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민사회단체는 지역사회의 풀뿌리 조직을 근간으로 출발하기보다 권위주의 독재정치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태동했다. 1970년대의 유신체제 반대운동이나 군부의 독재정치에 대항한 민주화 시민운동이 시민사회단체의 모태가 됐다. 이 영향으로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는 현재까지도 정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1. 시민사회단체 태동과 분화
오늘날에는 사회가 복잡·다기화됨에 따라서 시민사회단체도 분화가 이루어졌다. 이제는 정치를 넘어서 환경, 여성, 문화, 스포츠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전국에 1만 5,000여 개의 시민사회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활동영역은 크게 중앙과 지방으로 구분된다. 지역사회에 뿌리를 둔 시민사회단체는 지역의 니즈에 부응한 활동이 중심이다. 반면 서울에서 활동하는 시민사회단체는 전문 영역과 연계된 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정책이나 의회의 입법 활동 그리고 대기업 감시 등을 많이 한다.
비영리단체 등록현황
(단위: 개)
년/분기 | 합계 | 중앙 | 시·도 |
2022.2 | 15,472 | 1,744 | 13,728 |
* 말소단체는 제외
* 출처: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 지원사업 관리정보시스템 (https://npas.mois.go.kr)
이런 연유로 한국의 시민사회단체 활동에는 특이점이 있다. 중요한 정치적 이슈나 사회적 이슈가 발생하면 많은 시민사회단체가 모여서 활동하고 여론형성을 주도한다. 정치적 반향이 큰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마다 같은 성향의 시민사회단체가 모여서 여론을 몰고 간다. 미선·효순 사건, 광우병 사태, 세월호 사태, 사드 사태 등의 사례가 그렇다. 정치적 반향이 큰 사건 중심이다 보니 특정 정치권과 연대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정권과 시민사회단체가 서로 주고받는 ‘순환 생태계’가 형성된다. 세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2. 시민사회단체의 특징적 모습들
첫째, 진영논리에 따른 정치권과의 공생이다. 이것이 시민사회단체의 정치화 현상을 유발하는 동인으로 작용했다. 같은 진영이라고 판단되는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해서는 관대한 행태를 보이지만 다른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비판을 한다. 원전이나 4대강에 대해서 그렇게 반대 목소리를 내던 환경단체가 태양광이 산과 강, 하천 등에 걸쳐서 환경을 훼손하고 있다는 보도가 쏟아지고 있는데도 침묵했다. 전문성이나 과학적 지식에 근거한 환경감시 기능보다 진영논리가 더 중요했다.
심지어 정치권을 옹호하는 시민사회단체도 있다. 지난 정부에서 같은 정당 광역지방자치단체장 3곳에서 시차를 두고 위력에 의한 성추행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침묵하거나 관대한 행태를 보였던 여성단체가 그렇다. 여성의 권리보호와 인권을 주장하는 여성단체가 피해여성을 보호하기보다 피해여성을 ‘피해호소인’으로 호칭함으로써 이를 오도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사례는 여성단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인권 단체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북전단금지법 개정안에 대해 국내는 물론 유엔까지 나서서 반대했는데도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은 침묵했다.
둘째, 정치나 정권 참여의 통로 역할이다. 물론 시민사회단체 인사라고 행정부나 국회에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전문 분야에 대한 식견과 능력이 있는 분은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이라도 개인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시민의 소리를 전달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바람직한 면도 있다. 그러나 이런 역할은 한두 명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너도나도 정치에 나서거나 정부요직에 들어가는 것은 비판과 견제 역할을 해야 하는 시민사회단체 본연의 역할에 반한다. 이런 행태는 시민사회단체 특성인 정치적 중립성은 물론 도덕성, 공정성, 책무성에 반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정치와 권력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정부 요직에 주요 인사를 배출한 시민사회단체는 정치행위나 정책에 대해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국 사태이다. 이들 시민사회단체는 논평은 고사하고 오히려 비호했다.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된 조국 후보자에게 많은 의혹이 쏟아지자 오히려 검찰 수사를 ‘인권침해’와 ‘정치검찰’로 규정하면서 비난했다(2019.5.19.). 정치나 정권에 대한 비판보다 오히려 정치의 당사자처럼 행동했다. 청와대 비서실 인사, 비서실의 행정 간여, 적폐청산, 4+1 정당 협의체 구성을 통한 준연동형비례대표제 도입, 탈원전, 미세먼지, 소득 주도 성장, 친노동, 자율고? 특목고 축소 및 폐지, 포퓰리즘 정책의 남발, 공수처 설치, 부동산 정책 등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이나 견제가 없었다. 대장동 아파트 부당이익 의혹사건에 대해서도 침묵하다가 뒤늦게 참여연대와 민변이 “대장동이 단군 이래 최대 공익 환수 사업”이라는 주장을 반박했을 뿐이다(2021.10.7.)
시민사회단체가 정치화될수록, 진영논리에 매몰될수록 시민사회단체는 본연의 활동에서 멀어진다. 시민사회단체가 현실정치와 시민운동을 헷갈리기 시작하면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판단이 흐려질 수 있다. 이런 행태가 지속되다보면 시민사회단체가 정권을 대변하는 인상을 주게 된다. 우리나라처럼 사상이나 이념대결이 첨예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정권의 전위대나 파수꾼처럼 비쳐지기도 한다. 이에 대한 모든 해명은 자기 합리화를 위한 변명으로 비쳐진다.
셋째, 시민사회단체의 재정취약성에 기인한 이익추구 행태이다. 중앙정부보조금이나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에 의존하는 행태가 그렇다. 재정자립을 하지 못하는 시민사회단체일수록 정부보조금에 사활을 건다. 서울시를 보더라도 “박원순 전임 시장 재임 10년 동안 시민사회단체에 약 1조 원 가까운 시민혈세가 지원되었다고 한다. 지원 분야도 마을, 도시재생, 사회적 경제, 주민자치, 협치, 주거, 청년, 노동, 도시농업, 환경, 에너지, 남북교류 등 그야말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심지어 주요 업무별로 ‘센터’라는 이름의 중개조직을 만들고 직원 대부분을 시민사회단체 출신으로 구성했다. 이들은 당연히 자기가 일했던 시민사회단체에 업무를 위탁했다. 일종의 내부거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 되다 보니 매년 1,000억 원 규모의 시 예산이 타당성 심사나 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보조금과 위탁금 명목으로 지원됐다. 그렇게 서울시에 줄을 댄 등록 시민사회단체가 2,300개에 달했다. 오죽하면 오세훈 시장이 이를 ‘현금인출기(ATM)’에 비유했을까?
이러한 현상은 서울시에 한정되지 않는다. 다른 시·도는 물론 중앙정부에도 시민사회단체가 행정부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하고 보조금 배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시민사회단체와의 협력분야가 넓으면 필연적으로 고유 행정업무와 중복이 나타나고 이는 공무원과 적지 않은 마찰을 유발하면서 행정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떨어뜨리게 된다.
3. 시민사회단체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시민사회단체가 정치와 거리를 두지 않고 정치권과 동조화 현상을 보이면 보일수록 고유역할인 비판과 견제 기능은 발휘하기 어렵다.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기능, 시장을 보완하는 기능, 시민사회 활성화 기능이 약화되거나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시민들이 시민사회단체를 떠나게 된다. ‘민주주의 없는 시민운동’, ‘시민 없는 시민운동’에 대한 비판 역시 이런 시민사회단체의 행태와 무관하지 않다. 시민사회단체가 정치중립성을 지키지 못하면 핵심덕목인 도덕성, 책무성, 투명성에 대한 감각도 무디어지면서 결국에는 시민운동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몰리게 된다.
재삼 강조하지만 시민사회단체는 공익과 공공성을 발휘하는 과정에서도 도덕성, 공정성, 투명성을 높여 신뢰를 쌓아 나가야 한다. 그것이 시민사회단체의 사회적 책임이다. 시민사회단체도 시대변화에 부응해야 한다. 시민사회단체를 이끌어 갈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동기를 유발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반영되는 통로가 개설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권력과 시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시민사회단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치 중립적이고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정치와 정책을 올곧게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무조건적인 비판뿐만 아니라 잘한 일은 격려하고 칭찬도 해야 한다. 시민사회단체는 어떠한 상황이든지 지향가치를 분명히 제시하고 설립목적에 부응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