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균형발전과 국가경쟁력
박세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1: [발전이론] 없는 균형발전론
1-1: 우리 사회에 [균형발전]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듣기는 좋으나 사실은 공허한 말이다. 내용이 확실하지 않은 말이다. 과연 균형발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지역에 같은 규모와 같은 수의 빌딩이 그리고 같은 규모와 같은 수의 공장이 그리고 같은 수의 인구가 평등하게 있어야 균형발전인가? 이러한 의미라며 불가능할 뿐 아니라 유해하다고 본다. 아니 발전의 포기를 의미한다. 발전이란 남과 달라지려는 데서 시작된다. 남과 달라지지 못하게 모두를 비슷하게 만들려고 한다면 발전의 유인과 동력은 없어진다. 만일 균형발전론이 균형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이는 발전이론 없는 공허한 감상론이나 아니면 反발전론이 될 위험이 있다.
결국 올바른 것은 [균형발전]이 아니라 [발전균형]이다. 각 지역이 나름의 특징과 장점, 즉 나름의 비교우위를 최대한 이용하여 발전한 결과로 나라 전체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그러면 가장 시급한 것은 [올바른 지역발전론]이 먼저 나와야 한다. 지역은 어느 때 발전하고 어떻게 발전하는 것인가? 그 발전의 외부적 조건과 주체적 조건은 무엇인가? 그리고 발전의 전략은 무엇인가가 먼저 나와야 한다. 한마디로 [발전이론 없는 균형발전론]에서 [발전이론 있는 발전균형론]으로 연구의 중심과 정책의 중심이 바꾸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균형은 올바른 발전의 결과이지 발전의 목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100년간의 인류의 역사적 경험. 특히 국가사회주의의 경험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
1-2: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왜 균형발전이라는 말이 사회적 호소력을 가지는가? 아니 전문가들 중에서도 균형발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거기에는 3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오래된 대한민국의 과도한 중앙집권적 역사전통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발전의 수단(돈 사람 정책 정보 등)이 지방보다 중앙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왔기 때문이다. 철저한 중앙집권 때문에 지방이 자기발전을 위한 충분한 발전수단을 가질 수 없었다. 예산도 정부 규제도 경찰도 교육도 그 핵심적 부분은 모두가 중앙정부가 잡고 있었다. 그러니 지방에서 보면 지방의 상대적 낙후의 일차적 원인이 중앙의 자원배분이나 권력배분이 가지는 지역 간 편파성 때문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는 수도나 대도시에 대한 과도지원, 농촌이나 중소 도시에 대한 과소지원 때문이라고 보게 되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분명 근거도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을 따라서 소위 균형발전을 주장하면서 중앙에서 더 많은 돈과 권력을 따온다면 그 것이 정답인가? 아니다 이다. 그것은 일시적 이익을 가져 올지 모르나 지속가능한 발전도 자생적 발전도 아니다. 결국 정답은 뒤에 상론하겠으나 철저한 중앙집권의 타파, 準 연방제에 가까운 지방분권화의 방향이다.
둘째는 오래된 대한민국경제의 상대적 폐쇄성 때문이다. 21세기 들어서면서 상황은 크게 변화하고 있지만 지난 산업화 기간 동안 우리나라 경제의 개방성, 글로벌화는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었다. 예컨대 외국인 투자의 비중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수도 및 대도시의 성장요인(자본 인재 기술 등)이 해외부문에서 들어오는 것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래서 수도와 대도시가 성장하는 것은 국내의 다른 지역에서 성장요인들(예컨대 인재 자본 등)이 수도와 대도시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주게 되었다. 그 결과 수도와 대도시의 발전을 억제하면 농촌과 중소도시가 발전할 수 있다는 관념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대기업이 발전하는 것은 중소기업에 대한 착취 때문이라는 주장과 그 논리적 구조를 같이 한다. 이 주장은 상대적 폐쇄경제 하에서도 과연 그러한가는 구체적 실증연구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지만 오늘날과 같은 개방경제하에서는 시대에 맞지 않는 잘못된 주장이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 구시대에 형성된 낡은 관념이 우리사회에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셋째, 우리사회에 팽배하여 있는 포퓰리즘(populism)적인 평등주의 사상 때문이다. 이것이 균형발전론에게 호소력을 준다. 균형발전론이 아주 듣기 좋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물론 [기회의 평등]이야 아주 중요한 가치이고 실은 자유주의사상의 불가결한 한 부분이다. 그러나 [결과의 평등]은 그것도 인기영합주의와 결합된 결과평등주의는 국가발전의 최대의 장애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대중은 자유주의 보다 결과평등주의를 좋아한다. 그 효과가 즉각적이고 구체적이고 피부에 와 닿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유주의의 가치는 열린 가능성이어서 그 효과가 추상적이고 장기적이고 피부에 와 닿기 어렵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포퓰리즘은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한 사회 심리적 연장선상에서 균형발전론은 감성적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이상의 3가지 요소들이 결합되어 우리사회에 [균형발전론]이 정치적으로 많은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균형발전론에는 재분배전략 (예컨대 수도이전, 공공기관의 지방분산 등) 이외에는 뚜렷한 지역발전 전략을 가지기 어렵다는 한계를 가진다. 한마디로 균형발전론은 독자적인 지역발전론이 없다.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진정으로 지역발전을 생각한다면 균형발전론이 더 이상 인기를 누릴 구호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면 균형발전론을 비판하는 [발전균형론]내지 [발전조화론] 즉 [先 발전 後 균형(조화)]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에 답하려면 먼저 오늘날 21세기 세계화시대에 세계의 대도시는 어떻게 발전하고 있고, 그 발전의 동인(driving forces)과 발전의 조건은 무엇인가? 어는 때 성공하고 어는 때 실패하는가? 등을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발전 내지 지역발전을 설명하는 이론들은 과거 산업화시대와 달리 세계화시대에 어떻게 변화 발전하고 있는가 등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2: 세계화시대의 지역발전론(1): 국가경쟁력과 도시경쟁력
세계화시대는 세계적 대도시간의 경쟁, 주요지역 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시대이다. 어떤 경쟁인가? 한마디로 보다 많은 사람과 보다 많은 자본 그리고 보다 많은 정보(기술) 등을 끌어 들이기 위한 장소경쟁(competition of place)이 일어나고 있다. 이 경쟁에서 승리하는 도시 승리하는 지역은 발전하고 이 경쟁에서 지는 도시와 지역은 쇠퇴하게 된다.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도시는 발전이 정채내지 후진하고 구조조정이 필요한 도시가 된다.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이 장소의 경쟁에서 이기는 도시와 지역을 많이 가진 나라는 발전하고 그러하지 못하면 나라는 추락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장소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가? 이를 알려면 우선 누가 장소를 선택하는가? 그리고 그들이 장소를 선택할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장소를 선택하는 주체는 물론 기업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다국적 기업(multinational corporation)이 중요하다. 전 세계에는 약 6만개의 다국적 기업이 있다. 대한민국 출신(대한민국에 본사를 둔)의 다국적 기업도 적지 않다. 여하튼 이들 다국적 기업이 전 세계무역의 2/3 를 하고 있다. 전 세계무역의 1/3이 이들 다국적 기업의 기업내부 거래이다. 그??이들 袂뮌?기업 중 가장 큰 500대기업이 세계 business R&D 투자의 1/2이상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다국적 기업의 투자행위 환언하면 투자지역 선택행위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들이 지역본사를 세울 때, 지역의 R&D center를 세울 때, 혹은 조립공장이나 부품공장 등을 세울 때, 어디다 세울 것인가,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세울 것인가를 선택할 때, 어떠한 요소들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까? 두 가지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첫째는 그 지역에 [우수한 창조적 인력]이 있는가이다. 자신들이 요구하는 수준의 양질의 창조인력이 얼마나 풍부한가이다. 다른 지역에 비하여 그 지역에서 얼마나 우수한 창조적 인재를 많이 교육해 내고 있는가이다. 한마디로 그 지역의 [교육경쟁력]의 문제이다.
둘째는 그 지역이 사업하기 편하고 종업원들이 살기 좋은가 이다. 그 지역이 세계 다른 지역과의 연계성(global connectedness)이 좋은가? 환언하면 통신 교통 항공 등의 인프라가 어떠한가? 또한 그 지역의 공공서비스의 질은 어떠한가? 특히 중요한 것은 그 곳의 거주환경은 쾌적한가? 자녀들의 교육환경은 어떠한가? 그 지역의 문화와 예술 환경은 어떠한가? 또한 그 지역의 주민들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다양한 문화 국적 종교 등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소위 다양성에 대한 관용(tolerance)의 수준은 어떠한가? 등등이 중요한 고려가 될 것이다. 한마디로 이것이 바로 지역의 [도시경쟁력]의 문제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세계화시대의 지역발전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동한다. 하나는 그 지역의 [교육경쟁력]이고 다른 하나는 그 지역의 [도시경쟁력]이다. 이 두 가지가 다른 나라 다른 지역에 비하여 높은 국제경쟁을 가져야 그 지역이 발전할 수 있고 나아가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
3: 세계화 시대의 지역발전론(2): 집중화와 광역화
그러면 세계화시대에 지역발전이 높은 교육경쟁력과 높은 도시경쟁력으로 인하여 시작되지만 그 이후 발전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크게 보면 두 가지 과정을 통하여 발전한다. 하나는 [집중화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광역화과정]이다. 우선 도시나 지역발전의 계기는 집중화내지 집적화의 이익(agglomeration benefit)에서 온다. 사람 돈 정보 기술 등이 집중되고 집적되면서 그 도시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도시발전이 결과 된다. 흔히 혼잡비용(congestion cost)을 이야기하지만 역사적 실증적으로 보면 집적의 이익이 혼잡비용보다 더 큰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집중과 집적을 통하여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하면 그 발전정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시의 외연이 확대되면서 도시의 경쟁력은 더욱 올라간다. 즉 광역화의 과정이 시작되고 광역화의 이익(economy of large size)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광역화의 과정 속에서 발전하는 대도시와 인근 중소도시들과의 사이에 새로운 사회적 분업관계가 발생한다. 그러면서 발전의 상호작용이 증대하고 확대되어 나간다. 그 결과 중소도시가 다시 광역화의 과정을 밟으면서 인근 농촌지역에도 발전의 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마치 가을 밤 하늘에 기러기편대(flying geese model)가 날아가는 것 과 같은 발전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제일 앞에 대도시가 있고 다음에 중소도시 그리고 그 다음에 농촌 등이 위치하면서 모두가 함께 하나의 발전의 방향으로 날아가는 셈이 된다. 이것이 세계화시대의 전형적 도시발전 및 지역발전의 패턴이다. 그래서 앞에서 대도시의 발전이 빠를수록 뒤의 중소도시 그리고 그 뒤의 농촌의 발전도 빠르게 된다. 역으로 앞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면 뒤에서도 속도를 낼 수 없다.
물론 한 나라에 기러기 편대가 반드시 하나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몇 개의 기러기 편대를 가질 수도 있다. 한 나라 안에 여러 개의 기러기 편대가 서로 경쟁하면서 서로 더욱 발전할 수 있다. 그리고 반드시 국내의 기러기 편대와만 국내 기러기 편대가 경쟁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계화 시대에는 세계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외국의 기러기 편대와 경쟁하는 경우가 더 많아 지고 중요해진다. 이상이 세계화시대의 도시 내지 지역발전의 패턴이고 동학(dynamism)이다.
이러한 세계 대도시와 지역의 발전패턴 내지 발전동학을 생각하면서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를 살펴보자. 우선 우리나라 수도 서울의 국제?위상을 살펴보자. 2006년 OECD의 세계도시비교연구(Competitive Cities in the Global Economy: November 2006)를 보면 세계도시를 3개 구릅으로 나누고 있다. 제1 그룹은 소위 world star group 으로서 세계발전을 선도하는 세계일류도시그룹이다. 이들 도시의 평균소득은 자국의 평균소득보다 1.5배에서 2배정도 높다. 그 만큼 생산성이 높은 활동들이 집중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예컨대 뉴욕 동경 런던 파리 밀란 등이 들어 있다. 제2 그룹은 소위 national star group으로서 세계발전은 아니지만 한 나라의 발전 즉 자기가 속한 나라의 발전을 선도하는 도시 그룹이다. 이들 도시의 평균소득은 그 나라의 평균소득보다 1배 내지 1.5배 정도 높다. 예컨대 스톡홀롬 비엔나 로마 리스본 마드리드 등 이다.
그 다음 제 3그룹은 세계발전도 한 나라의 발전도 선도하지 못하며 앞으로 세계화시대에 경쟁하기 위하여서는 구조조정이 필요한 도시들(metro-poles in transition)이다. 이들 도시의 평균소득은 나라전체의 평균소득을 앞서지 못할 뿐 아니라 따라가지도 못하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베를린 몬트리올 후쿠오카 서울 등이다. 서울이 바로 제 3구릅에 속해 있다. 한마디로 서울의 도시경쟁력은 낙제점이라는 말이 된다. 서울은 세계의 발전은커녕 대한민국 발전의 견인차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디.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한마디로 우리는 도시발전의 두 가지 요인 내지 계기가 되는 도시의 집중(집적)을 열심히 막고 도시의 광역화를 열심히 막았기 때문이다.
서울에의 집중을 막기 위하여 우리는 행정수도를 만들고 있다. 18개 부처 중에서 12개를 옮기는 것은 수도이전이 아니라고 강변하면서 수도이전 보다 더 나쁜 수도분할을 강행하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 불만을 이야기하니 이제는 170여개의 공공기관을 지방에 정치적으로 강제배분하고 있다. 이렇게 서울의 집중과 집적을 막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는 서울의 광역화를 막기 위하여서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끊임없이 각종 수도권규제, 각종 농지규제 등을 강화하여 왔다. 한마디로 [도시의 집중]도 [도시의 확산]도 열심히 막아 온 셈이다. 그 결과 서울은 발전할 수도 커질 수도 없었다. 참고로 런던은 서울의 2.5배이다. 동경은 3.5배이다 상하이는 14배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울이 커지는 것을 열심히 막아 왔다. 그러니 서울의 국제경쟁력이 낮아 질 수밖에 없고 결과 세계기업들은 서울을 외면하고 다른 세계도시에 지역본사, R&D 연구소, 핵심공장 들을 세우게 된다. 참고로 세계 500대 다국적기업 중 중국에 진출한 것은 이미 499개인데 우리나라는 아직 250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주지하듯이 지난 4년간 그 큰 중국은 매년 년 평균 10% 이상으로 발전하여 왔는데 작은 우리는 4% 수준에 머물러 왔다. 이렇게 하면서 성장문제 실업문제 양극화 문제 그 어는 문제도 풀 수는 없다.
4: 세계화시대의 지역발전론 (3) 상생인가? 아닌가?
서울의 발전은 다른 지역의 발전을 촉진하는가 아니면 후퇴시키는가? 라는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두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폐해론]이다. 즉 서울이 발전할수록 다른 지역의 발전이 어렵게 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서울의 발전으로 인하여 지방의 생산적 자원인 지방의 기술 인재 돈 정보 등이 모두 서울로 올라가 버리기 때문에 지방발전은 그 만큼 어렵게 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서울의 발전을 억제하여야 지방발전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소위 국내에서의 brain drain, resource drain 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정반대의 견해는 [기여론]이다. 즉 서울의 발전이 지방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서울의 발전이 지방으로부터의 인재 돈 정보 기술의 유입에 의존하는 정도는 크지 않다는 것이다. 서울의 발전은 지방으로 부터가 아니라 사실은 해외로부터의 정보 기술 자본 인력의 유입에 보다 많이 의존하고 또한 세계화가 진행 될수록 보다 많이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어떤 쪽 주장이 옳은가? 이론적으로는 두 가지 가능성이 다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생각건대, 60-70년대의 산업화 시대, 즉 경제가 상대적으로 덜 개방화되어 있을 때에는 [서울 폐해론]이 보다 큰 현실 설명력을 가졌을 수 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 특히 21세기 글로벌 경제의 시대에는 [서울 기여론]이 보다 올바른 견해라고 생각한다. 이제 서울의 발전은 특히 서울의 국제경쟁력 제고는 해외에서 얼마나 세계 최고의 인재, 최고의 기술, 최고의 기업들을 많이 유치할 수 있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 해외로 부터의 최고의 자원의 유입이 많을수록 그리고 빠를수록 서울의 국제경쟁력은 높아진다.
더구나 세계화시대에는 서울의 발전을 막으면 생산적 자원이 지방으로 이동하지 않고 해외로 빠져 나가는 시대이다. 따라서 세계화 시대 글로벌 경제의 시대에 서울 때문에 지방이 못 산다던가 서울의 발전을 막아야 지방이 발전한다던가하는 주장은 크게 잘못된 주장이 된다. 요컨대 세계화 시대에는 [서울 기여론]이 올바른 견해이다. 앞의 기러기편대 모델에서 보았듯이 서울이 해외로부터의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받고 해외로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생산적 자원이 유입되면서 발전하면 할수록, 서울과 이웃의 다른 도시나 지역사이의 새로운 생산적 분업관계의 필요성이 증대하여 그 결과로 서울과 다른 지역들이 함께 동반성장하여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수도권규제나 수도집중을 막는 대부분의 조처는 크게 유해하다고 보아야 한다. 외국의 다른 나라의 경험이 공통으로 가르치는 것도 수도권봉쇄(containment policy)는 득보다 실이 많은 것을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영국도 1981년 대처 수상 때 런던지역에 강제하던 공장건축허가제, 업무용 건물 신축 허가제 등을 완전 폐지하였다. 프랑스도 1982년부터 수도권 공장에 부과하던 과밀부담금을 모두 폐지하였다. 앞의 2006년 OECD 연구 보고서도 서울에 대한 각종규제가 서울의 국제경쟁력제고에 유해하였다는 주장에 동감을 표시하고 있다.
첫째, 서울의 발전을 막는 각종규제를 풀어야 한다. 우리나라 서울의 일인당 GDP는 전국평균과 비슷하다. 더 이상의 인구집중 압력은 없다. 오히려 문제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선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서울의 규제를 풀어 해외로부터 더 많은 생산적 자원( 인재 돈 기술 등)의 유입을 촉진하여야 한다. 그리고 서울의 발전이 다른 도시나 지역에 흘러넘치도록(spill over effect) 사회 인프라를 깔고 정보적 네트워킹을 강화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둘째, 지방자치단체의 계층구조를 개혁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규모로 [광역조직]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구촌의 다른 지역정부와 경쟁하려면 적어도 인구가 1000만 내지 1500만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주(洲)의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국을 3개 정도의 주로 그릅화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서울 경기 강원도의 영서 및 금강 이북의 충청도 등을 묶어 하나의 주로 하고, 전라남북도와 금강 이남의 충청도 및 제주도를 묶어 또 다른 하나의 주로 하고 그리고 경상남북도와 강원도의 영동을 묶어 다른 하나의 주로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제1주는 중국과 러시아 등의 대륙을, 제2주는 남중국과 동남아시아를, 그리고 제 3주는 일본과 태평양을 대상으로 하는 세계경영을 위한 분업구도를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이야기한 세계의 다른 나라 다른 지역과 세계경쟁을 할 수 있는 [기러기편대]가 한반도 남한에서 3개가 나타나는 셈이다. 한마디로 100년 전에 만든 행정단위를 기초로 한 현재의 계층구조와 단위는 [세계경쟁이 가능한 구조]로 크게 광역화를 위한 구조개혁을 하여야 한다. 세계화시대의 지방화란 지방이 세계경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셋째, 위와 같은 광역화를 위한 구조개혁과 함께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지방분권의 시대]를 넘어 [지방주권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지방분권은 본래 권한은 중앙에 있고 그 권한의 일부를 지방에 나누어주는 식이였다. 그래서 지방은 항상 중앙의 눈치만 보았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진행되는 국가균형발전의 논리도 기본적으로 전혀 변화가 없다. 모든 권력과 돈은 중앙이 가지고 있으면서 지방에 큰 은혜를 베풀듯이 공기업이나 喚遍??일부 나누어 주는 식이다. 이래가지고는 자발적이고 자립적이며 지속가능한 지역발전은 안 된다.
세계화시대 맞게 지방정부가 자기 나름의 세계경쟁력을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수 없다. 이제는 발상의 180도 전환이 필요한 시대이다. 이제는 본래 권력이 주민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권력이 지방에서 나오고 그 지방 권력의 일부를 중앙에 위임한다는 식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그러면 준(準)연방제 수준의 분권화가 필수적이 된다.
지방주권의 시대이면 대부분의 세금은 지방세가 원칙이 된다. 조세징수권이 상당부분 지방으로 이전될 뿐 아니라 대부분의 인허가권도 지방정부가 가지게 된다. 지방정부는 사실상 하나의 작은 정부가 되어서 독자적인 경제개발계획, 산업정책, 인재육성정책, 다른 지방정부나 외국과의 경제협력권 추진사업 등을 펼쳐 나갈 수 있게 된다. 자기 나름의 세계화 전략과 선진화 전략을 세워 나갈 수 있게 된다.
넷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지역인재의 양성과 지역리더십의 양성이다. 자립적 지역발전이 가능하려면 제도도 중요하지만 지역인재와 리더십이 육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가장 시급한 것이 소위 평준화를 풀어 지역명문 중고등학교가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그리고 정부지원을 통하여 지역명문대학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중앙정부가 지역발전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정부부처나 관공서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계적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명문 대학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 더 나아가 해외에서 명문대학을 지방정부가 마음껏 유치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참고로 싱가포르는 이미 1980년부터 세계 10대 명문대학 유치계획을 만들고 그 작은 나라가 학교부지 땅의 30년간의 무상임차, 5년간 교수연구비의 1/2의 국고지원 등의 유인을 제공하면서 뛰고 있다. 이미 존스 홉킨스 대학 시카고 대학 등이 들어 왔으며 현재 외국인 유학생남 6만 6천명이다. 2015년까지 외국인 유학생을 15만 명으로 늘리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현재 전국에 외국유학생이 약 1만 6천 명 정도이다. 이래가지고 서울이든 지방이든 세계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지역발전을 위하여 특히 지역인재양성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글로벌 경제가 진행되면서 지역발전전략의 우선순위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산업화시대에는 지역발전을 위하여 [자본의 유치] 즉 기업의 유치가 최우선의 전략이었다. 자본이 들어오면 취업기회를 찾아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그러나 세계화시대에는 지역발전을 위하여 [사람의 유치]가 최우선전략이 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제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을 특히 우수한 창의적 인재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기업이 찾아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이동이 그 만큼 쉬어졌고 기업의 성패에서 우수한 창조적 인재의 확보가 그 만큼 중요하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역발전을 위해서는 최고의 우수한 창의적 인재를 그 지역이 가능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지역 내부에서 우수대학 등을 통하여 양성할 수도 있고 외부 지역에서 양성된 우수한 창의적 인재들이 많이 유입되도록 노력할 수도 있으나, 어떤 경로를 통하던 그 지역에 우수한 창의적 인재들이 많이 모여들도록 하지 못하면 그 지역은 결코 발전할 수 없다. 이것이 세계화 시대의 지역발전론이 산업화시대의 그것과 크게 다른 특징의 하나이다. 즉 이제는 돈이 사람을 따라 다니는 시대이다. 따라서 가능한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도록 만드는 것이 지역발전의 핵심전략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다섯째, 지역발전이 이루어지려면 결국 우리의 생각이 크게 달라져야 한다. 산업화시대의 발상과 의식을 가지고는 세계화시대에 지역발전을 이루어 낼 수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서울의 발전이 지방의 쇠퇴의 원인이 되는 시대는 아니다. 오히려 서울이 다른 세계도시와 경쟁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지방의 발전이 지연되는 시대이다. 또한 이제는 중앙이 돈과 권력을 모두 가지고 그 일부를 지방에 인심 쓰듯 떠내어 주어 지방발전이 가능한 시대도 아니다. 이제는 지방도 세계경쟁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자기 나름의 비교우위(comparative advantage)를 발견하고 자기 나름의 발전전략을 수립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지방정부가 세계경쟁을 할 수 있는 규모로 구조조정을 하여야 하고 동시에 세계경쟁을 할 수 있는 돈과 권력을 가져야 한다. 세계경쟁을 할 수 있는 규모도 되지 못하고 중앙정부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허약한 지방정부가지고 세계전략을 짤 수도 세계경쟁에서 이길 수도 없다. 그러면서 세계화 시대에 지방발전을 희망하는 것은 실로 연목구어이다.
최근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 한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발전을 위하여서는 남을 탓하지 말고 내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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