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론직설] 박재완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포퓰리즘 기승에 '대중독재' 조짐…투표권없는 미래세대 짐
선거 전 공약 검증하도록 소요재원·조달방안 공개 제도화를
재정·교육·에너지는 백년대계…10년임기 독립위 설치 필요
코로나추경, 야당 협조하고 정부는 시장자율·창의성 높여야
지난 21일 박재완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전 기획재정부 장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에 재단 행사가 취소돼 인터뷰 장소와 시간을 조정하자는 연락이었다. 21일은 그가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된 날. 그는 “글로벌 기업은 사외이사가 숫자도 많고 의장을 맡기도 한다”며 “삼성전자도 그렇게 진화해나가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개혁보수를 기치로 내건 싱크탱크를 이끄는 박 이사장을 24일 만났다.
-재단은 합리적 개혁보수를 지향한다. 하지만 제3의 길은 주류가 되지 못했다. 왜 그런가.
△제3의 길은 대선에서 이긴 적이 없고 총선에서도 제2당으로조차 발돋움한 적이 없다. 우리 사회의 지나친 쏠림현상과 연관돼 있다고 본다. 심정적으로는 중도이면서도 선거 막판에는 진영논리를 좇는 경향이 있다. 어릴 때부터 선과 악의 개념에 익숙하다 보니 중도의 입지를 위축시키는 풍토를 낳았다.
-기존 보수진영의 문제는 뭔가.
△보수는 건국과 산업화 외에 민주화에도 공이 있다. 굳이 따진다면 공과는 70대30 정도랄까. 보수는 사회적 약자 보호와 인권 같은 문제에 다소 소홀한 측면이 있다. 불균형 성장의 폐해도 있었다. 이런 과오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었고 혁신의 길을 제시하는 노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취약계층으로부터 ‘믿을 수 있다. 표를 줘도 괜찮다’는 신뢰를 잃었다.
-그럼 진보의 문제는.
△위정자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는 아니더라도 공인의식이 미흡한 것 같다.
-교수· 공직자 입장에서 조국 사태를 어떻게 보나.
△특정인 이름을 들먹이지 않도록 교육받았다. 설령 고소당하더라도 맞고소하지 말라고 배웠다. 사람을 꼭 집어서 얘기하기는 곤란하다. 뭔가 특별했던 것 같다.
-특별하다는 의미는.
△부끄러움이 없지 않나. 설령 억울한 점이 있더라도 공인이라면 국민의 심려를 끼친데 사과해야 옳았다. 그래서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기재부 장관 시절 2012년 총선 공약을 검증했는데.
△해외 사례가 있다. 호주는 총선 때 주요 정당의 공약에 대해 재무부가 추정 재원을 조사해서 발표한다. 선심·날림 공약을 줄이려면 주요 선거 전 각 정당의 공약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하고 공약의 소요 재원과 재원조달 방안을 검증받도록 해야 한다.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공약을 서로 베낀다. 결국 당선 후 공약에 발목을 잡히고 절반이라도 공약을 이행하려다 보면 무리수를 둔다.
-현 정부는 재정투입이 ‘미래세대에 대한 투자’라고 한다. 동의하는가.
△복지지출이 미래세대 투자인 측면이 있기는 하다. 성장에 도움되기도 한다. 보수진영도 그런 시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어디에 투자하느냐가 관건이다. 우리나라는 직업훈련 같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다시 말해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투자는 인색하다. 반면 현금지급이나 재정에 의한 일자리 창출 등 소극적 노동정책의 비중이 아주 높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옛 공산권을 빼고 가장 높다. 새 정부 들어 더 높아졌을 것이다. 어느 지방자치단체장이 ‘청년수당 받아 밥 사 먹는 게 어때서’라고 하는데 이건 아니다.
-청와대의 팽창적 재정정책 주문에 기재부가 ‘노’라고 할 수 있나.
△(답변하기 곤란한 듯 ‘허허’ 웃더니) 국정철학과 기조의 문제다. 관료로서는 받아들 수밖에 없는 상위 지침 아닌가.
-공무원은 영혼이 없는 건가 없어야 하는 건가.
△불법적인 지침이라면 거부해야 하지만…. 직업관료의 숙명이지 않나. 재정관료들이 나라 곳간을 지켜야 한다는 임무가 있지만, 골대가 흔들리면 골문을 지키는 골리(골키퍼)가 그에 맞춰서 옮겨야 하지 않나.
-그렇다면 엘리트 공무원이 왜 필요한가.
△관료들이 아무 역할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국가부채비율 40%라는 골대가 있다고 치자. 장기재정계획이 수립되는 과정은 모르겠으나 관료들이 노력하고 설득해서 골대가 그나마 좀 덜 옮겨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침묵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정권만 바뀌면 정책 뒤집기가 일상화했는데.
△창업을 좋아하고 수성과 경장은 소홀히 하는 정치 풍토의 문제다. 국민 성향에 영합한다고 할까. 정치는 흡사 떴다방에 비유된다. 정당 이름과 색깔은 선거 때마다 달라져도 먹혀든다. 차분하고 합리적인 논의구조가 정착되지 않은 것도 문제다. 이런 데 일조한 게 공직자의 짧은 임기다. 장관·차관은 길어야 3년이고 대개 1년 반이다.
-임기를 늘린다고 정책 일관성이 유지되겠나.
△백년대계를 도모해야 할 정책 분야가 있다. 교육과 재정·에너지다. 이들 분야는 금융통화위원회처럼 정책 중립성을 보장해야 한다. 각 부처와는 별도로 중장기계획을 담당할 특별위원회를 두자는 것이다. 엄격한 자격요건을 두고 임기를 10년 이상 길게 둬야 한다. 그렇게 되면 정권이 바뀌더라도 자신의 명예를 걸고 책임 있는 자세로 일할 것이다.
-정책 뒤집기는 정치에 포획된 결과가 아닌가.
△그렇다. 앞으로가 더 걱정스럽다. 중론(衆論)을 좇는 정치공학이 정론(正論)을 밀어내는 현실이 안타깝다.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려 ‘대중독재’로 비화할 조짐이다. 대중독재는 투표권이 없는 소수, 다시 말해 미래세대에 짐을 떠넘기는 결정을 하기 쉽다.
-정책학자 토머스 다이는 정책의 정의를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했다. 구분한다면.
△경제 분야로 한정한다면 가격 결정 시스템 개입을 최소화하는 일이다. 국가 주도 경제로 되돌아가는 느낌마저 든다. 대표적인 것이 분양가상한제다. 상한제는 로또 아파트를 만들었다. 국민이 집값 상승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더 참기 어려운 것은 로또 아파트로 불로소득을 단기간에 불리는 데 있다. 이게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에 부합하는가.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 시장 자율에만 맡길 수 없지 않느냐.
△강남 문제는 초과 수요 때문이다. 주택공급원인 재건축을 억제한다는 이해가 안 된다. 규제를 완화해서 공급을 확대하되 개발이익을 환수하면 되는 것 아닌가. 재건축개발이익 환수제와 양도소득세가 그런 기능을 한다. 물론 정책 효과의 시차가 있고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와 서울시가 허가를 내주느냐 마느냐, 내 준다면 언제가 좋은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나. 정책 결정 과정이 결코 전지전능하다고 할 수 없다.
-코로나19 사태의 경제적 충격이 일파만파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상황이 너무 엄중하다. 추경 편성은 야당이 양해해야 할 것으로 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재정동원은 일시적 충격에 대처하는 응급처치일 뿐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민간과 시장의 힘을 존중하고 신뢰하면 좋겠다. 국가 주도 경제는 수정해야 마땅하다. 정부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강해서 시장의 자율과 창의성이 위축돼 있다. 제조업 위주 성장 시대에 만든 규범은 전면적인 쇄신과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 사회가 너무 극단으로 치닫는다. ‘넌 틀렸어’. 그렇게 말하면 토론이 안 되고 수렴되지 않는다. 과거 비례대표 후보 시절 토론회에서 상대방의 발언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 중간에 말을 끊고 치고 들어가라고 하더라. 그러면 반대를 위한 반대밖에 안 된다. 상처에 소금 뿌리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 큰 욕 먹지 않고 회색분자로 사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선명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와 공화주의가 발전한다. /권구찬선임기자 chans@sedaily.com
He is…
1955년 마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 23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하버드대 정책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성균관대에서 행정학을 가르쳤다. 교수 시절에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7대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정치인 변신 후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 정무·국정기획수석, 고용노동부·기획재정부 장관을 역임했다. 2014년부터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