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국가 R&D 예산을 전면 재검토를 지시했다. 이로 인해 과기정통부는 R&D 예산안 법정 제출 시한을 넘기게 되었다. 그간 과학기술계 안팎에서 현행 국가 R&D 시스템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고,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에서 이번 대통령의 지시는 매우 시의적절한 것이라는 진단이다.
그렇다고 이번에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역대 정부에서도 R&D 시스템 개편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혼란을 가져왔고 결국 안 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특히 기재부로 대표되는 정부와 과학기술계 간에는 뿌리 깊은 불신이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두 개의 제도가 있다.
- 민간 전문가의 국가연구개발 예산 심의
국가 R&D 예산은 민간위원으로 구성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이하 자문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심의라고 해서 결코 형식적이지 않다. 자문회의 산하에 10개의 전문위원회가 있다. 전문위원회에 올라온 R&D 예산에 대해 연구과제 수준까지 검토한다. 심의기구이어서 최종 결정은 아니지만 사실상 당락을 결정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하다. 이처럼 민간위원이 예산을 심의하는 제도는 다른 나라에는 없다. 미국의 대통령 과학기술자문회의(PCAST)는 순수 자문만 한다. 예산, 정책 심의는 대통령 소속의 국가과학기술위원회(NSTC)에서 담당한다. 이 기구는 부처 장관 등 공무원으로만 구성되어 있고 민간위원은 없다.
우리나라처럼 민간위원이 예산을 심의하던 일본은 2013년 심의에서 민간위원을 배제하도록 제도를 바꿨다. 민간위원이 예산 심의과정에서 국가 전략을 고려하기보다 자신의 분야 예산 확보에 집중하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과학기술정책 전반은 총리 자문기구인 종합과학기술혁신회의에서 심의하지만 예산은 미국처럼 부처 공무원으로 구성된 과학기술혁신예산전략회의에서 심의한다.
- 연구개발 예산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
그렇다고 과학기술계가 자신의 이해만 챙긴다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과기계가 예산 심의를 주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정부 예산 심의에 대한 불신이다. 예전에는 기재부 사무관이 연구사업 수준이 아닌 연구과제까지 일일이 검토했다. 그렇다 보니 해당 분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무관을 상대로 저명한 연구자가 많은 시간을 기다리다 설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수시로 발생했다. 때로는 모욕적인 언사를 듣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과학기술계는 국가 R&D 예산 심의 기능을 기재부에서 과기정통부로 이관시키는 노력을 했고, 그 결과 지금의 예산 심의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그렇다고 과거의 관행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연구개발 예산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다. 선진국에서는 공항과 같은 대형건설 사업을 할 때만 시행하는 이 조사를 우리나라는 국가 R&D 사업에도 적용한다. 이렇게 정해진 사업은 보통 10년간 지속된다. 환경이 변한다고 사업 내용을 조정하기도 쉽지 않다. 때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사업도 계속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10년 후 사업화 결과를 예측하는 예비타당성 조사가 매우 무의미한 일이다. 우선 지금 연구한 성과물이 나중에 어떤 실용화 결과를 가져올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또한 언제 그 성과가 나올지도 예측하기 어렵다. 대표적 사례로 중국의 리튬 인산철 배터리를 들 수 있다. 본래 이 기술은 미국에서 개발했다. 그런데 전기차 대중화가 지지부진해지면서 상용화하던 기업이 파산했고, 중국 기업이 이 기업을 인수했다. 이후에도 에너지 밀도가 낮아 저급 기술로 취급받던 이 기술은 가격경쟁력이 주목받으면서 우리 배터리 산업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미국도 이 기술의 잠재력을 알았더라면 중국으로의 기술 유출을 방관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 전략기획 및 실행력 부족
우리나라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과 국가 R&D 시스템에서 가장 큰 차이는 기획력이다. 선진국은 전략적 목표를 정하면 이를 달성하기 위해 풀어야 할 과학기술적 문제를 발굴한다. 그리고 이 문제를 잘 풀 수 있는 연구팀을 찾는다. 반면 우리나라는 그 순서가 다르다. 전략적 목표를 정한 후 관련 연구팀을 찾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고 싶은 연구주제를 제안받는다. 그 다음, 그 주제를 전략적 목표와 연결한다. 얼핏 보면 미국이나 우리나라 모두 전략목표-문제제시-연구팀 선정이라는 R&D 기획집행 절차를 거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내용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미국은 연구팀 선정 이전에 풀어야 할 과학기술적 문제를 발굴했기 때문에 연구가 성공하면 전략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연구가 성공한다고 해서 전략목표를 달성할지 불확실하다. 전략목표 달성에 필요한 과학기술적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연구팀이 풀고 싶은 문제만을 풀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R&D 필요성이 아니라 예산 확보여부가 사업의 기획?집행에 절대적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대 조류에 빠르게 반응한다. R&D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이 부각되면 관련 예산이 대폭 늘어난다. 국내 인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정작 지금까지 잘하던 연구의 예산은 대폭 줄어든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자가 생존하려면 자신의 전공에 맞춰 연구과제에 지원하기보다 수주하기 쉬운 과제로 전공을 바꿔야 한다. 자칫 지금까지 한 연구 성과를 아쉬워하면서 머뭇거리면 실험실 운영조차 어려워진다. 연구관리기관도 마찬가지다. 정상적 기획으로는 예산을 쓰기 어렵다. 일단 예산을 쓸 수 있는 연구팀을 섭외해서 아이디어를 모아야 한다. 필요성을 고민하다 보면 배정된 예산도 집행하지 못해 무능하다는 비판을 듣기 십상이다.
- 부처 간 R&D 영역 중복 및 취약한 조정기능
우리나라는 부처 간 R&D 영역이 중첩되어 있어 예산 조정 수요가 많은 나라다. 일본이나 유럽은 우리처럼 과학기술 전담 부처를 두고 있다. 그렇지만 부처 간 예산 조정 수요가 많지 않다. 전체 R&D에서 차지하는 전담 부처의 비중이 최소 절반을 넘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은 과학기술 전담 부처가 없다. 그렇다고 부처 간 예산 조정 수요가 많지 않다. 국방, 보건의료, 에너지, 우주와 같이 각 부처의 고유 미션에 부합하는 R&D 사업을 하기 때문이다. 국립과학재단(NSF)와 같이 다른 부처의 R&D 영역과 중복되기도 하지만 전체 R&D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우리나라는 일본, 유럽처럼 과학기술 전담 부처가 있으면서도 미국처럼 각 부처별 미션에 맞춰 R&D 사업을 하는 나라다.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소관부처가 달라진다. 과기정통부의 비중이 전체 정부 R&D의 1/3이 안 된다. 위상은 전담 부처지만 사업 규모로는 전담이란 명칭이 무색하다.
당연히 부처별 수행하는 R&D 사업의 중복성이 클 수밖에 없다. 이를 조정해야 하는 과학기술혁신본부의 역할에 대한 평가도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소속이 과기정통부이다 보니 조정의 공정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R&D 사업이란 게임을 뛰는 선수가 예산 조정하는 심판 역할도 한다는 이유에서다. 자연스레 적극적인 R&D 예산 조정이 어렵다.
비슷한 사업을 여러 부처에서 하다 보니 연구자는 한 과제 제안서를 가지고 여러 부처에 지원할 수 있다. 흐름만 잘 타면 비슷한 내용에 제목만 바꿔 여러 부처에서 수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선진국처럼 제시한 문제가 아니라 연구자가 풀 수 있는 문제를 푸는 방식이라 크게 바꿀 필요도 없다.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 과학기술 분야 전문성에 대한 오해
다른 나라에서 안 하는 민간의 연구개발 예산 심의와 예비타당성 조사를 하고 전략목표 달성이 아닌 예산 집행을 위한 사업기획을 하게 된 배경에는 과학기술 분야 전문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연구개발이나 산업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이면 정책도 잘 알 것이라고 기대한다.
국가 R&D 사업을 심의하려면 공무원이 부족한 전문성을 가진 민간위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정책은 거시적인 안목과 이해관계 조정 능력이 중요하다. 특정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만으로는 문제를 제대로 풀어낼 수 없다. R&D 사업의 타당성 판단도 마찬가지다. 예산이 한정적이라 한 분야의 예산이 늘면 다른 분야의 예산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한 분야에 대한 전공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 포트폴리오를 짤 수 있는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 개별 R&D 과제에 대한 전문성은 예산 편성 과정에서 필요하지 않다. 과제로 풀어야 할 문제만 명확하면 공모 과정을 거쳐 잘하는 연구팀에 맡기면 된다. 공무원이 과제의 세부적인 내용까지 일일이 간섭하던 관행이 그대로 남아 지금과 같은 기형적인 모습이 되었다.
국가 R&D에서 전문성을 잘 살리려면 전략기획-사업기획-연구수행의 단계별 필요한 전문가를 잘 배치해야 한다. 미국의 국가 R&D가 경쟁력을 갖는 이유는 필요한 전문가를 잘 활용하기 때문이다. 전략기획 단계에서는 개별 기술이 아닌 정책에 대한 전문성이 필요하다. 사업기획 단계에서는 해당 기술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연구수행 단계에서는 특정 기술에 대한 깊이 있는 전문성이 필요하다. 미국은 단계별 전문가를 잘 활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략기획단계에 특정 기술 전문가를 활용하고 개별 과제에 정책 전문가가 관여한다. 이는 전문가를 잘못 활용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연구관리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연구사업관리 전문가(PM) 제도를 도입했다. 아쉽게도 이 제도는 유명무실화 되었다. 미국에서는 이들이 전문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다. 우리는 그 반대다. 자신의 권한과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하며 PM이 역할을 못 하도록 공무원과 연구자가 강하게 견제한다. 각자의 역할과 전문성이 다른데 그걸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 공론화를 위한 논의 구조를 만들어야
국가 R&D 체계 개편은 어려운 과제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산업계 관점에서 개편을 시도했다. 민간이 주도하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설립해서 운영하기도 했다. 이 기구는 3년 남짓 운영하다가 박근혜 정부에서 폐지되었다. 조정 대상인 정부 부처는 물론 현장의 연구자도 조정의 실효성이 낮다면서 폐지에 찬성했다. 박근혜 정부 인수위에서는 당선인 지시로 예산 심의 과정에서 민간위원을 배제하는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기구의 명칭만 위원회에서 심의회로 변경되었을 뿐 심의방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 국가 R&D 체계 개편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려면 논의 프레임을 잘 짜야 한다. 경제산업계는 물론 과학기술계도 동의할 수 있는 해결책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일은 과기정통부 공무원만으로는 하기 어렵다. 논의과정이 투명하지 않거나 사회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않으면 지난 20년 동안 있었던 것과 같이 성과는 적고 혼란이 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공론화 위원회 구성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인사의 다양성이다. 과학기술계 인사가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산업계 인사도 참여해야 한다. 특히 첨단 연구개발을 통해 성과를 거둔 말 그대로 혁신을 창출한 인사가 참여해야 한다. 과학기술정책 전문가도 필요하다. 단일안을 밀어붙이기보다 복수안을 두고 장단점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공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