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를 막았지만… 중국이 너무 커 버렸다
2018년 미·중 무역전쟁 이후 미국이 중국을 향해 꺼내 든 카드는 다양하고 전면적이었습니다. 화웨이(華爲) 제재와 고율 관세를 시작으로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의 중국 수출을 제한했고, 고성능 AI 칩 수출도 막았습니다. 미국 기술·소프트웨어·장비를 이용해 제조했다면, 제3국 제품까지 통제하는 해외직접제품규칙(FDPR)도 동원했습니다.
미국의 계산은 중국이 첨단산업으로 올라가는 ‘기술의 사다리’를 걷어차면 추격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첨단 반도체와 장비를 차단당한 중국은 오히려 ‘미국 기술에 계속 의존해서는 안 된다’라는 국가적 위기의식을 갖게 되면서 중국은 반도체·AI·로봇을 중심으로 자체 기술을 고도화하고 장비와 제품의 국산화를 서두르게 하는 압력으로 작용했습니다.
미국의 봉쇄는 중국에 기술 자립을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만들었습니다. 중국은 ‘신질생산력(新質生産力)’을 앞세워 반도체·AI·로봇·전기차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미국이 기술의 사다리를 걷어차자, 중국은 자기 사다리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표적인 기업이 화웨이·중신궈지(SMIC)·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북방화창(NAURA) 등입니다. 특히, 중국이 가장 취약했던 D램 분야에서 성장한 CXMT는 이제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이 장악해 온 메모리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은 더 이상 ‘세계의 공장’이 아니다
미국이 중국을 막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 산업의 구조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저임금 노동력으로 저가 상품을 생산하는 세계의 공장이 아니라, 소재·부품·장비에서 완제품·물류·시장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제조업 생태계가 중국 안에서 돌아갑니다.
미국의 기술·수출 통제가 중국 기업의 국산화와 자체 기술개발을 촉진해 전기차·배터리·태양광·드론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이미 확보했고, 그 전선은 반도체·AI·휴머노이드 로봇으로 빠르게 넓어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경쟁력은 몇몇 스타 기업에서만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선전·상하이·쑤저우·허페이·항저우 같은 첨단 산업도시를 중심으로 부품업체와 연구 인력, 자본과 시장이 촘촘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미국이 시장을 막아도 우회로는 많다
2025년 중국의 대미 수출은 약 20% 감소했지만, 중국의 전체 상품 수출은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2025년 상품 수출은 26조9890억위안으로 전년보다 6.1% 늘었고, 무역흑자는 1조2000억달러에 육박해 사상 최대를 기록했습니다. 미국으로 향하지 못한 중국 상품이 동남아·유럽·아프리카·중남미 등 다른 시장과 우회 수출로 방향을 돌린 결과입니다.
따라서 미·중 경쟁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중국을 봉쇄하는 게임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미국의 강력한 무기가 반도체와 AI 기술이라면 중국에는 희토류와 핵심 광물 공급망이라는 카드가 있습니다.
중국은 세계 희토류 채굴의 약 70%, 분리·정제의 약 90%, 희토류 영구자석 생산의 90% 이상을 차지합니다. 2025년 중국의 희토류 관련 수출 통제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과 일본에도 공급망의 취약성을 다시 확인시켰습니다.
물론 희토류가 중국의 영원한 무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미국과 동맹국도 공급망 다변화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미·중 경쟁이 미국이 일방적으로 중국을 압박하기만 하는 게임이 아니라는 점만큼은 분명합니다.
미국의 착각, 소련식 완전봉쇄는 불가능하다
미국의 가장 큰 오판은 중국을 과거 소련처럼 봉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을지도 모릅니다. 냉전 시대 소련은 서방 자본주의 경제와 상당 부분 분리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지난 40여 년 동안 세계 무역과 글로벌 공급망의 한복판에서 뛰어온 나라입니다.
중국을 세계 경제에서 떼어내려면 중국만 비용을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 기업은 물론 유럽·일본·한국 등 미국의 동맹국도 상당한 비용을 부담해야 합니다. 중국은 세계 경제 안에 깊숙이 들어와 미국과 경쟁하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과거 미·소 냉전과 오늘날 미·중 경쟁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한국은 눈치 볼 때가 아니다
미국의 대중국 기술 통제로 한국 기업이 적지 않은 반사이익을 얻었습니다. 미국은 한국이 받은 이익을 돌려받는 수단으로 미국 투자를 강제하고 있고, 중국도 언젠가 우리에게 산장(算帳; 빚 청산)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은 미·중 기술 패권 경쟁에서 ‘어느 편이 이기는가’라는 시각으로 눈치를 보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안전한 길은 미국과 중국 모두가 지속적으로 한국이 필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두 강대국이 ‘왜 한국이 필요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도록 해야 합니다.
한국은 이미 경쟁력을 확보한 반도체·조선·방산 등의 분야에서 다른 나라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초격차 기술을 확보하고 공급망의 길목을 차지해야 합니다. AI·첨단소재·배터리·원전 등에서도 ‘한국을 빼고는 공급망이 완성되지 않는 영역’을 더 많이 확보하는 전략이 시급합니다.
한국은 미국에도 필요하고 중국도 무시할 수 없는 나라, 강대국조차 함부로 대체할 수 없는 나라가 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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