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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호]멋있는 역사 청산
 
2007-03-08 10:53:17
 

               ‘멋있는 역사 청산’을 위하여

 
이인호 (한반도선진화재단 고문, 객원논설위원·명지대 석좌교수)
 
 
 

오랫동안 교편을 잡은 사람이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것은 가르친 제자가 훌륭한 인물이 되어 앞에 나타날 때이다. 하지만 미국 예일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고 K 군이 보내온 소식은 통상적 반가움을 훨씬 넘어서는 감동적 사건이었다.



서울대에서 가르치던 시절 나는 서양사학과 신입생들에게 간단하게 가족사를 써 오라는 숙제를 낸 적이 있다. ‘관심은 있어도 사료가 부족하고 주제를 미화하고 싶은 본능이 생길 때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며 이야기를 구성하는가’ 등의 물음에 일찍부터 직면해 봄으로써, 역사학을 전공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이며 또한 남들이 이야기하는 역사를 받아들이는 데 어떤 주의가 필요한가를 스스로 깨닫게 하자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그 가족사 쓰기 실험에서 가장 큰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학생들보다 교수인 나 자신이었던 듯하다. 학생들의 짧은 이야기 속에 배어 있는 전쟁과 분단의 상흔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뿌리가 깊고 생생했기 때문이다. K 군은 그 가족사 숙제를 받을 때까지도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던 학생이었다. 신혼의 청년이었던 그의 조부는 여수·순천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자수했지만 결국 처형을 당했다. 그 참혹한 상황에서 태어나 성장한 K 군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해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숨겼던 것 같다. 내가 숙제를 냈던 시기가 마침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사람들이 말문을 열 수 있던 시기였다는 것이 큰 행운이었다.


 

‘과거의 원한’ 벗어나 세계 무대로

K 군 가족은 분단과 이념적 대치 상황으로 인해 혹독한 시련을 치른 당사자들이다. 그런데 그렇게 처형당한 사람의 손자가 미국에 유학한 지 불과 8년 만에 세계 정상급 대학이라는 하버드대에서 서양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 경쟁 대학인 예일대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멋진 역사 청산이 있겠는가. 그의 부모들이 과거의 원한을 자식들에게 전수하며 정치적 보상에나 집착하고 있었다면 세계무대로의 이런 영광스러운 비상이 있을 수 있었을까.


 

나라 바깥에서도 멋있는 역사 청산의 사례를 본 적이 있다. 지금 잘나가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인 베트남 얘기다. 대사직을 여러 번 지내고 현재 국회의원인 톤누티닌 여사는 원래 귀족 가문 출신으로 파리 유학생이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호찌민의 정치적 이념에 동조해 온 사람이다. 베트남의 역사 청산이 오늘의 한국처럼 과거사위원회를 40여 개나 설립하고 국가 정통성 자체를 의문시하는 듯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프랑스어는 물론 영어를 자기 나라 말처럼 유창하게 하는 닌 여사는 지금쯤 미국 때리기에 앞장서고 있을 것이다. 전쟁 당시 베트남이 미국한테서 받은 피해가 얼마나 끔찍했던가.



그러나 닌 여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미국을 비난하는 것과 정반대의 일이다. 그는 미국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미국과 베트남 간의 우호 관계와 베트남의 밝은 미래를 강조하며 미국인들의 베트남에 대한 투자를 촉구하고 베트남에 세계 수준의 대학을 설립하기 위한 모금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미국에 이미 정착한 베트남 사람들은 대개 전쟁에서 패배해 난민으로 탈출한 사람들이라 닌 여사의 활동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닌 여사는 미국인들의 상처와 잠재적 죄책감을 일깨워 화가 나게 하는 대신, 그것을 미국인 특유의 이상주의적 본능으로 환원해 새로운 베트남 건설을 위한 동력으로 활용하는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얼마나 멋지고 실속 있는 역사적 보복이며 역사 청산의 사례인가.



내년 건국 60주년 대통합 준비를

지금 우리는 다가오는 대선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다. 이번 선거 결과가 우리 민족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선거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일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년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 되는 해임을 생각하며 국민 대통합의 축제를 준비해야 한다. 건설적 의미의 역사 청산이란 우리 아들딸 모두가 세계의 넓은 무대 모든 영역에서 지도자급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희망과 힘을 길러 줄 때 이루어지지, 과거의 상처를 쑤셔 대며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식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 이 글은 동아일보 2월 28일자 동아광장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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