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헌법이 아니라 정치다
( 한반도선진화재단 감사, 강경근 숭실대 법대 교수·헌법학)
결국, 그리고 드디어 헌법 문제가 정치적 의제로 등장했다. 노 대통령이 9일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를 ‘4년 연임’으로 바꾸자며 개헌을 제안한 것이다. 너무 늦지 않은 시기에 헌법이 부여한 개헌 발의권을 행사하겠다고 한 대통령의 이 담화는 헌법개정발의권의 ‘유인(誘引)’이라는 헌법적 효력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헌법적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대통령의 이 개헌 유인 행위에는 국회에 드리는 말씀이 있어야 했다. 대통령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은 그 공고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국회에서 의결되어야 하며 그것도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국회 및 원내 다수당 내지 야당 등에 대해서 그 이해를 구한다든지 또는 구했다는 내용은 찾기 어렵다.
담화에서는 국회에서 의결된 다음에야 비로소 국민투표권자로서 등장하는 국민의 합의를 구한다든지, 또는 개헌의 절차를 정한 헌법 규정의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비헌법적 용어인 ‘정치권’이라는 불투명한 주체에게 각별한 관심과 결단을 당부드린다고 할 뿐이다. 그 정치권이 어디까지인가? 노 대통령이 말한 “책임있는 국정을 위해서” 개헌을 하겠다는 담화의 헌법적 진정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다음으로 노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인 개헌발의권을 행사하여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며, 중임(重任)할 수 없다’라는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를 ‘4년 연임제’로 바꾸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는 지금 민심의 소재, 즉 국민적 합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진정으로 헤아리지 아니한, 참으로 정치적인 제안이다.
대통령의 임기연장 또는 중임변경을 위한 헌법개정은 그 헌법개정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효력이 없다. 이는 노 대통령이 이번의 개헌안으로는 정치적으로는 몰라도 헌법적 책무는 지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 준다. 반면 실제 개헌안이 발의되면, 1년 남짓한 임기를 남겨 놓고 있는 현직 대통령이 의당 그 책무로서 하여야 할 차기 대통령 선출을 위한 준비와 실행이라는 국정관리자로서의 선량한 주의의무보다는 남과 북을 포괄할 수 있는 정치권 전체로 판을 벌리게 된다. 민생회복이라는 국민의 여망을 실현하는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5년 단임제가 이제 그 사명을 다했다고 하면서, 이번 개헌이 국정의 책임성과 안정성을 제고하고, 국가적 전략과제에 대한 일관성과 연속성을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지상(紙上) 논리다. 현실의 명제가 아니다. 국민들은 대통령 단임제 때문에 살기 어려워졌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헌법을 고쳐야 된다는 생각도 없다.
문제는 지난 몇 분의 단임 대통령과 현 정부가 ‘이제 됐다’고 하는 정치적 해이에 빠져, 헌법 정신을 헤아려 국민과 대화하여 국정을 운영하질 않고, 역사와 대화한다느니 바로 세우겠다느니 과거를 묻겠다느니 하면서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과거의 유령과 대화하는 몽유(夢遊)를 해 온 것에 대한 지긋지긋함에 있는 것이지, 헌법에 대해서는 유감이 없다.
설령 4년 연임으로 고친다 해도, 지금의 정당 및 선거 그리고 공직 제도하에서는 첫 번째 임기 말에 재선을 의식한 표 모으기를 위해 지금보다 더 왜곡된 정책에의 유혹을 가질 것이며, 일단 재선된 다음에는 지금의 단임제와 같은 행태가 되풀이되어, 국민은 5년이 아니라 8년을 지켜보아야 할 수도 있다. 헌법의 문제가 정치가의 면전에서 요리된 거의 매 경우 헌정 질서가 왜곡되어 온 지금까지의 9차례 헌법 개정의 그 경험을 우리 국민들은 잊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은 이번 개헌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규범을 담아야 할 필요성 때문이라 하는데, 헌법은 이른바 ‘시대정신과 가치가 제도화된 틀’이 아니라, 그런 것들에 휘둘리지 않는 보편적 질서를 공동체에 세우고자 하는 잣대, 즉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가 제도화된 틀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 이글은 조선일보 2007년 1월 11일자 조선일보 [시론]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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