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선 칼럼

  • 한선 브리프

  • 이슈 & 포커스

  • 박세일의 창

[중앙일보] ‘전세 절벽’이 출산 기피로 가지 않게 하려면
 
2026-06-02 08:52:33
◆ 손숙미 한반도선진화재단 양성평등위원회 위원장의 칼럼입니다

한국사회의 결혼문화는 오랫동안 완성형 결혼을 지향해 왔다. 적어도 전세 이상의 번듯한 신혼집, 남부럽지 않은 혼수,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삼박자를 갖춰야 결혼 문턱을 넘을 자격을 갖췄다고 믿어왔다. 결혼에 대한 이런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지만, 한국인들의 심리 저변에는 기존 관념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다. 삼박자 조건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장벽은 주거 문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 한국에만 존재하는 전세 제도는 그동안 서민들이 매달 치르는 주거 비용을 아껴 자산을 형성하도록 돕는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이 사다리는 갭투자가 성행하면서 집값 상승의 불쏘시개가 됐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재명 정부의 대출 규제와 토지거래허가제 확대 조치는 투기 수요 억제를 겨냥했지만, 시장에서는 전세 매물 실종과 전셋값 급등이라는 전세 절벽을 초래했다. 전세·월세·매매 가격이 동시에 급등하는 트리플 급등으로 곳곳에서 아우성이다.

 

전세 제도가 구조적인 소멸 수순에 접어들고, 보유세 부담이 커지면서 임대인들은 안정적인 현금 확보를 위해 전세를 월세로 속속 전환하고 있다. 실제로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 1분기에 전·월세 거래 중에서 월세 비중은 68.3%를 기록해 전세의 월세화 속도가 매우 빠르다. 신혼부부 임차 가구 중에 전세 거주 비율은 전세 사기 우려, 대출 규제, 신규 입주 물량 부족으로 감소하고 있다. 반면 월세 거주 비중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선진국 중에 결혼할 때 반드시 내 집이나 그에 준하는 주거를 마련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한국처럼 강하게 느끼는 나라는 드물다. 서구와 일본에서는 월세로 시작해 자산을 모아 첫 집(Starter Home)’을 사고, 점진적으로 집을 키워가는 성장형 결혼이 보편적이다.

 

한국은 유독 남성에게 주거 마련의 책임을 무겁게 지운다. 결혼을 앞두고 신랑이 적어도 아파트 전세는 장만해야 한다는 사회적 눈높이는 남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고, 여성들에게도 높은 진입 장벽이 된다. 원룸이나 빌라에서 시작하는 것을 실패나 고생으로 치부하는 문화적 인식, 보여주기식 체면 문화는 청년들을 완성형 결혼으로 몰아가게 된다. 전세가 사라지고 월세 중심의 임대 시장으로 재편되면, 당장 결혼식 직후에 필요한 거액의 목돈 부담은 줄어들 수 있다. 수억원의 전세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결혼을 미루던 커플들에게는 어쩌면 일단 시작할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다. 소득의 상당 부분이 월세로 빠져나가는 구조에서 주거 불안은 근본적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청년들은 일단 결혼하더라도 출산은 장기간 기피할 수 있다. 자산 형성이 힘든 구조에서 높은 월세부담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결혼에 대한 인식을 바꾸라는 당위론적 충고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어렵다. 신혼부부가 원룸이나 소형 임대 주택에서 시작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가 정착되려면, 정부와 사회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달성해줘야 한다.

 

첫째, 집값의 장기 하향 안정화다. 지금 안 사면 평생 못 산다는 공포가 지배하는 시장에서는 누구도 성장형 결혼을 선택하기 어렵다. 집값이 안정돼야 천천히 돈을 모아 집을 사겠다는 계획이 유효해진다. 둘째, 고품질의 장기 공공임대주택 공급 확대다. 직장·거주지 근접성이 높고 교육 환경이 양호한 곳에 민간 아파트 못지않게 품질 좋은 임대주택을 대거 공급해야 한다. 청년들을 위한 월세 지원금제도도 현실화해야 한다. 셋째, 생애주기에 맞춘 주택담보대출(모기지) 설계가 필요하다. 청년기엔 임대주택에서 저렴하게 거주하며 자산을 축적하고, 중장기 저리 모기지를 이용해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는 선진국형 주거 사다리가 확보돼야 한다.

 

전세 절벽은 한국사회에 고통스러운 숙제를 던졌다. 하지만 이 위기는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가 그동안 매달려 온 보여주기식 결혼과 부동산 투기적 주거 문화를 청산할 기회이기도 하다. 결혼이 준비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함께 일궈가는 여정이라는 인식이 확립돼야 한다. 6·3 지방 선거에 출마한 단체장 후보들이 누구보다 깊이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칼럼 원문은 아래 [원문 보기]를 클릭하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목록  
번호
제목
날짜
2719 [중앙일보] ‘전세 절벽’이 출산 기피로 가지 않게 하려면 26-06-02
2718 [한국경제] 올해 중국 소비는 살아날 수 있을까 26-05-27
2717 [문화일보] 가계빚 2000조, 금융 넘어 성장 발목 26-05-26
2716 [문화일보] 노봉법·성과급 ‘교차효과’ 심각하다 26-05-26
2715 [문화일보] 성과급 리스크 화근도 노봉법에 있다 26-05-22
2714 [매일신문] 이념의 벽을 넘은 '불안의 정치화' 26-05-20
2713 [아시아투데이] 주식 온기보다 부동산 냉기가 무서운 이유 26-05-15
2712 [이데일리] 기업별 교섭의 명암 26-05-13
2711 [파이낸셜투데이] 선거는 ‘관전’이 아니라 ‘판단’이다 26-05-08
2710 [라이센스뉴스] 원화 약세는 한국 경제의 민낯 26-05-06
2709 [아시아투데이] 통일부의 존재 이유, “그것은 통일” 26-05-06
2708 [서울신문] 집단소송법, 헌법적 한계 지켜야 26-05-04
2707 [한국경제] 중동발 에너지 쇼크와 중국의 신에너지 산업 26-05-04
2706 [문화일보] 권력 방패용 특검은 반민주 도구일 뿐 26-04-30
2705 [문화일보] 정부의 북한→조선 변경 발상은 反헌법 26-04-30
2704 [문화일보] AI 인재전쟁과 ‘대학 생태계’ 대전환 26-04-24
2703 [세계일보]삼성노조 파업, 반도체 산업 ‘왝더독’ 되나 26-04-24
2702 [이데일리] 해고가 죽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26-04-23
2701 [한국일보] 대기업 노조의 성과 배분 투쟁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악화 26-04-22
2700 [매일신문] 감정 지형이 지배하는 선거 26-04-21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