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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un Brief 통권412호
1. 기업인에게 아까운 출석 시간
2. 기업의 보이지 않는 비용
3. 정치적 입장 따라 다른 기업관
4. 기업인은 국회가 아니라 시장으로
1. 기업인에게 아까운 출석 시간
1999년 옷 로비 청문회에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증인으로 나왔다. 증인 선서 과정에서 예명이 아니라 본명을 말하라는 요구를 받고 그는 답했다. “김봉남입니다.” 이 한마디는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정작 그 청문회가 무엇을 밝혀냈는지는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청문회와 국정감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제도다. 그런데 때로는 진실보다 장면이 오래 남는다.
동아일보는 2021년 국정감사에서 일반증인 119명이 출석한 11개 상임위원회 전체회의 41회, 총 250시간 13분의 회의록을 전수 분석했다. 일반증인 한 사람이 답변한 시간은 평균 3분 41초였다. 119명 가운데 91명, 76.5%는 5분도 발언하지 못했다. ‘방경만’ 당시 KT&G 부사장은 약 3시간을 기다려 37초를 답했다. ‘유정준’ SK E&S 대표는 14초, 이완재 SKC 사장은 19초였다. 박홍균 튼튼영어 대표는 3시간 40분을 기다리고도 질문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2024년에도 국정감사 현장은 비슷했다. 중앙일보가 15개 상임위 증인 명단을 분석한 결과 일반증인 470명 가운데 기업인은 159명이었다. 과방위 국감에 출석한 ‘안철현’ 애플코리아 부사장은 오후 2시부터 7시간을 기다렸다. 오후 9시가 되어서야 처음이자 마지막 질문을 받았다. 답변 시간은 3분 40초였다. 3분 남짓이면 방송 토론에서 패널 한 사람이 한 차례 의견을 밝히는 정도의 시간이다.
국정감사는 토론 프로그램이 아니다. 국회가 국정의 문제를 밝히기 위해 필요한 사람에게 출석을 요구하는 국가의 공식 절차다. 3시간을 기다려 37초의 답변이면 충분했던 사람을 왜 불렀는가? 14초의 답변으로 끝날 사안에 왜 최고경영자가 필요했는가? 질문조차 하지 않을 사람에게 왜 출석을 요구했는가? 국회가 가진 소환의 권한이 기업인에게는 거부하기 어려운 권력이 된다는 사실부터 생각해야 한다.
2. 기업의 보이지 않는 비용
기업의 비용은 국감장에서 기다리는 몇 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 최고경영자의 이름이 증인으로 거론되는 순간 대관·법무·홍보·해당 사업부가 움직인다. 자료를 모으고 예상 질문을 만들고 답변을 준비한다. CEO가 국감 증인으로 채택되면 한 달 가까이 기업의 인력과 조직이 대응에 매달린다는 현장의 증언도 나온다. 국감 하루를 위해 기업은 몇 주 전부터 움직이는 것이다.
기업은 정치적 위험에 적응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어느 상임위윈회가 무슨 문제를 다루는지 살피고, 어느 의원이 누구를 증인으로 신청하려는지 파악한다. 총수의 이름이 증인 명단에 올라가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대관조직을 강화한다. 실제로 총수의 증인 채택 가능성을 늦게 파악한 것이 대관 실패로 평가돼 국감 이후 지주사 직속 대관조직을 신설한 기업 사례도 보도됐다. 정치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능력이 기업 경영의 한 부분이 되어가는 것이다.
기업은 좋은 제품을 만들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세계시장을 개척하는 능력으로 경쟁해야 한다. 그런데 국회의 움직임을 먼저 알아내고 정치적 위험을 관리하는 능력까지 기업 경쟁력의 일부가 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국회가 기업인을 자주 불러낼수록 기업은 대관조직을 강화하고, 대관조직을 강화할수록 기업은 정치권을 더 열심히 살피게 된다.
특히 민주당이 야당일 때 주요 대기업 총수를 국감장에 세우려 했던 사례는 반복해서 확인된다. ‘재벌 개혁’과 경제민주화를 앞세워 삼성·현대차 등 주요 기업 총수의 증인 채택을 적극 요구했다. 2015년 연합뉴스는 대기업 총수 증인 요구가 야당을 중심으로 제기됐다고 보도했다. 2016년에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몽구 현대차 회장 등 주요 기업 총수의 증인 채택을 놓고 야당의 요구가 이어졌다. 기업 총수가 국회에 출석하면 언론의 카메라가 몰리고 의원의 질책과 기업인의 답변은 뉴스가 된다.
3. 정치적 입장 따라 다른 기업관
그런데 집권하면 장면이 달라진다. 2025년 민주당이 여당이 되자 당 지도부가 소속 의원들에게 “야당 때처럼 기업 총수를 국감 증인으로 마구잡이로 신청하지는 말자”고 당부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2026년 2월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10대 그룹 기업인들과 ‘청년 일자리와 지방투자 확대를 위한 기업간담회’를 열었다. 대통령은 청년고용과 지방투자를 요청했고, 경제계는 주요 10개 그룹이 향후 5년간 약 270조 원을 지방에 투자하고 그해 5만1600명을 신규 채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야당 때는 기업인을 혼쭐내고, 집권하면 기업에 손을 벌린다. 어제는 ‘재벌 개혁’의 대상이던 기업이 오늘은 투자와 고용의 해결사가 된다. 기업인을 정치적 분노의 대상으로 삼든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삼든, 정치가 필요할 때 불러 움직일 대상으로 본다는 점은 생각해볼 문제다. 기업은 야당의 정치적 먹잇감도 아니고 정권의 투자 동원부대도 아니다.
정치가 기업을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되는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사업비용이 올라가면 기업은 투자를 미룬다. 고용비용이 높아지면 신규채용을 줄이거나 자동화를 선택한다. 국내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다른 나라의 투자환경이 더 유리하면 다음 생산라인을 해외에 설치할 수 있다. 기업은 정치권과 논쟁하는 대신 투자와 고용이라는 경영판단으로 반응한다.
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이런 반응은 확인된다. 2025년 『Journal of Development Economics』에 실린 연구는 2013~2019년 기업 자료를 분석해 2017년 이후 노동시장 규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해외 계열사를 가진 기업의 국내 고용이 약 3% 감소했으며 생산활동의 해외 재배치가 그 경로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세금도 행동을 바꾼다. 2022년 『American Economic Review』에 발표된 연구는 2014년 한국이 기업 규모에 따라 대주주 양도소득세율을 달리 적용한 개편을 이용해, 세 부담 변화가 기업의 실제 투자에 미친 영향을 분석했다. 세 부담이 줄어든 기업은 비교대상 기업보다 지분발행을 늘리며 투자를 크게 늘렸고, 자금 제약이 큰 기업에서 그 효과가 더욱 컸다.
4. 기업인은 국회가 아니라 시장으로
기업인의 의지를 보호한다는 것은 기업인을 특별대우하자는 말이 아니다. 기업도 법을 어기면 법대로 다스리면 된다. 노동자도 기업인도 정치인도 공무원도 법 앞에서는 같다. 산업재해든 회계부정이든 담합이든 소비자 피해든 책임이 있다면 법과 절차에 따라 책임을 물으면 된다. 법치는 기업에 더 엄격하거나 더 관대한 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법을 누구에게나 같은 원칙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국회가 기업인을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사안이 해당 기업인의 결정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가? 담당 임원이나 자료 제출로 해결할 수 없고 최고경영자가 직접 나와야 하는가? 기업과 사회가 치르는 비용에 상응하는 공익이 있는가? 영국 의회가 위원회의 강제소환을 증언이 필수적이고 반복된 출석 요청을 거부했을 때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보는 이유도 권한에는 절제가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제대로 불러 제대로 묻고, 필요하지 않다면 처음부터 부르지 말아야 한다.
기업인도 국민이다. 재산권과 직업의 자유, 적법절차와 자의적인 국가권력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같다. 공화주의가 말하는 자유도 여기에 닿아 있다. 자유는 단순히 간섭받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자의적인 권력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이다. 기업이 노동자와 소비자를 함부로 지배해서는 안 되듯 정치권력도 기업과 기업인을 함부로 지배해서는 안 된다. 권력을 규칙 아래 두는 것이 공화국의 원리다.
누군가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해야 공장이 생긴다. 누군가 새로운 사업에 도전해야 기술이 발전한다. 기업이 성장해야 협력기업이 생기고 새로운 일자리가 열린다. 기업인의 의지를 꺾는 것은 결국 기업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투자와 고용의 기회를 잃는 국민의 문제가 된다.
기업인을 정치의 희생양으로도, 경제성장의 동원 대상으로도 삼지 말라. 기업이 바라봐야 할 곳은 국회의원실이 아니라 시장이고, 기업인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정치인의 호통이 아니라 소비자의 선택이어야 한다. 기업이 정치를 바라보게 만들지 말라. 시장을 바라보게 하라. 그것이 기업인의 자유를 지키면서 국민의 기회를 넓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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