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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un Brief [4·3 사건, 역사해석의 독점을 거부한다] 통권245호
 
2023-02-24 16:59:18
첨부 : 230224_brief.pdf  
Hansun Brief 통권245호 

진명행 역사 칼럼니스트

최근 태영호 의원의 4·3 관련 발언으로 정치권이 소란스럽다. 이를 문제시하는 측의 주장을 들어보면 김대중 정부 이후 4·3에 대한 역사적 평가 작업은 이미 완결된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제는 태 의원처럼 북한 김일성이 지시한 공산 폭동식의 기존과 다른 해석을 했다가는 뭇매를 맞기 십상이다. 그래서 여권에서조차 조용히 넘어가려는 듯한 분위기다.

 

이른바 성역화에 성공한 역사적 사건들이 다른 해석으로 논란이 될 때마다 정치권이나 언론의 반응은 어쩌면 그리 한결같은지 모를 일이다. 대체 그 망언(妄言)이라는 단정은 누구의 특권인 것인가? 사관(史觀)의 대물림을 종용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인지, 이제는 해석을 달리하면 법을 만들어 처벌하자는 소리까지 나온다.

 

사문난적의 필화를 친국(親鞫)하는 그들의 다그침이 추상같이 들린다. 과연 여기가 21세기 대한민국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들의 말처럼 시대착오적 발언이라니 별안간 생각할 것이 많아진다. 도대체 어느 시대를 말하는 것일까?


4·3 사건은 스탈린 만세를 외치며, 적들의 수중에 나라를 송두리째 헌납시키려 했던 자들이 일으킨 반란 사건이다. 여기에 제아무리 거창한 명분으로 분칠한다 한들 그 본질이 어디 가지 않는다. 진압의 와중에 무고하게 휩쓸려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원혼을 위로하자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원인 제공자들의 반역을 낯두껍게 무장봉기 항쟁이니 하는 미사여구로 호도하고, 이들을 진압한 대한민국이 부당했다며 마치 시원적으로 탄생해서는 안될 국가라는 식의 결론을 강요하는 것, 이는 목불인견이다.

 

1. 폭동인가 항쟁인가?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는 하지만, 사실에 대한 평가보다 평가를 위한 사실을 앞세운다면, 그 전달 과정에서 왜곡이나 은폐는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가감 없이 나열하고, 평가는 각자의 몫으로 두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상식이고 순리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가치의 중립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아볼 때, 한 사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도저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 기능을 회복할 가망이 없을 때, 소위 혁명이라는 최후의 수단이 등장하곤 한다. 그것이 쿠데타이든, 정변이든, 폭동이든 그 양태나 명칭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정체성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평가는 냉정할 필요가 있다. 국가력에 대항한 무장투쟁이 항쟁으로서 면모를 가지려면, 최소한의 정당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우선 생존권이나 존립에 심각한 위협을 받았는가? 평화적인 방법을 포함 다른 법적, 제도적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는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에 도달하고 중지했는가? 다른 방법을 강구할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았는가? 방어적 목적과는 무관한 인명 살상이나 약탈, 파괴를 지양했는가? 우리 헌법은 이처럼 저항권의 행사요건을 엄격히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준으로 추단컨대, 과연 4·3 사건이 항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은 의외로 쉽게 소명된다. 단순히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항쟁이 될 수 없고, 통일조국 수립이나 단선단정 반대도 명분상 구호에 불과했을 뿐, 그 정당성을 뒷받침할 증명이나 논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194843일 봉화가 오르자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짓은 우익인사나 군경가족, 공무원들을 에 비유하며, 살생부까지 만들어 계획적으로 학살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학살당한 가족의 장례 현장을 습격해 참석자 전원을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한 일도 있다. 단지 국가의 녹을 먹는 면장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만행을 당한 것이다. 아무리 관대한 평가를 하더라도 이들의 죄악은 공공선(公共善)이나 합목적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느닷없는 민중이란 합성어도 괴이하기 짝이 없는 수사(修辭). 4·3 사건은 소수의 무장대들과 그 동조세력들이 다수의 도민들을 겁박해 산으로 끌고 다니면서, 노동력과 물자를 징발하고, 자신들의 생존을 엄폐하는 수단으로 삼았을 뿐이다. 그 어디에 민중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1949510일 치러진 제1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결과를 보면 북제주군에서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후보 홍순영과 대동청년단 양병직이 당선되었고, 19528월에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의 각 정당별 득표율을 보면 자유당이 83.8%를 득표하여 전국 평균을 10% 가까이 상회한다. 4·3이 다수 민중을 위한 항쟁이었다면 이 선거 결과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2. "단선단정 반대를 위한 무장봉기"라는 이념적 분식(粉飾)

 

주지하다시피, UN 총회는 결의안 112호로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이때가 19471114일이다. 그런데 남로당 제주도당은 UN 총회에서 총선거 문제를 논의하기도 전인 19478월경 이미 남로당 인민해방군이라는 무장 게릴라를 조직하고, 사령부 예하 25개의 전투부대와 25개의 직속부대, 그리고 각 읍, , 단위로 1~2개의 유격중대와 자위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이는 실질적 무장 여부와는 관계없이, 제주 남로당이 군사조직으로 체제의 전환을 시도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며, 시기적으로 UN 결정 이전이므로 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무장봉기했다는 주장은 허구의 명분에 불과했음이 소명된다. UN 한국임시위원단이 총선거 준비를 위해 입북을 시도했으나, 소련의 거부로 돌아온 것은 1948122일이고, 이 때문에 UN 소총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한 것은 1948226일이다.

 

1948620일 미 제24군단 정보참모부 헝거(R.Hunger) 상사가 작성한 제주도 남도당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인민해방군은 이미 19481월 이전 한림지역의 오름 중턱에 설치된 일본군 군사시설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였고, 19482월 초에 300여명이 애월면 새별오름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는 정찰보고를 첨부하고 있다.

 

제주신문(1989. 4. 18)에 보도된 당시 증언의 몇몇 사례를 보면, 19479월 초순부터 멍석을 도둑질당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이는 남로당이 게릴라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걷어가버린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들의 훈련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는 고문승의 제주 사람들의 설움318쪽에 기술된 내용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19478월부터는 한라산 어리목에 총지휘부(본부)를 설치하고 남로당원과 이에 동조세력을 끌어올려 관음사, 어승생악, 바늘오름, 샛별오름, 눈오름, 노루오름, 돈내코, 남윤악김녕곳, 남송악, 세미곳, 달래오름 등지에서 각 거점을 두고 중산간 부락 농가에 있는 멍석을 강제 납품 또는 야간을 이용 훔쳐서 거점인 자연동굴에 깔고 은거하면서 각 거점별로 자위대를 편성 무장을 시키고 앞으로 제주도 전체를 무력으로 점령적화에 대비 게릴라 훈련을 시키면서 온갖 도발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강조점은 필자에 의한 것임)

 

3. 반란 주체로서 남로당 중앙 또는 북한의 개입 여부

 

과거에도 4·3 사건의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인지를 두고 여러 번 소란이 있었다. 소수이긴 하지만, 박갑동의 증언 이후로 이현희 같은 보수적 학자들에 의해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때마다 4·3 관련 단체나 정치권, 언론(특히 제주지역)들에 의해 십자포화를 맞으면서, 논란의 당사자들은 사과를 하거나 변명하는 등의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4·3 사건이 제주 남로당의 독자적인 판단에 의한 애국적 거사임을 극구 강조하는 사람들의 저의는 북한이나 중앙당의 개입을 부정함으로써, 4·3 사건의 주체성과 결단성을 강조하고 이념적으로 결백 순수한 자주통일운동임을 주장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다. 당시 제주도 인민유격대에 가담했던 인사들조차 남로당 중앙당이나 북한의 지도가 존재했음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194967일 토벌대가 이덕구를 사살하고 노획한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그동안 증언 형식으로만 존재했던 중앙당의 개입을 입증할 결정적인 문건이 된다. 여기에는 4·3 사건 직전에 중앙당이 여러 차례 오르그를 파견하여, 무장반격을 지령하고, 국방경비대 9연대에 잠입시킨 세포들을 통해 반란을 일으킨 뒤 거사 당일 무장대와 합세시켜 지원할 계획까지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중앙당이 거사에 대한 단순 추인이나 협업의 단계를 넘어 적극적으로 제주 남로당을 부추겼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로당 출신 박갑동은 당시 중앙당에서는 4·3 사건 직전 당군사부 책임자 이중업과 군내 프락치 책임자 이재복 등을 현지에 파견하여 현지 집중지도로써 군사 활동의 확대를 기도했다. 또 무장폭동 총책 김달삼의 장인이며 중앙당 선전부장 강문석(姜文錫)을 정책 및 조직지도 책임자로 선정하여 현지에 보냈다고 증언하고 있어, 위의 문건의 내용과 상당 부분 부합한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제출된 보고서에는 북한이 4·3 사건에 깊숙하게 개입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공산주의자들은 제주도 내 동족간의 갈등과 고립된 지리적 조건에 힘입어 그곳의 선거를 충분히 교란시키는데 성공하여 미군 군정 장관이 재선거를 명령하도록 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제주도에서 강력한 파괴, 전복공작을 폈고 다수의 훈련된 선동가들과 다량의 무기 및 폭약을 다른 지역들과 북한 자체로부터 들여왔음이 분명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4·3 사건 당시 인민해방군 제2연대장(일명 2, 7지대장) 출신으로 제주도 인민의 4 ·3 무장투쟁사를 집필한 김봉현에 따르면, 무장유격대의 무기, 탄약과 기타 투쟁용 자재 및 생활용품 일체를 제주도 밖에서 해로를 통해 비밀 공급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서귀포에 태평양해운이라는 비밀조직을 운영하며 중요 인물의 접선, 물자조달을 했던 것이다. 이들의 동태는 미군 CIC방첩대에 의해 어느 정도 포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동신문1950211일자에는 북한의 4·3 사건 개입을 자인(自認)하는 기사가 실려있다. 그 내용인 즉, 실제로 김달삼을 비롯한 제주저항의 지도부를 북한의 국가 수립에 참여시킨 것도 로동당 중앙의 지시였으며, 당 중앙은 이들을 불러들이는 대신 리재옥을 파견하여 제주도에서의 저항을 자신들의 전국적 투쟁전략과 연계시키려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 태영호 의원의 발언을 마냥 근거 없는 시대착오적 망언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19481121일 주한미육군사령부의 전보에 따르면, 북한에서 남로당 중앙을 통해 얼마나 치밀하게 공작을 전개하고 있었는지 알게 해준다. 대부분의 지령은 평양에서 이루어지며, 이 지령들은 북한 해주(좌표 870-1700)에 있는 남로당 중앙을 경유하여, 각 도당으로 일사불란하게 전파된다. 또한 북한은 남로당의 공작 준비를 지원하고, 게릴라 전술을 훈련시키기 위해 각 도에 훈련받은 조직책을 파견한다. 제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474월 체포된 여성 간첩을 심문한 결과, 북한에 설립된 간첩 양성소에서 훈련받은 제5열분자들이 소련에서 훈련받은 장교 3명의 지휘로 50명씩 나뉘어 남파되었는데, 이들 중 일부가 제주도에 테러훈련소를 세웠다는 CIC 방첩대 정보자료도 존재한다. 물론 이런 자료들은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했던 전문 위원들에게는 무의미한 정보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자료들은 어떤 일관성을 갖추고 있는 듯하다.

 

토벌대는 얼마나 많은 제주도민들을 얼마나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했는가, 이승만 정권은 얼마나 폭압적으로 진압하도록 명령했는가, 미군정은 어떻게 협조했고, 어떻게 불법행위를 방관했는가 등의 자료들을 묶어 무려 11권의 자료집을 발간하면서도, 여러 불리한 내용이 들어있는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국가가 생산한 자료가 아니라는 해괴한 논리를 들어 배척시켜버렸다.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것인지 은폐하겠다는 것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자료를 바탕으로 4·3 사건은 어느새 성역화된 역사로서 다른 해석과 평가를 죄악시하고 있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은 국가체계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에서 전국적 소요사태와 테러가 끊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구와 제주, 여수 등은 공권력 자체가 마비되기도 했다. 엇보다 국민들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한 경각심이 없었다. 무상몰수·무상배분이라는 구호에 현혹된 사람들이 많았다.

 

19477월에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는 공산주의·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이 77%였을 정도로 호의적이었다. 이런 최악의 역경을 딛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탄생한 것이다. 우리 민족이 극심했던 좌우익의 대립을 이겨내고 전쟁까지 치르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간 것은 실로 위대한 역사적 승리다.

 

그럼에도 다시 시계를 돌려 좌익들이 만들어 낸 사관에 편승하고 국가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4·3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역사를 왜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희생자의 죽음 등 비극을 강조하고, 전후 인과관계를 묻어버리는 것이다. 한 맺힘과 진혼곡으로 가득한 역사해석에 팩트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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