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공동체 자유주의인가?
-- 一部 懷疑論에 대한 답변 --
박세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인류의 역사를 보면 개인의 존엄과 자유의 확대가 역사발전과 진보의 기본 원리이었다. 따라서 이를 확실하게 보장하고 확대하는 자유주의의 실현이 국가발전과 국민통합의 제1과제가 된다. 그러나 개인적 자유만 과도하게 주장되면 사회 경제적 격차와 대립의 증대, 인간소외와 개인의 파편화, 공동체연대의 약화, 역사단절과 전통붕괴, 생태파괴와 생명회손 등등 사회공동체 역사공동체 자연공동체 등이 피폐하여지고 나아가 파괴되어 자유주의의 지속자체가 어렵게 되는 상황이 온다. 따라서 국가발전과 국민통합의 제2의 과제로 공동체의 가치와 연대를 중시하는 공동체주의가 필요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극단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가져오는 각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에 의지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역사는 전체주의내지 집단주의가 개인과 공동체간의 건강한 관계설정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냉엄하게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올바른 답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기본으로 하면서 공동체 구성원간의 상호설득과 자기교육을 통하여 개개인의 공동체의식과 책임을 제고하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공동체자유주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공동체자유주의여야 지역과 세대, 그리고 이념과 계층으로 분열되고 갈등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국민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결집시켜 낼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많은 갈등이 자유와 평등의 갈등이고 개인과 전체 간의 대립이다. 그런데 공동체자유주의는 이러한 대립하여 갈등을 일으키는 가치사이에 올바른 우선순위를 정하고 서로 조화시키는 원리를 제공할 수 있다. 구체적 공동체자유주의는 자유와 개인을 기본가치로 하고 평등과 전체를 보완가치로 한다. 그래서 극단적 자유와 극단적 평등으로 갈등하는 우리사회를 통합할 수 있다
또한 공동체자유주의여야 대한민국을 21세기 세계 일류국가로 만드는 [선진화]라는 국가목표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200-300년간의 인류의 발전도 그러했지만 21세기의 발전은 더욱 많은 자유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21세기에는 발전과 더불어 각종공동체의 위기가 심화되는 시기가 될 것이다. 가족의 해체, 지역과 사회공동체의 해체, 역사와 전통공동체의 약화, 환경과 생태공동체의 파괴 등등 이 심해질 것이다.
이러한 때 개인과 공동체가 근본적으로 서로 相依相生 관계에 놓여 있다는 인식, 즉 공동체자유주의여야 공동체의 해체를 예방하고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여 나갈 수 있다. 즉 공동체의 위기를 적극 치유하면서 자유주의의 기본원리를 더욱 강력하게 지켜 자유의 심화와 확산에 노력할 수 있다. 그래야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의 선진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자유주의를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 학계의 일각에선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는 본래 이론적으로 서로 상충하고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과 비판이 있다. 그래서 공동체자유주의라는 주장에 대하여 선 듯 수용하기 어려워한다. 이러한 회의론과 비판론은 과연 옳은 주장인가? 이러한 회의론내지 비판론이 나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우선 그 이유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대화과정 속에서 공동체자유주의의 주장과 그 내용도 보다 확실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살펴보면 회의론이나 비판론은 대체로 두 가지 개념상의 오해 중 하나에 기인하는 것 같다.
첫째, 비판론은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를 집단주의(collectivism)와 명확히 구별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공동체주의를 개인주의에 대립하는 집단주의의 하나로 혹은 亞流로 혼동하는 것 같다. 주지하듯이 자유주의?개인을 기본적 가치로 중시하는데 집단주의는 개인의 가치보다는 집단의 가치내지 집단의 이익을 앞세운다. 따라서 자유주의와 집단주의는 원리적으로 서로 대립하고 상충한다. 그러니 공동체주의를 집단주의와 같은 것으로, 혹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면 당연 공동체자유주의는 [집단주의적 자유주의]라는 말과 같이 形容矛盾이 되어 성립할 수 없는 말이 된다.
그런데 사실 공동체주의와 집단주의는 본래 서로 크게 다른 것이다. 집단주의는 [집단의 가치]를 앞세워 개인의 가치와 대립하지만 공동체주의는 [개인의 가치]를 기본으로 한다. 다만 공동체주의는 개인의 가치를 절대화하지 않을 뿐이다. 개인의 가치 내지 자유를 가장 중요한 기본가치로 인정하고 존중하나, [공동체의 소중함]도 함께 중요시 한다. 왜냐하면 공동체가 피폐하여 지면 개인의 자유와 가치도 존중받기 어렵고 지켜지기 어렵기 ㏏?甄? 또한 공동체주의는 공동체의 소중함을 주장하면서도 그 방식이 권위주의적이거나 강제적이지 않고 개개인의 [양식과 이성]에 호소한다. 따라서 공동체의식의 제고를 위해서 대화와 설득, 그리고 교육이 주로 사용되면 정치적 폭력, 사회적 압력 등은 당연 부정된다.
개인을 억압하고 개인과 대립하는 것이 집단주의라면 개인을 존중하고 개인을 설득하는 것이 공동체주의이다. 따라서 공동체주의에서의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자유공동체(liberal community)로서 개인의 자유를 전제로 한 공동체주의이다.
집단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차이는 구체적인 예를 생각하면 보다 명확해진다. 예컨대 집단주의의 대표적 예로는 [계급주의 정당]을 들 수 있다. 계급주의에서는 계급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한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와 가치는 계급의 이익과 승리를 위하여 희생되는 것이 당연하고, 때로는 그 개인의 희생이 집단적으로 강요되고 강제된다. 이러한 집단주의는 물론 개인주의 자유주의와 상극의 관계가 된다.
공동체자유주의에 대하여 회의론 내지 비판론이 나오는 두 번째 이유는 정치이론(Political Theory)과 철학이론(Philosophical Theory)의 구별을 확실히 하지 아니했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정치적 자유주의(Political Liberalism 혹은 Liberalism as Political Theory)와 철학적 자유주의(Philosophical Liberalism), 그리고 정치적 공동체주의(Political Communitarianism 혹은 Communitarianism as Political Theory)와 철학적 공동체주의(Philosophical Communitarianism)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아니 했기 때문에 공동체자유주의에 대한 오해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솔직히 철학적 자유주의와 철학적 공동체주의간의 논쟁은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그렇게 매력이 있는 주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동양철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부분과 전체 혹은 개체와 공동체는 불이(不二)라는 입장을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儒家 佛家 道家의 입장에서 보면 개개인을 떠난 공동체도 따로 존재할 수 없고, 공동체와의 관계를 떠난 독립된 개체도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개체와 공동체는 존재론 적으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물론 서로 구별된다는 점에서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동양철학적 입장에서 보면 지난 세기말에 있었던 구미에서의 철학적 자유주의와 철학적 공동체주의간의 논쟁은 별로 흥미 있는 주제는 아니다. 이 논쟁은 서양철학계가 아직 Descartes類의 二元論의 덫을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증거에 불과하며 우리는 이 논쟁을 참고는 하지만 그 이상의 수용은 불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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