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30 10:08:55
◆박재완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의 칼럼입니다.
필자가 사는 대단위 아파트단지는 공중목욕탕을 자체 운영한다. 탈의장 거울에는 큰 글씨로 쓴 아래 수칙이 붙어 있다. “우리 단지의 품격입니다. 꼭 지켜주세요. 1. 수건은 한 장씩만 씁시다. 2. 헤어드라이어는 머리칼 건조에만 사용합시다. 3. 스킨과 로션은 얼굴에만 바릅시다.” 그러나 이런 간곡한 당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주민들이 수두룩하다. 자기가 쓴 수건이나 일회용품을 팽개치고 떠나는 일도 흔하다. 서로 면식이 있고 소득과 교육 수준이 꽤 높은 주민들인데도 그렇다. 이웃 일본과 뚜렷이 대비된다.
공인들은 어떤가. 2018년 A당 비례대표 의원은 한동안 B당 대변인으로 맹활약했다. 2019년 정기국회에선 C당이 참여한 ‘4+1 협의체’가 패스트트랙 법안에 합의했지만, 정작 C당 원내대표는 그 과정에서 아예 배제됐다. 지난 연말 청와대는 법무부 장관 후보자 청문보고서를 신정까지 하루 만에 제출하라고 국회에 요청했다. 법무부는 입법예고를 이례적으로 건너뛴 채 검찰청 직제를 개편하고선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던 간부들 인사를 단행했다.
더 열거할 필요가 있을까. 온 나라가 어수선하다. 상식·기본이 흔들리고 각박해졌다. 남에게 가혹하고 자신에겐 너그럽다. 최근 여와 야, 청와대·법무부와 검찰의 날 선 공방에는 상대를 향한 증오가 배어 있다. 게다가 사익은 알뜰히 챙기면서도 공동체나 미래 세대에 대한 배려는 미흡하다. 필자를 포함한 우리의 자화상이다.
우리는 서구식 개인주의보다 동양식 집단주의 문화에 더 친숙하지만, 의외로 공민(公民)의식이 희박하다.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권리로서의 ‘선호적 자유’만 알지 배려와 포용을 강조하는 의무로서의 ‘이성적 자유’에 대한 이해는 얕다. 공동체가 구성원의 지성·사려·선택과 책임으로 유지된다는 기초논리조차 간과되기 일쑤다. 공화주의의 전제인 ‘비(非)지배 자유’, 곧 권력·다수결·여론·관행으로부터 소신과 주관을 지킬 자유도 종종 무시된다. 일부 진영의 이른바 ‘문자폭탄’이나 ‘댓글 테러’가 그 본보기다.
나아가 자신이나 소속집단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위선·무고(誣告)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과 딱히 상관없는 상대는 경청·존중하기는커녕 폄하·험담·비판·음해하기 바쁘다. 17세기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용어를 빌리면 우리는 인간 본성인 ‘질투와 불신의 정념’을 규범과 제도로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있다. 인내와 관용은 졸아든 대신 노여움과 원망이 넘쳐 각자도생을 넘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상이 됐다.
고 박세일 교수는 “오늘날 한국엔 금욕과 선공후사(先公後私)를 강조하는 선비정신이 절실하다”고 했다. “한국에서 가장 부족한 덕목은 공공성에 대한 시민적 헌신”(윤평중 교수)이라거나 “한국은 거짓말의 나라”(이영훈 교수)라는 뼈아픈 지적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공민의식이 엷고 사회기강이 느슨해서는 결코 문명국 반열에 오를 수 없다.
공동체 유지의 주춧돌은 ‘법치’, 기둥은 ‘예치(禮治)’, 마룻대는 ‘덕치(德治)’다. 하지만 그나마 ‘낮은 길’인 법치조차 아직 정착되지 못했다. 불법 주정차나 쓰레기 투기 등 기초질서 위반은 예사이고, ‘김영란법’ 일부 조항은 사문화됐다. 공공기관·문화재·대기업 주변 등에 어지럽게 내걸린 자극적인 문구의 현수막과 확성기에서 내뿜는 투쟁가 소음도 기승부린다. 현실과 동떨어지거나 너무 엄격한 법규는 되려 위법행위를 조장하고 법의 경시 풍조마저 잉태한다.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들고, 만들어진 법은 예외 없이 엄정하게 집행해야 한다.
‘중간 길’인 ‘예치’는 갈 길이 더 멀다. 신뢰·승복·관용·인내·절제를 바탕으로 약속과 예의를 지키는 문화는 오히려 퇴보했다. 인터넷 댓글에는 욕설이 가득하고, 버스나 지하철의 가방 받아주기 등 선의의 관행은 사라졌다. 메시지 자체보다 지지 정당, 출신지, 집안, 용모 등 메신저를 둘러싼 옹졸한 논쟁이 더 치열하다. 어린이집 보육과정부터 인성·공민교육을 강화하고 범국민 자각 캠페인을 펼쳐야 한다. 그리하여 적어도 거짓말만큼은 금기로 삼고 관용하지 않는 원칙을 확립해야 하겠다.
‘높은 길’인 ‘덕치’는 아예 요원하다. 칭찬·응원·포용·양보·배려·헌신을 기조로 국정 운영의 ‘협치’를 구현해야 한다. 진영논리에 따른 ‘찬성을 위한 찬성’과 ‘반대를 위한 반대’의 진흙탕 싸움은 상처뿐인 영광의 악순환만 낳을 뿐이다. 편협하고 닫힌 민족주의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국력에 걸맞게 이젠 우리도 지구촌에 대한 책임을 당당히 분담할 때가 됐다. 호르무즈해협 파병이 오직 우리 국익과 부합하는지만 따졌다는 당국자 발언은 실망스럽다. 그런 태도는 6·25 참전국들의 신의를 저버리는 셈이다. 아울러 노르딕 국가들 수준까지 미치지는 못해도 저소득국 개발원조, 온실가스 감축, 입양, 비닐·종이 사용 절감 등에도 힘써야 하겠다.
공인들은 어떤가. 2018년 A당 비례대표 의원은 한동안 B당 대변인으로 맹활약했다. 2019년 정기국회에선 C당이 참여한 ‘4+1 협의체’가 패스트트랙 법안에 합의했지만, 정작 C당 원내대표는 그 과정에서 아예 배제됐다. 지난 연말 청와대는 법무부 장관 후보자 청문보고서를 신정까지 하루 만에 제출하라고 국회에 요청했다. 법무부는 입법예고를 이례적으로 건너뛴 채 검찰청 직제를 개편하고선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던 간부들 인사를 단행했다.
더 열거할 필요가 있을까. 온 나라가 어수선하다. 상식·기본이 흔들리고 각박해졌다. 남에게 가혹하고 자신에겐 너그럽다. 최근 여와 야, 청와대·법무부와 검찰의 날 선 공방에는 상대를 향한 증오가 배어 있다. 게다가 사익은 알뜰히 챙기면서도 공동체나 미래 세대에 대한 배려는 미흡하다. 필자를 포함한 우리의 자화상이다.
우리는 서구식 개인주의보다 동양식 집단주의 문화에 더 친숙하지만, 의외로 공민(公民)의식이 희박하다.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권리로서의 ‘선호적 자유’만 알지 배려와 포용을 강조하는 의무로서의 ‘이성적 자유’에 대한 이해는 얕다. 공동체가 구성원의 지성·사려·선택과 책임으로 유지된다는 기초논리조차 간과되기 일쑤다. 공화주의의 전제인 ‘비(非)지배 자유’, 곧 권력·다수결·여론·관행으로부터 소신과 주관을 지킬 자유도 종종 무시된다. 일부 진영의 이른바 ‘문자폭탄’이나 ‘댓글 테러’가 그 본보기다.
나아가 자신이나 소속집단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위선·무고(誣告)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과 딱히 상관없는 상대는 경청·존중하기는커녕 폄하·험담·비판·음해하기 바쁘다. 17세기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용어를 빌리면 우리는 인간 본성인 ‘질투와 불신의 정념’을 규범과 제도로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있다. 인내와 관용은 졸아든 대신 노여움과 원망이 넘쳐 각자도생을 넘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상이 됐다.
고 박세일 교수는 “오늘날 한국엔 금욕과 선공후사(先公後私)를 강조하는 선비정신이 절실하다”고 했다. “한국에서 가장 부족한 덕목은 공공성에 대한 시민적 헌신”(윤평중 교수)이라거나 “한국은 거짓말의 나라”(이영훈 교수)라는 뼈아픈 지적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공민의식이 엷고 사회기강이 느슨해서는 결코 문명국 반열에 오를 수 없다.
공동체 유지의 주춧돌은 ‘법치’, 기둥은 ‘예치(禮治)’, 마룻대는 ‘덕치(德治)’다. 하지만 그나마 ‘낮은 길’인 법치조차 아직 정착되지 못했다. 불법 주정차나 쓰레기 투기 등 기초질서 위반은 예사이고, ‘김영란법’ 일부 조항은 사문화됐다. 공공기관·문화재·대기업 주변 등에 어지럽게 내걸린 자극적인 문구의 현수막과 확성기에서 내뿜는 투쟁가 소음도 기승부린다. 현실과 동떨어지거나 너무 엄격한 법규는 되려 위법행위를 조장하고 법의 경시 풍조마저 잉태한다.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들고, 만들어진 법은 예외 없이 엄정하게 집행해야 한다.
‘중간 길’인 ‘예치’는 갈 길이 더 멀다. 신뢰·승복·관용·인내·절제를 바탕으로 약속과 예의를 지키는 문화는 오히려 퇴보했다. 인터넷 댓글에는 욕설이 가득하고, 버스나 지하철의 가방 받아주기 등 선의의 관행은 사라졌다. 메시지 자체보다 지지 정당, 출신지, 집안, 용모 등 메신저를 둘러싼 옹졸한 논쟁이 더 치열하다. 어린이집 보육과정부터 인성·공민교육을 강화하고 범국민 자각 캠페인을 펼쳐야 한다. 그리하여 적어도 거짓말만큼은 금기로 삼고 관용하지 않는 원칙을 확립해야 하겠다.
‘높은 길’인 ‘덕치’는 아예 요원하다. 칭찬·응원·포용·양보·배려·헌신을 기조로 국정 운영의 ‘협치’를 구현해야 한다. 진영논리에 따른 ‘찬성을 위한 찬성’과 ‘반대를 위한 반대’의 진흙탕 싸움은 상처뿐인 영광의 악순환만 낳을 뿐이다. 편협하고 닫힌 민족주의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국력에 걸맞게 이젠 우리도 지구촌에 대한 책임을 당당히 분담할 때가 됐다. 호르무즈해협 파병이 오직 우리 국익과 부합하는지만 따졌다는 당국자 발언은 실망스럽다. 그런 태도는 6·25 참전국들의 신의를 저버리는 셈이다. 아울러 노르딕 국가들 수준까지 미치지는 못해도 저소득국 개발원조, 온실가스 감축, 입양, 비닐·종이 사용 절감 등에도 힘써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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