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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un Brief [가습기살균제 판결에 비친 화학물질 규제의 민낯] 통권176호
 
2021-01-25 16:5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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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un Brief 통권176호 


곽노성 한선재단 기술혁신연구회 부회장, 전 식품안전정보원 원장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살균제 성분인 CMIT·MIT가 위해하다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터질게 터졌다. 사실 환경부는 위해 여부를 판단하는 위해성 평가를 하지 않았다. 과학적 평가보다 규제 강화로 화학물질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정부의 접근은 우리 소재산업에도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사망사건에 대한 확실한 처벌을 위해 정부는 국내외 전문가로 구성된 위해성 평가 위원회를 출범시켜야 한다. 이번 기회에 위해성 평가 업무를 태만히 한 환경부에 대한 감사원 감사가 필요하다.

 

1. 가습기살균제 무죄 판결

 

지난 12일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의 1심 판결 결과가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장판사 유영근)SCK케미칼 전 대표와 애경산업 전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과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 성분 가습기살균제 사용과 이 사건 폐질환 및 천식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라는 이유에서다.

재판부는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한 사회적 참사였고 이를 바라보는 심정은 안타깝고 착잡하기 그지없다. 재판부가 2년 동안 심리한 결과 CMIT·MIT 살균제는 유죄판결을 받은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등과는 성분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 추가 연구결과가 나오면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모르겠지만 재판부로선 현재까지 나온 증거를 바탕으로 형사법의 근본적 원칙 범위 내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 판결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물론 관련 전문가들의 큰 반발을 가져왔다. 피해자들은 내 몸이 증거라며 강하게 항의하고 있다. 재판 과정에 참여한 안전성평가연구소 이모 박사는 물론 한국환경보건학회와 관련 대학교수들도 반박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과학자로서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던 것이지 CMIT·MIT와 폐질환의 인과관계가 없다고 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유해하지 않다고 판단한 2015년 식약처 연구결과도 실험 조건을 달리했더라면 분명 위해하다는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20일 환경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도 가습기 살균제 무죄 판결은 주요 관심사였다. 법원이 환경부의 피해자 등급 판정을 사실상 인정하지 않은 셈이 되었다.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는 민주당 국회의원의 질문에 장관 후보자는 형사재판이다 보니 정부가 피해 구제를 좀 더 폭넓게 한 것과 비교해 원인관계를 명확히 따져야 했던 것 같다기존 소형 동물 실험이 아닌 중형 이상의 동물에 대해 동물 실험의 원칙을 지켜가며 실험을 진행해 공소 유지가 제대로 될 수 있도록 보조할 것이라고 답했다.

과연 그럴까? 환경부가 동물실험을 더 하면 법원에서 부족하다고 판단한 과학적 근거가 나올까? 상급심에서는 법원이 환경 전문가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가습기살균제 제조사 대표에게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럴 것 같지 않다. 환경부 장관 후보자는 물론 이번에 목소리를 내는 전문가도 이런 상황이 발생한 원인을 모르고 있다.

 

2.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CMIT·MIT 규제

 

지금 CMIT·MIT가 위해하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역학조사 결과다. 보건복지부는 가습기 살균제 사용과 피해발생의 인과관계를 공식 확인했다. 환경부는 지금까지 CMIT·MIT의 위해성 평가 결과를 공식 발표한 적이 없다. 이를 정리해보면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사람에게 피해는 발생했는데 그게 CMIT·MIT 성분 때문인지는 모른다.

환경부가 CMIT·MIT의 위해성을 모른다는 걸 확인해주는 사례가 있다. 바로 2019년 해외 직구 세정제 경고다. 소비자원은 사용이 금지된 CMIT·MIT 성분을 함유한 세정제를 소비자들이 해외직구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된 제품은 미국과 독일에서 합법적으로 판매되는 제품이다. 실제 선진국에서는 CMIT·MIT 성분의 위해성을 높게 보지 않는다. 우리는 사용을 금지하지만 유럽연합에서는 주의표시만 하면 된다. 미국과 일본은 별도의 제한 규정도 없다. 물론 잠시 사용하는 세정제와 장시간 사용하는 가습기 살균제를 동일 선상에서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미국, 유럽연합, 일본 정부 모두가 잘못 판단한 게 아니라면 지금 우리 정부는 CMIT·MIT 성분을 과잉규제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번 판결은 결국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확인된 지 이제 10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함유 성분의 위해성을 판정하지 못한 게 현재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다.

 

3. 과잉규제가 미치는 산업적 악영향

 

과학적 근거보다 과도한 규제강화로 화학물질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관행은 우리 산업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2019년 한일 무역 분쟁은 소재 산업에서 국가 경쟁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했다.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서 시작한 이 분쟁은 일본 정부의 반도체 생산 3대 핵심 소재(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화 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수출 규제로 이어졌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기업은 연구개발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작년 일본은 코로나로 인해 발생한 무역적자를 한국 수출 흑자를 통해 메꿨다. 흑자발생 분야는 반도체 제조장비와 부품·소재다.

우리 소재산업계에서 규제개혁을 요구하는 대표적 분야가 화평법(바로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이다. 우리나라 규제는 전 세계에서 제일 강하다. 심지어 우리나라 규제의 모태가 된 유럽연합보다 더 세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연간 0.1톤 이상 사용하는 신규 화학물질을 등록해야 한다. 반면 일본과 유럽연합은 1톤 이상 사용하는 경우에만 등록한다. 일본 기업은 정부에 유해성 평가 결과만 제출하면 된다. 우리 기업은 유해성과 함께 위해성 평가 결과를 모두 제출해야 한다.

유해성과 위해성은 다르다. 유해성(hazard)이 화학물질이 얼마나 독한지만 판단한 것이라면 위해성(risk)은 그런 화학물질에 우리가 얼마나 노출되는 지까지 고려한 것이다. 아무리 독하더라도 우리가 노출되지 않는다면 위해성은 낮다. 반면에 유해성(독성)은 덜하더라도 우리가 자주 많이 노출되면 위해성은 올라간다.

선진국 정부는 위해성 평가를 근거로 화학물질을 허가물질, 제한물질, 중점관리물질로 지정한다. 기업에서 유해성 자료만 받는 일본도 정부가 위해성 평가를 한다. 반면 우리 정부는 유해성 자료만으로 평가한다. 사실 환경부는 위해성 평가를 할 능력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기업이 열심히 제출하고 있는 위해성 평가 자료는 어떻게 활용되고 있을까? 그대로 사장되고 있다.

화평법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규제가 강해도 정부가 운영을 하면 문제를 확인하고 보완할 수 있다. 그런데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어디가 과잉 규제인지, 어느 규제를 더 효율화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소재기업은 선진국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쟁하고 있다.

 

4. CMIT·MIT 위해성 평가 실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는 많은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런 사고를 낸 기업은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근거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감정에 쏠려 처벌할 수는 없다. 객관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 성분 위해성 평가 위원회를 출범시켜야 한다. 과학자도 사람인지라 다들 생각이 다르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모여서 의견을 모은다. 과학적 평가는 정치처럼 각자의 생각을 조금씩 양보하는 방식은 아니다. 과학적 논리에 따라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판단을 분리하는 작업이다.

위원회는 과학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전문가로 구성해야 한다. 환경부가 운영하는 화학물질평가위원회(화평법)처럼 행정직 공무원이 주도하면 곤란하다. 여기에는 이번 가습기 살균제 사고에서 입장을 표명한 전문가들이 들어가야 한다. 다만 그분들만으로는 곤란하다. 시각이 다른 전문가도 포함시켜야 한다. 화학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인 만큼 환경보건보다는 화학독성 전문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위원회에는 국제적 권위를 갖는 외국인 전문가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들이 필요한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우리나라는 화학물질의 위해성 평가 경험이 부족하다. 식품첨가물이나 농약?동물용의약품처럼 국제적으로 평가 방식이 잘 정립된 물질은 평가경험이 많지만 다른 화학물질에 대한 평가 경험은 매우 부족하다. 사실 선진국이라고 다 하는 것도 아니다. 미국과 유럽연합 정도가 주도하고 다른 국가는 이들 평가 결과를 사실상 준용한다.

또 다른 이유는 평가 결과에 대한 국민들의 수용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2017년 정부는 살충제 계란에 대한 위해성 평가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과학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물론 학회의 반응이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정부 주도 평가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부정적 반응은 선진국에서도 발생하지만 우리는 유독 심하다.

해외 전문가 참여를 통해 이러한 논란을 불식시킨 사례가 바로 포항지진 원인조사다. 2017년 발생한 포항지진의 원인이 지열발전소인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정부는 원인조사를 위해 대한지질학회를 중심으로 구성한 조사연구단과는 별도로 해외전문가로 구성된 해외조사위원회를 운영했다. 이 위원회는 자칫 정치적 논란이 될 수 있었던 조사결과의 객관성을 보증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5. 환경부 대상 감사원 감사

정부의 화학물질 규제, 화평법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지금 기업은 화평법을 지키기 위해 많은 부담을 감수하고 있다. 이런 노력이 실제 화학물질 안전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면 지속해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기업이 제출한 많은 자료가 사장되고 있다면, 그게 정부의 능력 부족 때문이고 당분간 개선될 가능성이 없다면 그런 규제부담은 줄여 주는 게 당연하다.

이를 위해서는 환경부의 화평법 규제 운용 실태에 대한 감사원 감사가 필요하다. 화학물질 안전 규제는 원자력 발전처럼 이미 정치쟁점화, 이념화 된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행정부 자체적으로는 공정하게 실태를 조사하기 어렵다. 해결방법은 감사원 감사뿐이다. 감사원은 원전의 경제성 평가 결과 조작을 밝혀냈고 지금은 탈원전 정책 수립 과정에 대한 감사를 진행 중이다. 환경부가 화평법이 제대로 집행되고 있는지, 만일 하고 있다면 왜 유럽연합이나 일본처럼 평가 결과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지, 정말 기업이 제출한 위해성 평가 결과는 사장되고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

환경부는 이번 일을 계기로 솔직해져야 한다. 현행 화평법을 제대로 운영하기 어렵다면 우리 역량에 맞춰서 제도를 재설계해야 한다. 당장 위해성 평가를 하기 어렵다면 선진국의 평가 자료를 활용하면 된다. 대신 가습기살균제처럼 선진국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제품이 생산되는지 모니터링하는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그것만 잘해도 충분히 우리 국민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 정부도 하지 못하는 위해성 평가를 기업에 요구하는 잘못을 더 이상 범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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