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60주기 심포지움 박세일 이사장 토론문 : 몽양, 어떻게 볼 것인가
2007-07-23 14: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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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선생 서거 60주기 학술 심포지움 “몽양 여운형과 평화통일” 토론문
주최: (사)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 사업회
일시: 2007년 7월 19일
장소: 서울 역사박물관
주최: (사)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 사업회
일시: 2007년 7월 19일
장소: 서울 역사박물관
몽양 여운형선생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나는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몽양선생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몽양선생의 삶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과연 무엇인가를 제대로 답할 능력이나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비(非)역사 전문가의 눈에 비친 몽양선생은 어떠한가를 이야기하는 것도 이번 심포지움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하는 설득에 의지하여 내 생각의 일단을 정리하기로 하였다.
우선 이번 세분의 발표 논문 등을 읽으면서 느낀 바는 몽양선생은 대단히 다재다능하고 자유분방하고 호쾌한 풍운아적 지도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민족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러나 상당히 세계화된 열린 민족주의자였다고 보여 진다. 항상 정파적 이익이나 사익보다 민족의 이익을 앞세운 분이다. 그에게 좌우 이념은 민족적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중요한 것은 몽양선생의 삶과 투쟁이 우리에게 주신 교훈이 과연 무엇인가? 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려면 왜 몽양선생의 꿈이 당시에 실현되지 아니했는가를 정확히 규명하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몽양선생의 꿈은 [좌와 우가 하나로 어울리는 통일된 민족의 세상]이었던 것 같다. 몽양선생의 꿈이 과연 당시에 실현 가능한 꿈이고 바람직한 꿈이었는가에 대하여도 여러 가지 논쟁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의 논의에서 생략하기로 한다. 나는 일단 몽양선생의 꿈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러한 순수하고 아름다운 꿈이 왜 실패했는가?
좌절의 첫 번째 이유는 몽양선생께서 세계의 변화의 흐름을 정확히 읽지 못했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는 스탈린 등장이후의 소련 공산당의 변화와 제2차대전이후의 그들의 세계전략의 변화를 읽지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세계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이해는 그가 1920년대 레닌이나 손문과의 만남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 주요 내용이었던 것 같다. 1920년대의 공산주의운동은 [反제국주의 세력]으로서의 공산주의 내지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으로서의 공산주의였다. 그래서 그는 1921년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고 같은 해 레닌을 만나고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는 상호 협조적이지 갈등적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1928년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소련은 전체주의국가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경제적으로는 고도의 중앙집권적 계획경제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자유 없는 공포사회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소련 스스로가 새로운 [적색 제국주의세력]이 되어 갔다. 내부적으로 자유주의나 중도주의는 더 이상 허용될 수 없었고 외부적으로는 새로운 침략적 제국주의 세력이 되어 갔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보다 가속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은 제국주의적인 세계전략의 하나로 북에 친소(親蘇)의 단독 정권을 세우는 작업(한반도 분단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 작업은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의 특별지령(북에 부르조아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라)에서 시작되어 1946년 1월 경(조만식 선생의 연금)에는 대체로 완료되었다고 보여 진다. 그리고 이미 1946년 5월내지 8월경부터 김일성은 남반부까지의 완전해방을 주장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이후는 북에게는 좌우합작은 전략과 전술의 문제이지 목표나 원칙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 그들에게 좌우합작에 기초한 통일은 단순한 전술적 레토릭이지 진정한 전략적 목표내지 이상이 아니었다. 여기에 박헌영이 주도하는 조선공산당의 노선은 자주적이지 못하고 대소(對蘇) 종속성이 대단히 강할 뿐 아니라 좌파 모험주의적 성향이 대단히 심했던 것 같다. 따라서 온건좌파까지를 포함한 좌파진영전체의 단합은 사실상 어려웠다. 하물며 중도나 온건우파까지를 포함하는 대통합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조선공산당은 합작은 커녕, 분열과 갈등만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김구 김규식도 친일파이고 민족분열주의자라고 공격했다.
한마디로 해방 후 처음부터 좌우합작은 이상적인 목표지만 현실성이 없는 프로젝트였는지 모른다. 스탈린의 팽창적 세계전략 하에서 제 3의 길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몽양선생께서는 이러한 국제관계의 구조적 질적 변화를 간과하고 민족적 당위를 실천하려 했던 것 같다. 어려워도 아니 불가능해도 그것이 역사의 소명이고 시대의 대의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좌절의 두 번째 이유는 몽양선생께서 좌파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졌다는 사실이다. 몽양은 분명 좌파이다. 그러나 스탈린적 혁명좌파는 아니다. 적어도 폭력혁명이나 유물론 등을 받아드리기 어려웠던 중도좌파내지 민주사회주의자(의회를 통한 사회주의실현)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그는 근본적으로 민족주의자이다. 따라서 좀 더 정확히 이야기 하면 진보적 민족주의자 혹은 온건 좌파적 민족주의자가 아닐까? 여하튼 그는 좌파였다.
그런데 좌파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진 것 같다. 몽양선생께서 좌우합작을 성공시키려면 적어도 한쪽에서의 헤게모니를 확실히 장악했어야 했다. 그러면 좌우 합작의 성공확률을 좀 더 높일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의 대(對) 한반도정책은 소극적이고 불확정적이고 단호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그래서 38선을 그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남한에 개입하고 지원하여 반(半)영구적인 반공의 보루로 만들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미국의 대한 정책은 상당기간 동요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1947년 9월경에 [품위 있게] 철수하기로 결정을 했다. 한마디로 철수 후 좌파의 득세까지도 사실상 용인하는 [한반도 포기정책]이었다.
따라서 당시에 좌파가 보다 유연한 현실적 합작노선을 추구하였다면 미국과 우파설득이 보다 쉬웠을지 모른다. 분명히 당시는 미국입장은 덜 냉전적이었고, 덜 제국주의적이었고, 덜 경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양선생의 좌파내부의 권력투쟁에서의 패배는 그러한 가능성까지 없애는 셈이 되었다. 물론 범좌파가 유연한 입장으로 선회하였다고 해서 바람직한 최종결과가 나왔을지 여부는 아무도 쉽게 예상하기 어렵다.
여하튼 몽양은 좌파의 헤게모니를 잡지 못했다. 그 이유가 그의 사상이 너무 이상적이고 성품이 너무 자유분방하여 현실적 투쟁력을 조직화하기가 어려워서였는지, 아니면 소련이 마음대로 다루기에는 몽양이란 인물이 너무 커서 소련이 싫어해서인지, 아니면 상기 두 가지 이유 모두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몽양선생께서는 분명 권력투쟁과정에서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등에게 많이 휘둘렸다고 보여 진다. 주지하듯이 인민공화국도 여운형의 주장에 의하여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단순히 간판인물로 이용당한 셈이다. 조선인민당도 조선공산당의 조직적 침투로 사실상 와해되고 포섭당한 셈이었다. 몽양은 1946년 4월부터는 공산당과 손을 끊으려 했고 46년 8월에는 박헌영의 체포를 미군정에게 부탁까지 했다. 북의 지령에 따라 박헌영이 당초의 입장을 바꾸어 좌우합작 운동을 반대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좌절감이 컸을 것이다. 몽양선생은 생전 뿐 아니라 사후에도 공산당에 의하여 많이 이용당한 것 같다.
위와 같은 두 가지 상황 속에서 좌우합작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은 아닌가? 여하튼 몽양선생의 삶과 투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몽양선생의 교훈을 생각하면서 김대중 정부 때부터 추진해 온 햇볕정책이나 6.15선언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하여야 할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우선 몽양 선생이 활동하시던 때와 오늘을 비교할 때 크게 세 가지가 달라진 것 같다.
첫째는 공산주의가 실패한 시스템이 되었다. 실험이 끝난 시스템이 되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중간은 없다는 것이 즉 제3의 길이 없다는 것이 명백하여졌다.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전제로 하고 그 위에 평등과 복지를 강조하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냐 아니면 자유와 경쟁을 강조하는 영미식 [자유민주주의]냐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국가계획경제)와 자본주의(시장경제)사이에 중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몽양선생시대에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중간의 정치경제사회시스템, 즉 제3의 길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을지 모른다. 그 때는 아직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선전이 과다했고 [제도로서의 공산주의]의 실체가 확실히 들어나지 아니했던 때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만을 모은 제3의 가능성도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는 개념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제2차 대전 후 지난 60년간의 세계역사발전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중간은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결국 통일은 헌법 4조에 있는 자유민주주의 통일일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이제 더 이상 북의 공산당 뒤에 소련이 없다. 북은 대단히 경직적이고 모험주의적인 극좌정권이다. 그러나 이제는 북이 다른 나라에 충성을 할 필요는 없게 됐다. 지금은 제2차 대전 직후와는 크게 다르다. 북이 스스로 변화하려면 할 수 있는 시대이다. 북이 어떠한 계기이던 변화하려 때 이를 막으려 할 외부 세력은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1945년경에는 그러하지 아니했을 것이다. 설사 몽양이 좌파의 헤게모니를 잡고 좌우합작을 추진하였어도 과연 당시의 소련이 이를 허용했을까? 분명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제한은 없다. 북이 결단만 한다면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셋째는 과거와는 달리 요즈음은 남북협상을 국내정치에 적극 이용하는 세력이 남에서 등장하고 있다. 남의 권위주의 시대에는 남북대립을 정권유지에 이용하여 왔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에는 남북협상 납북협력을 대내적 정치적 목적내지 정파적 목적에 이용하는 세력이 등장하고 있다. 소위 [통일 포퓰리즘]이 그것이다. 적어도 몽양선생의 시대는 남북협상이던 좌우합작이던 수순한 민족주의적 동기가 전부였다고 본다. 당시 좌우합작은 적어도 민족의 당위였고 시대의 대의를 위한 것이었다. 개인이나 정파적 이익 때문에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진 것 같다. 여야(與野)를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남북 협상이나 협력을 국내정치에 이용하려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고 있다. 진정한 남북의 실체적 변화를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허구의 감상적 [통일이미지]만 만들어 개인의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나는 해방초의 [좌우합작파]가 지금 [남북협력파] 보다 더 순수했고 더 정직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분명 역사의 후퇴이다. 이래선 안 된다.
이상의 세 가지 변화는 대단히 중요한 변화이다. 그러나 이것 이외에 남북관계에서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은 없다. 해방 직후와 지금사이에 질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 북은 여전히 남을 전략 전술로 이용하려 하고 남은 여전히 생각의 혼란과 전략의 혼선이 많다. [북북갈등]은 없고 [남남갈등]이 넘쳐난다. 그런 점에서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