예속시켜버렸다. 이로써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이 레닌 정부와 체결한 공수동맹, 즉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한인 무장 부대를 소비에트 적군에 귀속시키는 작업은 완벽하게 이행되었다. 이때부터 고려혁명군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정신의 함양, 즉 공산화를 위한 혁명 교육에 돌입한다.
코민테른은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제1회 극동 제(諸)민족대회(극동인민대표대회)를 열었다. 홍범도는 이 대회에 참가하는 한인 대표 56명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대회가 끝난 2월 초 홍범도는 한인 무장세력(고려혁명군) 대표 자격으로 레닌·트로츠키와 면담했다. 레닌은 홍범도에게 혁명정권에 협조해준 감사의 표시로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홍범도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로 주었다(장세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역사공간, 2017, 221~223쪽).
잔치가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 법이다. 소비에트 정부는 1922년 4월 13일 고려혁명군 병력을 절반으로 축소하고 1,000여 명을 강제 제대시켰다. 같은 해 9월에는 “한인 부대의 임무는 완수되었다”라면서 고려혁명군 해산을 명했다. 이동휘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에 집결했던 한국 무장 독립군은 이로써 깨끗하게 해체되었고,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한국 독립군의 무장투쟁은 소멸했다.
부대가 해체되어 갈 곳이 없어진 홍범도는 1923년 8월 이만 근처의 까잔린 구역 집단농장에서 4년여 농사를 짓고 벌을 쳤다. 1927년 10월에는 소련공산당에 가입한다. 당증 번호는 578492번. 1928년 7월부터 이만 남쪽 스파스크 진동촌으로 이주, 항카호 부근 ‘항카의 별’콤비나트에서 농사를 지도했다.
1937년 9월 초, 홍범도는 스탈린의 명에 의해 카자흐스탄의 시르다리야강 근처 전 아뤼크촌 사막지대로 강제 이주당했다. 1938년 4월에는 크즐오르다로 이주하여 조선극장 수위장에 임명되었고, 1943년 10월 25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4. 건국 정신을 훼손한 서훈
홍범도는 사상적 동지였던 이동휘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 동료 독립군을 몰살하는 편에 가담했다. 레닌으로부터 소비에트 적군 편입을 거부하는 한국 독립군을 청소해줘 고맙다고 격려금과 권총까지 선물 받고,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여 당원이 된 사람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한국인이 일제 치하에서 수행한 독립운동의 목적은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위해서”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 정부 수립 이후 2017년 1월까지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건국훈장을 받은 대표적인 몇 사람의 이력을 추적해 보면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바로 자유와 인권, 법치가 존중되는 자유민주 세상 실현을 위해 노력한 사람보다 그런 가치를 파괴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을 위해 투쟁한 자, 혹은 국가마저 파괴하겠다고 나선 아나키스트들에게 버젓이 건국훈장을 수여한 것이다.
홍범도가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기에 문재인 대통령은 그에게 건국훈장 중에서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으며, 국방부와 육사에 그의 흉상을 세워놓았던 것일까? 참으로 괴이한 일이 무시로 벌어지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