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21
Weekly 경향/ 905호
[신동호가 만난 사람]
통일운동 나선 ‘보수의 대부’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통일이 되지 않으면 선진화가 될 수 없어요”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은 현 정권의 이념적 토대인 보수담론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 정책 브레인으로서 ‘세계화’를 국가적 아젠다로 만들고, 2005년 한반도선진화재단을 설립하면서는 ‘선진화’를 시대적 과제로 설정하는 등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적 거대담론의 생산자로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북한의 연평도 포격사태가 발생한 지난 11월 23일 박 이사장은 세계화·선진화에 이어 또 하나의 중요한 국가적 의제를 띄웠다. ‘통일’이다. 이날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선진통일연합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박 이사장은 이 단체의 창립준비위원장이다.
‘보수의 대부’로 불리는 박 이사장의 이런 행보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은 성장과 복지를 중심으로 한 정책 논쟁을 주로 벌여왔다고 할 수 있다. 박 이사장의 선진화론은 복지보다 성장에 무게를 실은 것이다. 대북관계에서는 통일 논의보다 이른바 분단 유지나 관리 정책이 대세를 이뤘다.
박 이사장은 평화를 전제로 한 틀 속에서 진행되던 이런 논쟁을 뛰어넘어 새삼스럽게 통일이라는 화두를 꺼내놓았다. 게다가 단순히 연구하고 논의하는 차원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일, 즉 ‘운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12월 8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공동체자유주의연구소에서 박 이사장을 만났다.
호가 영성(領星)이던데요, 특이하군요.
“아, 그거 청담 스님이 지어준 거예요. 고등학교 때 불교단체에서 활동했는데 그렇게 써놓고 가셨더라고요. 요즘은 위공(爲公)이라고도 가끔 씁니다. 제가 좋아하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말에서 딴 것인데, 사람들이 그걸 더 권하더군요.”
좌우명이 ‘이천하(以天下) 관천하(觀天下)’로 되어 있던데, 그건 무슨 뜻인가요.
“<도덕경>에 나오는 것인데, 제가 좋아하는 말이지요. 이천하지심(以天下之心) 관천하지사(觀天下之事), 즉 세상의 마음으로 세상의 일을 보라는 거죠. 백성의 마음으로 천하의 일을 보라는 뜻입니다.”
위공이나 이천하 관천하가 그의 보수적 가치관과 어떻게 연결될까. 그리고 통일과는 어떻게 맥이 닿을까.
그동안 줄곧 선진화를 강조했는데 최근 갑자기 통일을 들고 나온 까닭이 뭡니까.
“두 가지 이유에섭니다. 하나는 선진화를 죽 연구하다 보니까 통일이 되지 않으면 선진화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또 하나는 통일의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올 수 있다는 겁니다. 선진화를 통해 국력을 상당히 키운 다음에 통일의 시대를 맞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우리의 선택에 관계없이 통일의 시대가 빨리 오기 때문에 통일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좌파든 우파든 통일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말로는 통일을 얘기하지만 어느 쪽도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갖고 있지 않잖아요. 그동안 진보는 화해와 협력으로 분단을 유지함으로써, 보수는 원칙과 상호주의를 가지고 분단을 관리함으로써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는 전략이었어요. 요즘은 얻어맞아도 가만히 있으면서 현상을 관리하는 모습입니다. 이제는 분단의 평화적 관리가 어려운 시대가 된 겁니다.”
북한의 연평도 도발 때 제대로 응징을 못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더군요.
“정부도 그렇고 군도 그렇고 아직은 분단 관리적인 사고가 지배적이에요. 상대방이 공격해도 적극적인 반응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분단이 우리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분단관리론 입장에서는 확전의 위험이 있는 일은 못하겠죠.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평화를 지킬 수 없습니다. 전쟁을 각오해야지 평화를 지킬 수 있고, 확전을 각오해야지 제대로 된 응징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박 이사장께서 말하는 통일에는 흡수통일도 포함돼 있는 겁니까.
“저는 흡수통일이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얘깁니까.”
당황스럽게도 박 이사장은 거꾸로 인터뷰어에게 물었다. 얼떨결에 “북한을 무너뜨려서 합치는 것 아닙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는 “그렇다면 북한을 안 무너뜨리고 합치는 방법이 뭔가요”라고 재차 질문했다. 인터뷰 대상자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 적은 있지만 반대 경우를 당하긴 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어색해질 뻔했던 분위기가 함께 웃음을 터뜨리면서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왜 제가 구체적으로 물어봤느냐면 흡수통일은 해서는 안 된다고 많이들 생각하거든요. 저는 (흡수통일을) 안 해야 되는 게 뭐냐는 거죠. 아까 얘기와 연장선상에서 우리나라 지도자와 국민은 통일을 두려워하며 살아왔습니다. 지난 10년간 정부가 나서서 북한의 붕괴를 원하지 않는다든가 통일비용에 대해서 막 얘기했어요. 통일에 매우 소극적인 국민적 정서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흡수통일은 해선 안 된다고 하는데, 흡수통일이 뭡니까. 그래서 물은 거예요.”
박 이사장은 냉전이 끝나고 체제 경쟁도 끝난 이상 냉전의 산물인 한반도 분단이 계속될 이유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우월하지 못한 체제가 우월한 체제로 수렴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동독의 체제가 서독의 체제로 흡수통일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그는 이를 흡수통일보다 ‘수렴통일’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예전에 문익환 목사께서 남한과 북한의 장점을 취해서 제3의 길을 가는 게 어떠냐고 한 적 있습니다. 이번에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도 비슷한 얘기를 했고요. 그런 방법은 사회과학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계획경제와 시장경제, 독재와 민주는 서로 나눠지는 것이지 그 사이란 없거든요. 그런 점에서 통일은 남한이 북한을 흡수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거죠. 다만 흡수통일을 이루는 방법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겠죠.”
박 이사장은 우리가 북한을 흡수통일하지 않는다면 중국이 북한을 흡수통일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칫 우리가 통일의 기회를 놓치게 되면 북한이 ‘제2의 티베트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제2의 티베트화한다는 것은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겁니까.
“북한에 친중국 반통일 세력이 등장하는 경우를 얘기합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중국의 변방정권적인 성격을 띠면서 버퍼존(buffer zone, 완충지대)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겠죠. 한반도에 새로운 분단이 일어나고 통일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의 선진화도 불가능해지는 겁니다.”
선진통일연합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국민운동체라는 게 박 이사장의 말이다. 운동 방향은 네 가지라고 한다. 공동체운동, 선진화 정책운동, 정치개혁운동, 통일운동 등이다. 이 가운데 통일운동은 통일 비전 제시, 통일 과정에 대한 정책적 준비, 신동북아시대를 열 준비, 이웃 4강에 대한 설득, 국민적 합의 도출, 북한 동포에 대한 인도적 지원, 개혁·개방에 대한 협력 강화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문턱에서 지체하고 있는데, 선진화의 가장 큰 장애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정치 실패라고 보고 있습니다. 정치가 목적과 기능, 두 가지를 잃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치는 지금 국가전략이 없습니다. 정치 지도자들 간의 사적인 권력투쟁만 있습니다. 비전과 가치 지향의 정치가 아니라 이익 지향의 정치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자고 나면 싸움입니다. 왜 싸우는지는 국가전략상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권력투쟁상 필요해서입니다. 목적을 상실한 겁니다.”
정치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은 정치권이 집단적인 의사결정을 합리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박 이사장은 대표적인 예로 세종시 문제 처리를 들었다. 국민 다수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결정과 정치권이 만들어낸 결정이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정치가 목적과 기능을 잃으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포퓰리즘 경쟁이 시작되는 겁니다. 국가의 이익도 전략도 없으면 결국은 인기영합적인 포퓰리즘 경쟁의 시대, 포퓰리즘적인 정책이 양산되는 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게 선진화에 실패하는 지름길입니다.”
선진화나 창조적 세계화의 이론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이 공동체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해서 그런 이론을 고안했습니까.
“재미있는 건 두 달 전인가 제가 중국에 가서 중국 공산당 간부 교육기관인 중앙당교 교수를 만났는데 제가 공동체자유주의에 대해 쓴 논문을 밑줄을 그으면서 읽고 있었어요.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면서 크게 발전했지만 공동체가 약화된 데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해요. 세계적으로 이론화된 건 아니지만 공동체자유주의로 가는 게 대세라고 저는 봅니다. 어느 나라나 이름은 달라도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인 거죠. 손학규 민주당 대표도 전에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얘기를 했어요. 상당히 비슷한 측면이 있어요. 개인의 자유를 소중히 하지만 공동체에 대한 배려가 중요하다는 것인데, 다만 제가 얘기하는 공동체는 세 가지입니다. 사회공동체, 역사공동체, 그리고 자연공동체입니다.”
진부한 얘기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우리 사회의 보혁갈등이 점점 깊어져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보혁갈등이 가치의 대립이냐, 이익의 대립이냐를 봐야 합니다. 옛날에는 가치의 대립인 측면이 많았는데 최근에 와서 이익의 대립인 측면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가짜 진보와 가짜 보수가 많다는 거지요. 진보는 진보적 가치, 보수는 보수적 가치에 각자 충실해야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인권을 소홀히 하는 진보, 공동체를 소중히 하지 않는 보수는 다 가짜입니다.”
이념 문제에 대해 박 이사장은 다섯 가지를 언급했다. 가치가 아닌 이익 투쟁을 보수·진보라는 이름으로 하는 가짜가 많다는 것이 첫 번째 지적이다. 두 번째는 좌우갈등이 정치적으로 확대되고 이용되는 측면이다. 세 번째는 진보진영의 문제로서, 합리적 진보와 친북(또는 종북) 진보 간에 교통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보수진영 역시 철학적 보수와 정책편의주의적 보수가 구분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해서 진보는 합리적 진보 중심으로 힘이 모이고, 보수는 제도개혁적 보수로 힘이 모여서 이 두 세력이 힘을 합쳐서 대한민국의 선진화와 통일로 나가야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박 이사장 자신은 이념적으로 어느 지점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공동체자유주의를 얘기할 때 자유에 7, 공동체에 3 정도의 비중을 두는 것이 지금 우리한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비율은 절대적인 게 아니고 어느 나라냐, 어느 시점이냐에 따라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은 아직도 성장에 7, 복지에 3을 두는 게 맞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집니다. 하나는 아직 우리는 통일을 해 북한을 산업화시켜야 하는 과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직 우리는 선진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성장을 보다 중시해야 합니다. 또한 제가 시장을 중시하는 것은 시장이야말로 가난한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라는 게 증명됐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점에서 70% 정도 보수라고 보면 됩니까.
“그게 우리나라 역사 발전단계에 맞는다는 거죠. 앞으로 통일이 되고 북한도 선진화돼서 우리가 정말 중진국 단계를 넘어서 선진화된 통일국가에 이른다면 그때는 다시 5대 5로 되겠죠.”
선진화론을 실현하자면 현 정부에 직접 참여하는 게 좋을 텐데, 혹시 ‘러브콜’이 없었습니까.
“인사문제는 얘기하지 않는 게 예의입니다.(웃음) 제가 2005년에 국회에서 나와서 한반도선진화재단을 만들고 지금까지 선진과 통일을 위한 정책 연구를 해왔고 그걸 사회공론화하려고 노력했어요. 최근에 선진통일연합이라는 국민운동단체를 만들어서 단순히 정책 연구에서 끝내지 않고 국민과 직접 소통해서 선진과 통일의 과제를 풀어나감으로써 역사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선진화와 통일을 위해서는 어떤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두 가지 장점을 가진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먼저 공동체의 가치를 바로 세워주는 리더십입니다. 앞으로는 실용보다는 원칙을, 경제보다는 사상을 좀 더 강조할 수 있는 리더십이 요구될 것입니다. 또 하나는 통일과 동북아시대를 열 수 있는 리더십이어야 합니다. 앞으로 분명히 통일의 기회가 대단히 빨리 오고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포함한 새로운 동북아 시대가 열릴 텐데 그런 시대를 열어갈 국제적 감각과 자주 의식, 능력을 가진 국가 리더십이 등장해야 합니다.”
‘박세일 대안론’이라든가 ‘큰꿈론’, 그런 얘기도 있던데요.
“저는 못 들어봤는데…(웃음) 제가 청와대에서 3년 일을 봤습니다. 거기서 제가 느낀 건 대통령은 대단히 어려운 직위라는 겁니다. 탁월한 능력과 경륜과 참을성과 자기헌신성이 있어야 하는 게 대통령의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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