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선 칼럼

  • 한선 브리프

  • 이슈 & 포커스

  • 박세일의 창

[파이낸셜투데이] ‘도덕적 해이’ 우려는 '선동'이 아니다
 
2026-07-21 16:59:37
◆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는 한반도선진화재단 정치개혁연구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15일 “갚을 수 없는 빚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사회로부터 격리돼서 경제 활동을 못 하고 사회 공동체 전체가 손해를 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전향적인 채무 탕감 대책을 주문했다. 그러면서 “탕감을 늘리면 성실히 빚을 갚을 유인이 줄어든다”는 ‘도덕적 해이’ 논란을 두고는 “무책임한 선동”이라고 일축했다. 누구도 경제적으로 재기가 불가능한 사람에게 새로운 출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현대 복지국가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하며, 금융위기나 코로나19와 같은 국가적 위기 속에서 채무 조정과 채무 탕감은 이미 세계 여러 나라가 활용해 온 정책 수단이다. 문재인 정부는 장기 소액 연체자 159만 명의 채권을 소각했고, 윤석열 정부는 코로나 피해 소상공인의 빚을 감면했다.

문제는 정책의 필요성과 정책을 둘러싼 비판을 동일시하는 데 있다.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는 특정 정치세력이 만든 정치적 프레임이 아니다. 경제학과 금융학에서 오랫동안 축적된 핵심 개념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케네스 애로와 조지 애컬로프가 발전시킨 정보 비대칭 이론에서도 도덕적 해이는 시장 실패를 설명하는 핵심 변수로 다뤄진다. 보험, 금융, 복지, 공적 지원 정책을 설계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위험 요인이다. 따라서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정책을 방해하려는 정치적 선동이 아니라 정책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필수적인 검증 과정이다.

공공정책은 언제나 선의만으로 성공하지 않는다. 선의와 함께 행동을 유도하는 인센티브 구조가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만약 국민들이 “결국 빚은 갚지 않아도 국가가 해결해 준다”는 신호를 받는다면 일부에서는 과도한 차입이나 상환 회피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금융기관은 이를 위험으로 판단해 대출 심사를 강화하거나 금리를 인상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성실하게 채무를 상환해 온 국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다. 매달 생활을 줄여가며 빚을 갚은 사람들에게 채무 탕감은 ‘성실한 사람이 손해 보는 사회’라는 인식을 심어줄 위험이 있다. 공공정책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과 성실하게 책임을 다한 사람을 보호하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해야 한다. 어느 한쪽만 강조될 경우 정책은 사회적 정당성을 잃게 된다.

그러나 이번 논란의 핵심은 민주주의 기본 원칙에 있다. 민주주의는 찬성과 반대가 자유롭게 경쟁하는 체제이며, 정책은 토론을 통해 완성된다. 정책 비판은 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장애물이 아니라 정책의 완성도를 높이는 안전장치다. 대통령이 반대 의견을 ‘선동’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정책 토론은 위축되고 공론장은 급격히 좁아질 위험이 있다. 이러한 우려는 최근 국무회의에서도 드러났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부동산 정책과 관련한 의견을 제시하려 하자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이를 제지한 장면은 정책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이 얼마나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 국무회의는 대통령의 지시를 전달하는 자리가 아니라 헌법이 규정한 최고 정책심의기구다. 다양한 의견이 충돌하고 조정되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모습이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반증 가능성’을 제시했다. 어떤 정책도 비판받을 수 있어야 하며, 그 비판을 통해 더 나은 정책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 역시 『자유론』에서 틀린 의견조차 진실을 더욱 분명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고 강조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정책의 정당성은 권력자의 의지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 과정에서 나온다고 설명했다. 민주주의는 동의를 강요하는 체제가 아니라 이견을 제도적으로 수용하는 체제다.

조직 행동론에서도 같은 결론이 나온다. 어빙 재니스의 ‘집단사고(Groupthink)’ 이론은 최고지도자가 반대 의견을 충분히 허용하지 않을 때 조직 구성원들이 자기검열을 하게 되고, 결국 정책 실패 가능성이 크게 높아진다고 분석한다. 정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세계적 지도자들은 오히려 반대 의견을 정책 자산으로 활용했다. 링컨은 “나와 다른 사람도 국가를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고, 독일의 메르켈 전 총리는 대형 정책을 추진할 때마다 반대 논리를 적극 검토하며 정책을 수정했다. 강한 지도자는 비판을 제거하지 않는다. 비판을 통해 정책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채무 탕감 정책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국민을 설득하려면 도덕적 해이 자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지원 대상은 어디까지인지, 반복 지원은 어떻게 차단할 것인지, 성실 상환자에게는 어떤 인센티브를 제공할 것인지, 금융시장 불안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국민은 답을 듣고 싶어 한다. 정책의 성공은 선의의 선언이 아니라 설계의 정교함에서 결정된다.

정치는 선의만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정책에는 철학이 필요하고, 철학에는 검증이 필요하며, 검증에는 비판이 필요하다. 도덕적 해이는 선동이 아니라 정책 설계에서 반드시 검토해야 할 위험 변수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 정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을 더욱 완성도 높게 만드는 출발점이다. 대통령의 언어는 반대 의견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설득하는 것이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이 원하는 것은 비판을 침묵시키는 정부가 아니라 비판을 통해 더 나은 정책을 만드는 정부다. 그것이 신뢰를 축적하는 정치이며 지속 가능한 국정운영의 출발점이다.


칼럼 원문은 아래 [원문 보기]를 클릭하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목록  
번호
제목
날짜
2737 [파이낸셜투데이] ‘도덕적 해이’ 우려는 '선동'이 아니다 26-07-21
2736 [문화일보] 청년 일자리 못 만들면 3% 성장도 공허 26-07-20
2735 [문화일보] 자유민주 통일 의무 일깨우는 제헌절 26-07-16
2734 [라이센스뉴스] 부동산 가격 폭등, 해법은 무엇인가 26-07-10
2733 [문화일보] 보완수사권 폐지는 헌법 12·27조 위배 26-07-09
2732 [신동아] 북한을 조선이라 불러선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 26-07-03
2731 [머니투데이] 개혁 없는 정년연장, 누구의 공정인가 26-07-01
2730 [파이낸셜투데이] 데드크로스가 울린 경고등 26-06-30
2729 [아시아투데이] 경제가 식는데 세금만 가열되는 풍경 26-06-29
2728 [아시아투데이] 호국보훈의 달에 통일을 생각한다 26-06-25
2727 [세계일보] 세금 올린다고 집값이 잡힐까 26-06-24
2726 [문화일보] 초과이익보다 ‘초격차’에 집중할 때 26-06-23
2725 [조세일보] 부동산 문제, 결국은 공급으로 풀어야 한다 26-06-19
2724 [한국경제] 중국 '은발경제'의 명암…한국기업 공략처는? 26-06-19
2723 [아시아투데이] ‘안녕이라고 했어’ 26-06-16
2722 [이데일리] 하나의 시계로 잴 수 없는 노동시간 26-06-16
2721 [매일신문] 깨진 유리창과 무너지는 신뢰 26-06-16
2720 [머니투데이] 정년 연장, 숫자 말고 구조를 설계하라 26-06-10
2719 [중앙일보] ‘전세 절벽’이 출산 기피로 가지 않게 하려면 26-06-02
2718 [한국경제] 올해 중국 소비는 살아날 수 있을까 26-05-27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