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시성의 비동시성 그리고 사대주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의 지난주 회동을 두고 여진이 지속되고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은 형식, 내용, 파장 등 모든 면에서 ‘부적절’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 제1야당 대표가 주재국 대사관저를 찾아가서 ‘훈계’를 듣고 온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만남이 대한민국 국격에 큰 상처를 입혔다.
면담에서 싱하이밍 주한 대사는 작심한 듯 미리 준비한 원고를 통해 “미국의 승리에 베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라며 한국 정부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정부를 겁박했다. 이에 반발해야 할 제1야당 대표 이재명은 동조?방조를 넘어 즐기는 듯한 자세였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한 불만 표출을 싱하이밍 대사가 대신해 줘서 되레 감사하다는 뉘앙스도 풍겼다.
오늘날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백주대낮에 벌어지는 이러한 장면을 보면 ‘비동시성의 동시성(The Contemporaneity of the Uncontemporary)’이 떠오른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동일 공간에서 전근대?근대?탈근대적 행태가 동시에 벌어진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한 국가 내에서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부문별로 상이한 발전 수준을 설명하는 유용한 이론으로 꼽힌다. 이 개념은 블로흐(Ernst Bloch)가 바이마르공화국의 상황을 분석하며 창시한 개념으로, 한국에서는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가 본격 소개했다.
2. 탈근대의 글로벌 중추국 ‘대한민국’
글로벌 관점에서 한국은 대표적인 모범국가이다. 식민지-전쟁으로 이어진 시련을 극복하고 건국과 호국 ? 산업화 ? 민주화 - 선진화로 이어지는 역사의 여정은 성공적이었다. 우리의 성공적 역사 여정은 세계의 부러움을 받고 있다. 2023년 현재 한국은 ‘G7’에 이은 ‘G8’의 문을 두드리고 있으며, 다자외교의 꽃이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에 선출됐다.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3050 클럽’의 7번째 회원국이다. 세계 약 200개 국가 중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양적?질적 대국(大國)이라는 의미도 된다. 더하여 이른바 ‘K-컬처’ ‘K-방산’ 등도 세계 시장에서 환영받고 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발전, 대외 위상은 탈(脫)근대성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재명-싱하이밍 회동을 보면, 전근대성 요소도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다. 다른 표현으로 ‘근대국가’를 넘어 ‘포스트모던’을 선도하는 대한민국이 아닌 전(前) 근대왕조 조선(朝鮮)에 살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3. 소중화에 매몰된 한국 진보의 이중성
착각을 부추기는 대표적인 부류는 이른바 ‘진보’ 혹은 ‘X86’으로 불리는 집단이다. 오늘날 더불어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이기도 하다.
민주화 세대를 자부하는 이들은 현시대의 주류세대로도 자리매김했다. 다소 거칠게 이들의 세계관을 요약하자면 “한국은 여전히 미제(美帝?미국 제국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1945년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해 친일파의 후손이 득세하는 ‘부끄러운 나라’이며, 지난해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이 없어 지난날 한국을 괴롭힌 왜구(倭寇?일본)들과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매우 잘못된 역사 인식이 아닐 수 없다.
반면 이들에게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운명 공동체이고 민족 공동체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중국이 한국에게 경제 보복을 가하고, 북한이 도발을 해서 한국 국민의 목숨까지 앗아가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그 책임을 한국 정부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중국이 보복을 하는 이유는 한국에 사드(THAAD) 배치를 허용했기 때문이고, 북한이 도발하는 원인도 역시 한국 정부가 경제 지원을 하지 않아서라고 이야기한다. 이 정도면 ‘스톡홀름 증후군’이 아닐까 판단된다.
‘반미 반일 친북 친중’으로 요약할 수 있는 한국 진보, X86세대의 사고는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8억 인과의 대화》 등 1980년대 이른바 ‘운동권의 바이블’로 불렸던 책들이 제시한 사고관?세계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이들은 한국(Korea)에 살고 있으면서도 조선(Chosun)을 그리워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중국(中國)’은 천자국이요 상국이다. 사대(事大)의 예를 갖춰야 할 대상이다.
조선을 그리워하며 미국?일본을 배척하는 이른바 ‘조선 DNA’를 가지고 있는 진보 진영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제도라는 제도·가치를 공유하는 미국·일본에는 고자세이고, 북한·중국에는 저자세로 일관한다.
‘이중잣대’도 빠트릴 수 없다. ‘국민의 안전’을 명분으로 일본 후쿠시마(福島) 원전 방류수 문제에는 목소리를 높인다. 비(非)과학적인 괴담 유포도 서슴지 않는다. 반면 서해를 두고 마주한 중국 원전의 삼중수소 방출 문제는 외면하거나 침묵한다. 지난날 “양키 고 홈!”, “미군 철수!”, “미제 반대!”를 외치고 일본을 여전히 왜구 취급하는 이들은 중국 앞에선 얌전한 양(羊)이 된다. 중국과 한국은 공동운명체라고도 한다. 북한에겐 ‘삶은 소대가리’ 취급을 당해도 “우리 민족끼리”는 변치 않는다.
이른바 한국의 진보는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던 조선시대에서 탈피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DNA에 중화 사대주의가 각인돼 있다고도 하겠다. 즉 문재인 전 대통령은 중국을 ‘대국’, ‘높은 산봉우리’라고 치켜세우고 자국(自國)을 ‘작은 나라’라고 하면서 중국몽을 함께하겠다고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중국을 말에, 한국을 말 궁둥이에 붙어가는 파리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들을 기억한다면 한국 제1야당 대표가 중국대사를 배알(拜謁)하여 훈계(訓戒)를 들었던 지난주 회동은 소중화 의식이 한 단면을 표출한 것이다. 이런 인식에서 이재명 ? 싱하이밍의 만남은 외교적 참사가 예견된 만남이었다.
4. 중국의 한국 경시: 한국에는 부국장급 대사 북한에는 차관급 대사
‘이재명-시진핑 회동’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 문제는 격(格) 논란이다. 주한 중국대사 격 논란은 초대 대사 시절부터 현재 제8대 싱하이밍 대사까지 끊이지 않는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중국은 주한대사로 외교부 부국장~국장급 인사를 보내고 있다. 반면 한국은 장·차관급 인사를 파견하고 있다.
중국은 혈맹(血盟)으로 치부하는 북한에는 국무원 외교부 부부장(차관)이나 중국공산당 중앙대외연락부 부부장을 대사로 파견하고 있다. 2023년 2월 주북한 대사로 부임한 왕야쥔(王??)도 전직 중국공산당 중앙대외연락부 부부장을 역임했다. 이 점에서도 중국의 한국 경시는 드러난다.
싱하이밍은 국무원 외교부 아주사(亞洲司) 부사장(부국장)을 역임했다. 이후 주 몽골 대사를 거쳐 2020년 서울에 부임했다. 당시 외교부 내 서열은 주베트남 대사와 비슷한 정도였다.
주한 중국대사관 내부적으로도 국방무관(國防武官)보다 서열이 낮다는 분석도 있다. 형식상 대사 아래 공사급 예우를 받는 왕징궈(王京國) 국방무관은 인민 해방군 소장(少將)이다. 군 조직 축소의 일환으로 종전 5성 장군인 원수(元帥), 4성 장군인 1급 상장(一級上將) 계급을 폐지하고 상장-중장-소장으로 장성급 장교 계급을 개편한 인민 해방군에서 소장의 위상은 한국 2성 장군 이상이다. 소장과 상교(上校) 사이 계급인 대교(大校·상급 대령)가 사단장·부군단장 보직을 맡는다.
싱하이밍은 한국 주재 4강 대사와 비교해도 격이 떨어진다. 필립 골드버그(Philip S. Goldberg) 미국 대사는 ‘경력 대사(career ambassador)’이다. 국무부는 ‘재외공관장’으로 부임할 수 있는 고위 외교관을 참사관, 공사참사관, 경력 공사, 경력 대사 등 4단계로 분류한다. 그중 직업 외교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으로 군(軍) 4성 장군(대장)에 해당한다. 아이보시 고이치(相星孝一) 일본 대사도 재외공관장을 두 번 지낸 베테랑이다. 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대사, 외무성 대신관방(大臣官房) 심의관, 영사국장, 이스라엘 대사를 역임했다. 일본 성청(省廳)에서 ‘국장’은 관료의 최고봉인 사무차관에 이은 고위직이다. 안드레이 클릭(Andrey Kulik) 러시아 대사는 외교관 경력만 40년이다. 외교부 아시아 1국 부국장·국장을 역임했다. 2018년 최고등급 외교관인 ‘1급 특명전권대사’로 승진했다.
요약하자면, 싱하이밍은 한국 주재 4강 대사 중 ‘급’이 가장 떨어지는 대사임에도 기세등등함은 제일인 셈이다.
5. 미국 대사는 4성(星) 장군급, 대사관 무관(武官)보다 서열 밀리는 싱하이밍
논란을 빚은 파트너 이재명 대표는 대통령-국회의장-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국무총리-중앙선거관리위원장-여당 대표에 이은 국가 의전 서열 8위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원내 1당인 점, 지난해 대선 때 윤석열 대통령과 불과 0.73% 포인트밖에 적지 않았던 득표율 등을 감안하면 실제 위상은 더 높다 하겠다.
이를 고려하면 중국 외교부 ‘심의관급’에 불과한 싱하이밍의 대사관저를 예방(禮防)하는 형식으로 방문하여 한국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훈계를 일방적으로 들었다는 것은 중화 사대주의의 연장선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를 보고 구한 말 감국대신(監國大臣)을 자칭하며 위세와 횡포를 부리던 위안스카이(袁世凱)에 굴종하고 모욕당하던 조선 대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일까.
싱하이밍의 공식 직책은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의 약칭 ‘대사(大使)’이다. 지난날 ‘대국사신(大國使臣)’의 줄임말이 아니다. 이재명 대표도 대한민국 제1야당 대표이지, 위안스카이에게 굴욕을 당하던 조선 대신(大臣)이 아니다.
청에 굴욕과 내정간섭을 당하던 구한말 우리 조상들은 모금을 해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다. 한국의 현실은 제2의 독립문을 세워야 할 형편이다.
1980년대에 태어나 글로벌 중추 국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중화제국의 속국 ‘후기조선’에 살고 싶지 않다. 윤석열 정부는 ‘가치’ 외교를 내세웠다. 그 점에서도 공산주의에 중화주의가 결합된 중국은 한국의 파트너가 될 수 없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는 것처럼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 정부는 중국이 주장하는 ‘중국몽’의 핵심은 중화주의에 바탕을 둔 질서 회귀라는 점을 다시 한번 직시하고 중국의 횡포와 무례에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