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01 09:37:33
북한은 어디로 가나
남성욱(한반도선진화재단 대북.통일팀장,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3대 세습 위한 집단지도체제 구축에 주력
1942년 2월생인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2008년을 기점으로 60대 후반에 들어선다. 내년이면 66세로 북한의 평균수명에 해당하는 나이다.
2차 정상회담 당시 4·25문화회관 앞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어정쩡하게 기다리던 김정일의 뒷모습은 2000년 정상회담과는 격세지감이 있었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김 위원장 역시 세월이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푸석푸석한 피부와 머리칼, 무표정한 움직임 등은 삶의 후반부를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의 60대 중년신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각종 불로장생 비법을 연구하는 장수연구소의 특별 관리를 받더라도 자연노화를 막을 수는 없는 것 같다.
김 위원장의 물리적 나이는 차치하더라도 2008년은 그의 리더십이 어떤 형태로든지 변화의 모멘텀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 김 위원장과 특별한 역학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다른 국가들의 리더십이 변화하고 있다. 한국은 새로운 대통령이 집권함으로써 그가 1994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권좌를 이어받은 이래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을 거쳐 4번째 대통령을 카운터파트로 상대하게 된다. 지난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10·4 선언문의 이행을 둘러싸고 여·야 출신에 상관없이 새로운 대통령과 대화할 수밖에 없다.
일본 역시 통치 리더십이 변화하고 있다. 이미 지난 9월 아시아 외교를 중시하는 후쿠다 내각이 출범하자마자 북한과 일본은 중국 선양에서 기자들을 완벽하게 따돌리며 비밀 교섭에 나섰다. 아베 총리 시절 총리관저 홈페이지를 열자마자 떠올랐던 “납치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습니다”라는 구호는 초기화면에서 사라졌다. 북·미 간 해빙의 물결이 급격하게 밀려오자 일본 역시 거대한 트렌드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납치문제와 북·일 관계 개선을 동시에 모색하고 있다.
변화의 가장 중요한 모멘텀은 미국에서 왔다. 새로 개봉되고 있는 영화 제목은 ‘그들(힐과 김계관)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감독 라이스, 각본 젤리코, 연출 크리스토퍼 힐·김계관이 참여하는 북·미 간 화해와 협력의 드라마는 최종적으로 라이스 장관의 평양 방문으로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버지니아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필립 젤리코의 보고서(Philip Zelico's Report)를 토대로 한 미국의 대북 다자주의적 접근은 최초로 북한 태권도 선수단이 미국을 방문하여 안방에 TV로 생중계되는 ‘사건’을 만들었다. 미국 대중(對中) 핑퐁외교를 연상케 한다. 이밖에도 내년 2월로 예정된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 공연, 북한과 미국 간 여자 축구경기 등 다양한 친선 프로그램이 기다리고 있다. 젤리코 보고서는 핵문제 이외에 문화 및 정치교류 등 5개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양국 관계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과연 영화 매니아인 김 위원장은 북·미 간 드라마에서 핵무기를 개발하는 독재자라는 부정적 이미지에서 화려한 변신을 할 수 있을까? 우선 낙관적인 시나리오를 예상하자. 미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더 이상 북한에서 “미국은 조국의 철천지 원쑤”라는 구호는 유효하지 않다. 김 위원장도 3세대 세습으로 후계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식한다. 자신이 후계 수업을 받던 과거 냉전구도의 시절과 현재 실리 위주의 동북아 정세는 매우 다르다. 특히 김정남·김정철·김정운 등 자식들이 미덥지 못하다. 자신이 1960년대 중반 이후 삼촌인 김영주, 이복동생인 김평일을 비롯한 곁가지 친인척 중심의 정적을 표독스럽게 제거하면서 권좌를 쟁취한 전례를 따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김 위원장은 권력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고 뺏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절감한 사람이다.
자신의 통치체제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위협을 최소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북·미 간 외교관계 개선으로 미국의 위협을 최소화하면서 일정 수준의 경제회복을 시도한다. ‘쌀밥에 고깃국 먹겠다’는 1950년대 건설 현장 구호는 차치하고 남한의 식량과 비료 공급에 따른 굴욕감도 한계에 왔다. 김 위원장 자신이 그나마 정력적으로 일할 수 있는 향후 5년간은 체제의 안정화와 공고화에 매우 중요한 기간이다. 5년이 지나면 김 위원장은 70대 고령노인이 된다. 때마침 주변 국가들의 실용주의적(Pragmatism) 통치 리더십은 김 위원장이 변화를 모색하기에 거북하지 않은 동북아 정세를 조성하고 있다. 주변국가들 역시 1992년 16억달러를 투입하고 핵을 폐기한 우크라이나 핵폐기 방식을 북한에 제안하고 있다. 북한이 핵폐기에만 나서면 대규모의 경제지원과 체제보장을 약속하고 있는 만큼, 손해나는 장사는 아니다. 기존 통치이념인 ‘우리식 사회주의’나 선군정치도 큰 위협을 받지 않는다. 만약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기존 핵무기를 꺼내들어 대립구도를 형성하면 된다.
다음은 현상유지(status quo) 정책으로 비관적 시나리오다. 김 위원장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역설적으로 독이 든 사과를 먹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테러지원국 해제와 적성국·교역국 적용 종료 등을 통해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미아가 되는 것은 피했지만 1인 수령체제 유지에는 마이너스 요인이다. 평양에 맥도날드와 피자헛이 문을 여는 순간 미국 자본이 비수로 작용할 가능성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주체사상은 실존 이념으로 활동하기는 어렵다. 이 상태로 3대 세습은 어렵다. 결론은 북핵 불능화 단계로 실리를 취하면서 완전 폐기는 미룬 채 미국과의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체제유지에 필요하다. 미국은 앞으로 등장할 평양의 ‘김 부자(父子) 정권’에 필요악인 셈이다. 특히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주민들의 눈높이를 올려놓아 김정남 등의 후계 체제를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21세기 대명천지에 3대 세습하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라는 외부의 지적에 대해 대응은 궁색하기 짝이 없다. 위험한 관계 개선보다는 ‘지금 이대로’ 가는 것이 국가이익에는 치명적이지만 정권이익에는 부담이 없다.
상반되는 시나리오 중에서 예측은 쉽지 않다. 김 위원장은 체제유지를 의사결정의 첫 번째 변수로 간주할 것이다. 동유럽, 중동과 쿠바의 사례를 면밀히 관찰해온 김 위원장은 통치 리더십의 변화가 과연 체제 공고화에 기여할 것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북한 체제는 여전히 김일성 주석 중심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김 위원장이 북한을 지도하는 것은 사실 김 주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상당 부분 의존한다. 김 주석의 정통성을 김 위원장이 잇고 있으나 김정남 등 김 위원의장 아들들은 정권을 지탱할 만큼 충분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내전 발발 가능성이 있는 권력투쟁을 피하기 위해 김 위원장은 살아 있는 동안 김 주석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3대 세습을 최대한 모색할 것이다. 그러나 세습이 어려울 경우 과도기적으로 자신의 아들이 참여하는 집단지도체제의 골격을 구축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김 위원장은 통치 리더십의 변화가 현행 유지보다는 위험하지만 길게 보면 얻을 것이 많다고 판단할 수 있다. 특히 북한이 핵폐기 과정을 통해 국제경제기구나 지역안보기구에 참여하고 국제기구를 통해 경제적 혜택을 받으면 정치적 안전도 보장받을 수 있다. 다만 70세 가까운 김정일 위원장이 판을 교체하는 획기적 변화를 추구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30년 전 기억은 또렷하나 3일 전 사건은 희미한 것이 노인의 인지상정인데 천지가 요동치는 통섭(通涉·Consilience)의 동북아 신질서에 올인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 이 글은 2007년 10월 30일자 주간조선 [위클리뉴스]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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