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30 15:40:10

‘담배 연기 자욱한 방.’ 정치적 흥정과 담합으로 공천을 결정하는 밀실을 빗댄 말이다. 한줌의 정당 실세들이 공천을 마음대로 주물러 후보를 내려보내는, 이른바 하향식 공천을 비판하는 표현이다. 1920년부터 미국에서는 부정과 부패 선거를 상징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밀실에 모인 실세들은 국민의 뜻을 무시하므로 믿을 수 없다는 도도한 개혁의 흐름 속에 하향식 공천은 국민이 참여하는 상향식 공천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유권자들이 후보를 직접 뽑는다는 미국의 예비선거는 소수 당원들만의 게임이 되고 있다. 일반 국민은 여전히 누가, 어떻게 후보가 되는지 모른다. 사실상 후보는 유권자의 선택이 아니다. 자신의 실력만으로 공천 경쟁에서 이겼다고 믿는 당선자들은 당의 정책에 반기를 들기 일쑤다. 민주주의를 진작하기 위한 국민 참여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근간인 정당의 체계와 질서를 흩뜨리고 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일각에서는 100년 전의 ‘담배 연기 자욱한 방’의 시대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당 지도부가 공천하는 하향식 공천이 오히려 상향식 공천보다 더 낫다는 것. 오죽하면 흘러간 물을 되돌리려고 하겠는가. 하향식 공천은, 다시 담배를 자유롭게 피울 수 있는 시대로 돌아가자는 얘기만큼이나 이뤄지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만큼 상향식 공천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주장이다.
여야 즉흥적 상향식 공천 결정
한국의 6·4지방선거 공천 과정을 보면 담배를 그리워하는 사람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나무라기 어렵다. 시민들에게 공천권을 돌려준다는 상향식 공천제는 새로운 ‘담배 연기 자욱한 방’이 되었다. 상향식 공천이 지방의 토착, 토호 세력들에게 새로운 흥정과 담합의 기회를 준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난히 인간관계를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문화가 고스란히 공천 과정에 반영되었다. 돈을 받고 표를 팔려는 유권자와 그들을 중개하는 동네 선거꾼들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타락한 선거 문화와 풍토가 변함없이 공천 과정을 휩쓸었다. 좁은 지역에서 향응과 이권으로 얽혀 있는 기득권 세력과 자치단체장이나 의원들은 서로 밀어주며 공천을 따냈다. 부패한 동네 정치세력이 경선에서 이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결국은 담배 연기 자욱한 밀실에서 이뤄지는 하향식 공천과 다를 바 없는 공천이 ‘상향식’이란 그럴듯한 이름으로 이뤄진 것이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밀실이 위치한 곳만 바뀌었을 뿐이다.
거기에다 신뢰하기 어려운 여론조사 결과가 크게 반영되면서 상향식 공천의 품질은 더 떨어지고 말았다. 만약 언론사가 여론조사를 보도할 때 오차범위 ±3∼5%포인트를 표기하지 않으면 법의 제재를 받는다. 통계상 별 의미가 없는 격차이지만 오차범위라고 밝히지 않으면 유권자가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겨우 0.1% 차이로 승부를 가르는 등 많은 후보가 오차범위 내의 격차로 결정되었다. 이것은 과학에 대한 맹신도 아니고 무지한 용기의 결과이다. 해외 토픽에 오를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방선거 무공천 여부를 둘러싸고 오락가락하던 여야 모두 즉흥적 상향식 공천 결정을 했다. 후유증은 크다. 경선 과정은, 적과 싸우기도 전에 쓸데없는 당내 갈등과 투쟁을 증폭시켰다. 당은 효율적 인적 관리에 실패했다. 정당 질서가 무너졌다는 우려가 심각하다. 그래서 하향식 공천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담배에 대한 향수처럼 강하게 정당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향식으로 돌아가면 유권자들은 국회의원들과 당 지도부의 비리와 투쟁을 또다시 보게 될 것이다.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들 경선과정 전혀 몰라
공천 과정은 정당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시간이다. 죽은피를 걸러내는 시간이다. 가장 많은 표를 얻으면 공천을 따내는 것이 아닌가. 매우 단순한 경기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보일 뿐이다. 일종의 블랙박스이다.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다 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어떤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볼 수 없다. 국민은 사실 경선 과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알기 어렵다.
명분은 그럴싸하지만 너무 많은 문제가 불거진 상향식 공천. 어떻게 할 것인가. 지방선거 이후 여야 모두에게 주어질 무거운 숙제이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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