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이른바 ‘글로벌 슈퍼 선거의 해’이다. 지구촌 40개국 이상에서 ‘민주주의의 축제’선거가 치러진다. 첫 시작은 1월 13일, 대만 총통·입법원 동시선거였다. 선거 결과 집권 민주진보당(민진당) 라이칭더(賴?德) 후보가 당선됐다. 미국과는 밀접하고 중국과는 거리를 두어 온 이른바 친미반중 성향의 후보이다. 그는 “2024년 글로벌 선거의 해, 가장 주목하는 선거에서 대만이 민주 진영 첫 번째 승리를 만들었다.”고 자평했다. 외부 세계에서 미중 대리전,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 간 대결로 바라보기도 하는 대만 선거의 의미는 무엇일까. 비교정치학자들이 지구상에서 한국과 가장 유사한 나라로 꼽는 대만 선거의 이면(裏面)을 분석했다.
1. 민심은 숫자로 말한다
1월 14일, 대만 중앙선거위원회 최종 집계 결과 민진당 라이칭더·샤오메이친 정·부총통 후보는 40.05%(558만6019표) 득표율을 기록했다. 제1야당 중국국민당(국민당) 허우유이·자오샤오캉 후보는 33.49%(467만1021표), 제2야당 대만민중당(민중당) 커원저·우신잉 후보는 26.46% (369만466표)로 뒤를 이었다. 라이칭더는 총통에 당선됐지만 대만 유권자 10명 중 6명은 지지하지 않거나 반대한다는 결과를 받아 들었다. 주목할 점은 제2야당 커원저 후보 득표율이다. 커원저는 민중당 주석(대표)이다. 2019년 창당한 군소정당이다. 2014년 1월 기준 입법원 원내 의석 수는 전체 113석 중 5석에 불과하다. 커원저는 전체 유권자의 1/4 이상인 26.46%, 369만 466표를 득표했다. 커원저의 선전은 양당 체제에 균열을 냈다. 기득권 국민·민진 양당에 염증을 느끼는 민심도 반영했다.
2. 더 위너스 테익스 잇 올(The Winner Takes It All?)
스웨덴 혼성그룹 아바(ABBA)의 1980년 곡 ‘더 위너스 테익스 잇 올(The winner takes it all)’에는 “승자가 다 갖는다.”는 가사가 반복 된다. 이번 선거의 ‘표면상 승자’라이칭더와 민진당의 형편은 그러하지 못 하다. 이번 선거는 ‘승자와 패자가 모호한 선거’로 정의할 수 있다.
민진당은 대선에서 승리했다. 민진당이 잘 해서 얻은 과실이라기 보다는 야권 분열로 인한 어부지리(漁父之利)에 가깝다. 라이칭더는 유권자 과반 득표에 못 미치는 40% 득표에 그쳤다. 차이잉원(蔡英文) 현 총통이 2016년 대선에서 56.1%를 기록했고 2020년 득표율은 57.13%였던 것 대비된다. 동시 치러진 입법원 선거에서 민진당은 패했다. 원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 것은 물론 제1당도 국민당에 내줬다. 입법원 113석 중 국민당은 52석을 확보해 14석이 늘어났다. 민진당은 51석으로 10석이 줄어들었으며 민중당은 종전 5석을 8석으로 늘렸다. 2석은 친 국민당 성향 무소속 후보에게 돌아갔다. 2012년 1월부터 총통·부총통 선거와 입법원 선거를 병합해 치르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됐다.
국민당은 대선 3연속 패배의 불명예를 안았다. 다만 입법원에서는 원내 1당으로 올라섰다. 대선에서 지고 총선에서는 이겼기에 무승부라고 할 수 있다. 앞서 2022년 11월 지방선거에서 22개 광역지방자치단체장(직할시·현·시) 가운데 수도 타이베이(臺北)를 비롯한 14석을 획득해 지방 권력을 장악했다. 제1야당으로 정권을 견제할 수 있는 동력은 확보한 셈이다. 2020년 대선에 출마했다가 참패하고 주민소환투표로 가오슝 시장직까지 상실했던 한궈위(韓國瑜)도 비례대표 1번으로 원내 진출해 부활에 성공했다. 원(院) 구성 합의가 이뤄질 경우 차기 입법원장(국회의장)으로 유력하다.
커원저와 민중당은 ‘보이지 않는 승자’다. 입법원 원내 5석에 불과한 미니 정당 당수로 총통 선거에 첫 도전한 커원저는 370만 표(26.5%)를 득표했다. 1996년 총통 직선제 복원 후 제3정당이 20% 이상 득표율을 기록한 것은 최초다. 입법원에서 8석을 확보한 민중당은 ‘캐스팅보트’를 쥐게 됐다.
3. 친중이냐 반중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한국 매체를 비롯한 외부에서는 대만 선거를 친중 성향 국민당 대 반중 성향 민진당 혹은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 시각으로 바라봤다.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민진당의 승리는 미국과 자유민주주의 세계의 승리이고 국민당의 승리는 중국과 공산전체주의 진영의 승리라는 식이다.
주지할 점은 민진당, 국민당, 민중당 모두 대외 관계에서 미국을 가장 중시한다는 점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친미’성향이라 할 수 있다. 국민당은 공식 당명이 ‘중국국민당’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연원(淵源)을 중국에 두고 있다. 정체성의 뿌리인 중국에 있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다. 다만 외부에서 우려하는 대로 친중 혹은 친중국공산당 노선은 아니다. 2019년 홍콩 민주 시위 이후 대만 내에서 친중 노선이나 친중 세력의 공간은 사라지다시피 했다. 국민당의 기본 대 중국 노선은 1992컨센서스(1992 Consensus) 존중이다. 컨센서스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하되 중국 본토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대만에서는 중화민국을 지칭한다(一個中國各自表述)’는 것이 골자다. 중국이 제시한 일국양제(一國兩制·한 나라 두 체제) 통일 방안은 거부한다.
대만 독립을 정강정책에 명시한 민진당의 기본노선이 ‘탈(脫) 중국’임을 부정할 수 없다. 중국공산당 일당독재 체제에 대해서도 명백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 민진당도 양안 현상유지(status quo)에 중점을 둘 수 밖에 없다.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 내세우는 ‘하나의 중국’은 국제사회의 규범이다. 미국을 비롯한 모든 나라에게 예외없이 적용되어 오고 있다. 헤게모니와 규범이 지배하는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대만(중화민국)은 현상과 질서를 바꿀 힘이 없다. 민진당은 미국과 연대하여 중국을 견제하는 정책을 지속하겠지만 중국을 무조건 적대시 할 수도 없다. 지난해 5월, 라이칭더는 모교 국립대만대에서 개최한 간담회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식사를 하고 싶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평화적이든 적대적이든 중국과 공존 할 수 밖에 없는 대만의 처지가 담겼다고 하겠다. 이를 종합할 때 ‘민진당=친미=반중’ ‘국민당=친중=반미’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4. 꼰대 내로남불, 그리고 나의 아저씨
1919년 창당한 중국국민당은 명실상부한 100년 정당이다. 역사와 전통의 국민당은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인 색채가 짙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꼰대’이미지의 정당이다. 정당 문화는 관료주의적이고 주 지지층은 노령화 됐다. 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국민당을 지지하는 20대는 10%에 불과하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젊은 유권자의 외면을 받았다. 야당이지만 야성(野性)과 투지가 부족하다는 평도 빠지지 않는다.
민진당은 1986년 ‘국민당 밖’이라는 뜻을 지닌 당외(黨外) 재야인사들이 주축이 돼 창당했다. 민주, 인권, 진보 가치를 내세우며 세를 키웠다. 2000년에는 첫 수권정당이 됐다. 2024년 국민당도 해 내지 못한 3연속 집권의 위업을 달성했다. 대만 독립과 더불어 민주 진보 인권을 가치로 내건 이들은 제도권 정당이 된 후 변질됐다. 기극권화 됐고 부정부패에서도 자유롭지 못 하다. 지난해는 ‘미투’열풍 속에서 당 관계자들의 성 추행이 집중 폭로 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집권 여당 민진당의 각종 인사 앞에는 ‘땜질’ ‘회전문’ ‘보은’등 부정적인 수식어가 붙는다. 지난날 국민당 일당독재에 저항하며 국민당의 행태를 비판해 온 대만판 ‘86세대’가 주축이 된 민진당은 ‘내로남불’정당인 셈이다. 꼰대와 내로남불로 상징되는 대만 양대 정당은 한국 정치 현실에 투영돼 ‘기시감(旣視感)’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형편 속에서 기성 정당에 염증을 느끼는 대만판 MZ세대들에게 있어 ‘나의 아저씨’는 커원저다. 그는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을 합쳐놓은 듯한 캐릭터다. 국립대만대 의과대학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국립대만대병원 교수, 응급의료센터장으로 일한 외과의사다. 2014년 정치참여를 선언, 그해 지방선거에서 타이베이 시장에 당선됐다. 2018년 재선했고 이듬해 대만민중당을 창당해 주석을 맡고 있다. 커(柯)+교수(Professor)의 첫 글자를 딴 ‘커P’ ‘아베이(阿伯·대만 사투리로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커원저는 친근한 이미지로 유권자에게 다가갔다. 국민·민진 양당 체제에 염증을 느낀 민심도 공략했다. ‘민생’ ‘청렴’을 강조하며 중도층을 주 타깃 삼았다. 저임금, 고물가, 나날이 치솟는 주택 가격 속에서 삶이 팍팍한 젊은 세대는 커원저와 민중당에 희망을 투영했다. 이번 선거에서 20대에서 40대까지 젊은 유권자는 50% 이상의 몰표를 커원저한테 던졌다.
5. 늑대전사에 맞서는 고양이전사
대만은 ‘세계의 고아(孤兒)’처지다. 1971년 창설 회원국으로 참여했던 국제연합(UN)에서 퇴출됐다. 2024년 1월 현재 공식 수교국은 12개국에 불과하다. 라이칭더 당선 직후인 1월 15일, 남태평양 도서국 나우루가 단교를 통보했다. 날로 심화하는 외교적 고립 속에서 샤오메이친 부총통 당선인의 역할에 눈길이 쏠린다.
샤오메이친은 1972년 일본 고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만인, 어머니는 미국인이다. 미국 오벌린대, 컬럼비아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자타공인 국제전문가이다. 민진당 국제사무부 책임자로 활동했고 4선 입법위원을 거쳐 부총통 후보 지명 전까지 주미국 타이베이경제문화대표부 대표로 일했다. 샤오메이친은 중국의 전랑(戰狼·늑대전사)외교에 맞서는 ‘전묘(戰猫·고양이전사)외교관’이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대만 외교는 팽팽한 밧줄 위를 경쾌하고 유연하게, 균형 있게 걷는 고양이와 같다,”며 “비판과 욕설을 반복하는 중국의 오만하고 무례한 외교와 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주미국 대표 시절 그는 ‘비(非)공식 대만 대사’로서 미국 조야(朝野)에 ‘대만의 친구’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6. 깨어지지 않는 법칙, 깨어진 법칙, 그리고 징크스
대만에서는 ‘정권 8년 주기설’이 존재한다. 1996년 첫 총통 직선제가 실시, 2000년 첫 여야 정권 수평교체 후 국민당과 민진당이 8년 씩 번갈아 가며 집권해 왔기 때문이다. 첫 당선된 총통은 재선에 실패하지도 않았다. 현직 부총통이자 민진당 부주석인 라이칭더 당선으로 법칙은 깨어지고 사상 첫 정당 3연속 집권 기록을 썼다.
국립대만대는 대만 최고학부이다. 일본의 9개 제국대학(帝國大學)의 일원으로 설립된 타이베이제국대가 모체다. 대학 동문록에는 정·재·관계 저명인사가 즐비하다. 민주화 이후 대만 총통 ▲리덩후이(1988~2000년 재임) ▲천수이볜(2000~2008년 재임) ▲마잉주(2008~2016년 재임) ▲차이잉원(2016~2024년 재임) 들도 모두 국립대만대 동문이다. 36년 간 대만 최고지도자 자리를 독점해 오고 있다. 국립대만대 의대 출신 라이칭더 총통 당선인의 임기 4년이 더해지면 ‘국립대만대 40년 독주’가 된다. 이 속에서 “국립대만대를 나오지 않으면 총통이 되지 못 한다.”는 속설은 깨어지지 않았다.
‘신베이(新北) 시장 징크스’도 이어진다. 2010년 타이베이현(縣)이 행정원직할시로 승격돼 탄생한 신베이시(New Taipei City)는 대만 최대지방자치단체이다. 수도 타이베이를 에워싸고 있는 신베이시는 한국 경기도와 다방 면에서 유사하다. 이런 신베이 시장은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못 한다. 2016년 대선에서 현직 시장이던 주리룬 현 국민당 주석이 차이잉원 현 총통에게 도전했다 참패했다. 2024년 도전했다 실패한 허우유이도 현직 신베이 시장이다. 반면 전직 타이베이 시장인 리덩후이-천수이볜-마잉주는 차례로 총통이 됐다. 장제스의 증손 장완안 현 시장도 국민당의 유력 차기 대권주자다. 이는 한국 경기도지사 출신 정치인이 대권 도전에 번번이 실패하는 한국 현실과 겹친다.
7. 대만해협의 풍랑, 왕의 귀환?
평균 폭 180km의 대만해협은 풍랑이 거칠다. 중국과 날을 세워온 라이칭더, 중국의 제재 명단에도 오른 샤오메이친 당선으로 해협에는 격랑(激浪)이 예고됐다. 라이칭더 보다 온건 성향으로 양안 현상유지를 표방해 온 차이잉원 당선 후 공식 대화는 단절하고 무력 시위 수위를 높여 온 중국의 행태에 비춰 볼 때 대만해협의 파고(波高)는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양안관계의 상수(常數)라 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상수는 중국 시진핑 체제다. 시진핑의 장기 집권이 기정사실화 됐고, 중국의 대 대만 정책 기조 변화 여지도 없다. 남은 변수(變數)는 11월 미국 대선이다. 조 바이든 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다면 대만-미국 관계는 현상유지가 점쳐진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하여 백악관 재입성 한다면 ‘경우의 수’는 변화무쌍(變化無雙)해 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 있어 ‘미국의 위험한 친구’라이칭더에 이어 트럼프마저 당선되는 것은 ‘최악의 조합’이다. 두 사람 다 예측과 통제 불가능하다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에는 트럼프가 ‘대만 포기’를 언급했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왕의 귀환’여부, 트럼프가 대만해협에 불러일으킬 바람이 훈풍(薰風)일지 삭풍(朔風)일지 귀추가 주목된다.
8. 한국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나
비교정치학자들이 ‘지구상의 가장 유사한 나라’의 사례로 꼽는 대만의 선거는 4월 제22대 총선을 앞둔 한국에도 ‘나비 효과’를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시사점도 준다.
양대 정당 체제의 균열이다. 1986년 ‘당외(黨外)’로 불리던 재야인사가 주축이 된 민진당 창당 전까지 대만 정치는 국민당 일당체제였다. 2000년 민진당이 첫 집권 한 후부터 본격적인 양당 경쟁 체제가 지속되고 있다. 국민당과 민진당은 이념, 정책, 지향점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기득권화 되고 부패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이 속에서 대만 MZ세대는 커원저와 민중당을 선택했다. 한국도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양당 체제 속에서 제3지대 정당이 출범 했거나 앞두고 있다. 차기 총선에서도 중도층, 2040세대 표의 향방이 주목된다. 거대 정당이 혁신하지 않고 캐스팅보터의 마음을 얻지 못 한다면 승리하지 못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번 선거 국민당은 ‘전쟁과 평화’, 민진당은 ‘민주와 독재’프레임을 내걸었다. 전형적인 프레임으로 승부한 양대 정당은 ‘집토끼’로 비유하는 고정 지지층 밖에 얻지 못한 결과를 얻었다. 반면 ‘민생’, ‘개인의 행복’을 가치로 내 건 민중당은 중도층을 흡수하며 제3정당으로서 자리를 굳혔다. 이념보다 중요한 것은 ‘민생’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결과다.
대선 3연속 패배의 굴욕을 안은 100년 정당 국민당 사례는 한국 보수 정당의 현실을 투영한다. ‘꼰대’스럽고 무기력한 이미지로 젊은 세대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았다. 8년 집권한 민진당 정부의 각종 실정(失政)에 대한 반감을 지지로 연결시키지 못 했다. 이는 상대 정당이 아무리 헛 발질을 해도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유권자의 마음을 얻지 못 한다는 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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