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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un Brief [광주정신에 반하는 정율성 기념사업 왜 문제인가?] 통권271호
 
2023-08-29 11:19:12
첨부 : 230829_brief.pdf  
Hansun Brief 통권271호 

최창근 중국전략연구소 연구위원


1. 항일운동가인가? 공산주의자인가?

 

한국인으로 태어나 중국인으로 삶을 마감한 한 음악가의 삶의 궤적과 기념사업을 둘러싼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논란의 주인공은 정율성(鄭律成)이다.

 

다수 한국인에게 아직은 낯선 정율성은 중국에서는 유명 작곡가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제2국가(國歌)로 꼽히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작곡한 정율성은 중국 국가 의용군진행곡을 작곡한 녜얼(?耳), 황하대합창(黃河大合唱)을 쓴 센싱하이(?星海)와 더불어 현대 3대 음악가로 꼽힌다. 중국 군가의 아버지라는 별칭도 얻었다. 북한에서도 정율성의 명성은 높다. 북한 군가 조선인민군행진곡작곡가이기 때문이다.

 

중국 대표 포털사이트 바이두(百度)는 정율성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정율성은 중국의 걸출한 작곡가이다. 또한 유명 국제주의 전사이다. 그중 인민해방군행진곡은 순박하고 간결한 언어와 울림이 있으면서도 힘 있고 장엄하고 호방한 곡조를 담고 있다. 인민군 군인의 이미지를 강하게 새겼다. 인민해방군의 무한한 전투 품격과 산이 첩첩이 줄을 서고 바다를 뒤집는 기세를 보여준다.

 

정율성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그를 항일(抗日)운동가이자 걸출한 음악가로 평가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정율성은 대한민국의 반대편에서 북한?중국을 음악으로 찬미한 공산주의자일 뿐이다. 정율성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2. 희미한 항일 행적

 

정율성은 1914년 광주광역시 태생이다. 호적상 이름은 정부은(鄭富恩)이었지만 집안에서는 정구모(鄭龜摸)로 불렸다. 아버지 정해업(鄭海業)은 한학자 출신으로 미국 남장로회가 설립한 미션 스쿨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어머니 최영온(崔英溫)은 개명한 지역 유지 집안 출신이다. 정율성은 4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정율성의 친·외가는 기독교(개신교)와 인연이 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정율성의 형제자매는 공산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첫째 형 정효룡(鄭孝龍), 둘째 형 정충룡(鄭忠龍)1919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했고 셋째 형 정의은(鄭義恩)도 뒤를 따랐다. 이는 정율성의 삶에도 영향을 끼쳤다.

 

1933년 정율성은 중국 상하이(上海)를 거쳐 중화민국 국민정부 수도 난징(南京)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2기생으로 졸업했다. 이후 난징 구러우(鼓樓)전화국에 잠입하여 난징-상하이 간 일본인 전화 도청 업무를 수행했다. 해당 경력이 정율성의 유일무이한 항일 경력이다.

 

난징에서 활동할 때, 소련 레닌그라드음악원 출신 성악가 크리노바(Krennowa)로부터 음아을 사사(師事)했다. 이 무렵 부은이라는 본명 대신 선율(旋律)로서 성공(成功)하겠다는 뜻을 담아 율성(律成)으로 개명한다. 일설에는 의열단을 설립한 김원봉이 지어줬다고 전해진다.

 

3. 선명한 공산주의 궤적

 

1936년 정율성은 좌파 청년 조직 5월 문예사(五月文藝社)에 저우취타오(鄒趣濤)의 시에 곡을 붙여 5월의 노래(五月之歌)를 발표하며 입회했다. 1937년 공산주의 조직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했다. 그러다 193710, 중국공산당 근거지 산시(?西)성 옌안(延安)으로 갔다.

 

옌안에서 정율성은 산베이공학(陝北公學·오늘날 중국인민대학, 베이징이공대학, 시베이정법대학, 옌안대학 전신)에 적을 두고 공부했다. 3개월 과정 이수 후 루쉰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에 입교하여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루쉰예술학원 재학 시절, 정율성은 삶의 전환점이 되는 곡을 썼다. 1938년 작곡한 옌안송(延安頌)이다. 중국 공산당 혁명 근거지 옌안을 찬양하는 노래로 당시 여성 시인으로 명성이 높아가던 모예(莫耶)의 시에 곡을 붙였다.

 

훗날 정율성은 옌안송을 작곡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옌안은 항일과 혁명의 성지였다. 아쉽게도 그런 옌안을 수많은 중국인들에게 알리는 노래가 없었다. 나는 옌안과 옌안 정신을 중국인들에게 알리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옌안 정신이란 다름 아닌 중국공산당 혁명 정신이다.

 

1938년 루쉰예술학원 졸업 후 정율성은 중화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中華人民抗日軍事政治大學·항일군정대학) 음악지도원으로 배치됐다. 그 시절 작곡에 매진하여 러시아 10월 혁명을 기념하는 10월 혁명 행진곡을 비롯하여 항전 돌격가등을 작곡했다. 항일군정대학 재직 시절 정율성은 중국인과 결혼했다. 대학 여학생대 간부로 일하던 딩쉐쑹(丁雪松·정설송)이다.

 

조선인 정율성은 19391, 중국 공산당에 입당 신청했다. 훗날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이 되는 무정(武亭·김무정), 북한 정치보위상 등 요직을 역임하는 박일우 등이 신원보증을 했다. 중국공산당 당원이 된 정율성은 팔로군행진곡(八路軍行進曲)을 작곡했다. 중국공산군과 마오쩌둥(毛澤東)을 위한 찬양곡이었다.

 

4. 동족상잔의 비극에서 예술혼 불태워

 

1945년 일본 패망 후 정율성은 고국행을 택했다. 목적지는 고향 광주가 아닌 북한이었다. 194512, 정율성은 아내 딩쉐쑹 딸 정샤오티와 함께 조선으로 갔다. 소련군이 진주한 38도선 이북에는 김일성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조선노동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정율성은 조선노동당 황해도위원회 선전(宣傳)부장,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부장, 조선인민군협주단장 등으로 활동했다. 조선인민군협주단장으로서 2년여 동안 북한 전역을 돌며 연주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작곡에도 힘을 쏟아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중조우의(中朝友誼)’, ‘동해 어부등을 작곡했다. 그 중 조선인민군행진곡은 북한 군가로 공식 채택됐다.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인민회의, 인민위원회, 문예학술총동맹 등으로부터 4차례 상장과 상금을 받았다. 1948년에는 조선인민공화국 모범노동자로 선정됐다.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 발발 무렵, 중국으로 귀환했던 정율성은 1950년 펑더화이(彭德懷)가 지휘하는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을 따라 다시 북한에 왔다. 중국공산당은 지원군이라 칭했지만, 실체는 정규 인민해방군이었다.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돕는다)를 명분으로 참전했다.

 

항일전사 정율성 평전: 음악이 나의 무기다에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정율성은 중국 인민지원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띠고 전선에 투입된다. 비록 총을 들고 싸우는 군인은 아니었지만, 인민지원군을 따라 서울까지 내려온 그는 포화가 빗발치는 최전선을 피하지 않는다. 책상에서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정율성의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송서평 중국 시난과기대학(西南科技大學) 교수의 2009년 논문 정율성의 음악창작 탐구에서는 6·25전쟁 당시 정율성의 음악 활동을 조선(한국)전쟁은 정율성의 창작 격정(激情)을 불러일으켰다. 정율성은 중국 인민지원으로 참전하는 4개월 동안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기(士氣) 고취를 위해 조선인민유격대전가’,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우리는 탱크부대’, ‘전사의 맹세’, ‘지원군 10()등을 작곡했다고 기록했다.

 

결과적으로 북한 인민군은 정율성이 작곡한 군가를 부르며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남침 전쟁을 일으켰고 정율성은 전장에서 예술혼을 불태운 셈이다.

 

5. 만년(晩年)에 마오쩌둥 찬가 작곡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중국으로 돌아온 정율성은 공산당 찬가작곡에 힘을 쏟았다. 재앙적인 공산주의 실험이 행해지던 문화대혁명(1966~1976) 기간 동안에는 중국 공산당 영수(領袖) 마오쩌둥 찬가(讚歌)를 작곡했다. 마오쩌둥의 시에 곡을 붙이는 작업을 주로 맡았다. 당시 활동에 대하여 송한용 전남대 사학과 교수는 정율성의 사상형성과 지향: 1945년 이전 중국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글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정율성은 철저히 마오쩌둥의 문예강화정신을 추구하면서 성장한 혁명 현실주의 예술가였다. (???) 그는 음악은 단순한 오락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혁명의 무기이며 전투의 무기라고 하면서, 혁명적 노래는 반드시 새로운 세대의 투지를 불러일으키고 혁명적 정신을 양성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여생(餘生)의 대부분을 마오쩌둥 관련 작품 활동을 했던 정율성은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사그라들 무렵인 1976년 심장마비로 삶을 마감했다.

 

정율성의 삶은 희미한 항일행적, 뚜렷한 공산주의 궤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한 평생 공산주의자로서 산 정율성의 항일 행적은 난징에서 도?감청 업무에 종사한 것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지만 공산주의자로서 북한 노동당과 인민군, 중국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을 위해 예술혼을 불태운 행적은 뚜렷하다.


6. 중국 돈 벌기 위해 정율성 기념사업 추진?

 

이런 정율성의 행적을 감안할 때 정율성 추모·기념사업을 할만한 가치가 없다. 하지만 정율성 추모?기념 사업은 고향인 광주광역시와 어린 시절을 보낸 전라남도 화순군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20147, 민선 윤장현 시장 취임 후 광주광역시는 총 사업 예산 71억 원 규모의 차이나 프렌들리(중국과 친해지기)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친중국 문화관광콘텐츠 활용을 통한 대 중국 한류 관광 기반 구축 아시아 문화중심도시 광주의 대 중국 홍보 정율성 브랜드 활용 도시마케팅 차이나 프렌들리 도시환경 구축 대 중국 문화예술교류 활성화 광주시 대 중국 교류 역량 확대·강화 등 6대 전략이 제시됐다. 그중 정율성 관련 세부 사업으로는 정율성 사적지 등 주변 정비 정율성 한중음악제 프로그램 확대 추진이 명시됐다. 이밖에 광주광역시는 2005년부터 연평균 46000만 원을 들여 정율성 국제음악제도 개최하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광주가 낳은 중국의 3대 음악가인 정율성을 매개로 한 한중(韓中) 문화교류 및 관광 활성화와 공연문화 발전 도모 정율성 음악제개최 동기로 밝혔다. 정율성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광주광역시에는 생가터가 복원됐고 정율성 거리도 조성됐다. 48억 원의 예산을 들여 정율성 역사 공원 조성도 추진되고 있다.

 

친북?친중 공산주의자로서 행적이 뚜렷한 정율성을 기념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정율성 기념사업 실무자였던 정창재 전 광주문화예술회관 관장의 2015전남일보기고문 정율성 콘텐츠, 이젠 중국 시장에서 돈 벌 때다에서 엿볼 수 있다. 글에서 정 전 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중국은 경제력으로 하루가 다르게 그 위상이 변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과는 너무 가까워졌다. 한ㆍ중 FTA 체결, 위안화 직접 결제, 후강퉁(邑港通),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등이 그 가교다. 또 시진핑 주석은 한국 방문에서 정율성은 중국 건국 100대 인물이라며 친밀감을 표시하고 우리를 손짓하고 갔다. 우리(광주)는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를 지향한다. 중국과 공연 직접투자로 예술을 발전시키고, 중국서 돈도 벌고 관광객을 불러들여 일거삼득의 기회를 만들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7. 왜 민주화의 성지(聖地) 광주가 반() 대한민국 인사를 기념하나?

 

광주가 낳은 음악가 정율성은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지녔지만 이를 잘못된 곳에 사용했다. 1949년 공산혁명 성공 후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재앙적인 공산주의 실험 속에서 수천 만 명의 자국민을 죽음으로 내몬 중국공산당과 그 지도자 마오쩌둥을 찬양했다. 정율성이 작곡한 군가를 부르며 북한 인민군은 남침 동족상잔 전쟁을 벌였고, 그는 전쟁 기간 동안 북한 인민군의 사기를 고취했다. 북한을 도와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을 위한 찬가도 작곡했다. 이러한 전력을 지닌 정율성을 동향(同鄕) 출신 인사라는 이유만으로 찬양하고 기리는 것은 조국을 위해 산화(散花)6?25전쟁 호국 영령에 대한 모독이다.


19805?18민주화운동의 발상지 광주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성지(聖地)이다. 지난날 광주시민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분투(奮鬪)했었다. 정율성은 호국 영령도 반일 투사도 아니다. 북한과 중국을 위해 평생 동안 자신의 천부(天賦)적 재능을 사용하여 봉사한 반() 대한민국 인사일 뿐이다. 광주정신을 욕보이는 정율성을 광주시민들이 기념해서는 안 된다.

 

또한 중국 관광객?자본 유치를 위한 문화 상징으로 정율성을 이용하겠다는 발상도 문제이다. 시쳇말로 돈만 된다면 마오쩌둥 동상을 세울 수도 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념하는 행사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발상이 광주의 민주화정신을 훼손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변명이다.

 

출생지가 광주이고 성장지가 전라남도 화순일 뿐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으며 북한군의 사기를 드높이는 여러 군가를 지어 북한 정권에 충성했던 정율성으로부터 우리는, 민주 성지 광주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중국에서 유명한 작곡가로 알려졌다 해서 그의 사상과 전력을 깡그리 무시해도 되는가? 민주주의를 부정하면서 용감하게 남한 괴뢰 군대를 무찌르자던 그의 음악을 이용한 선동은 받아들여도 되는가? 이처럼 정율성 추모·기념 사업으로부터 배울 교훈이 거의 없다, 그래서 정율성 추모·기념사업은 철회되는 것이 합당한 순리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광주시민의 용기있는 결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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