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이회창 연대설과 민주당의 고립
'가치연대' 뒤 '지역 연대'가여권의 진짜 노림이라는데
민주당은 호남과 DJ·노무현의옛 그늘 품만 파고들고 있으니
이명박 대통령과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간의 연대설(連帶說)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5·16 쿠데타 때 쿠데타 소식을 접한 당시 대통령은 "올 게 왔다"는 말을 입에 올렸다는 소문으로 한동안 구설(口舌)에 시달렸다. 쿠데타를 용인한 게 아니냐는 시비에 휘말린 것이다. 그럼에도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긴 잠을 자던 "올 게 왔다"는 위험한 말을 꺼낼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딱한 정치 현실이다. 오래전부터 국민들은 정치가 이래서는 안 된다, 뭔가 돌파구가 있어야 한다는 답답하고 절박한 생각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나눠 가져 왔다.
정치 불신론(不信論)이 정치 무용론(無用論)으로 번져가는 요즘이다. 국민은 제도권 정치의 주역인 정당·국회·국회의원의 역할에 대한 기대를 사실상 접은 상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대통령과 야당, 여당과 야당이 마음을 열고 대화한 적이 없다. 국정의 주요 현안과 중요 법안이 국회에서 제때 제대로 다뤄진 적도 없다. 비정규직 관련 법안, 해외파병 국군의 파병 연장 동의안, 사이버 위기관리법 등 정쟁(政爭) 범위 밖에 있을 듯한 법안마저 처리 기한을 넘겨 버렸거나 기한이 목에 차 있는데도 신경 쓰는 곳이 없다. 의사봉 두드리는 소리보다 쇠망치와 쇠톱으로 문짝 부수는 소리가 더 자주 더 크게 들리는 게 우리 국회다. 국회가 열릴 조짐만 보여도 국회 중앙 홀은 농성장으로 바뀌고 만다. 정치를 바꿀 새로운 동력(動力)이 절실하다.
그러나 대통령과 여당엔 그럴 힘이 없다. 대통령을 만들어주고 집권당으로 일으켜 세워준 민심(民心)을 잘못 읽고 체력을 허투루 써버린 탓이다. 2007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는 투표자의 48.7%인 1149만여표를 득표했다. 617만여표를 얻은 2위 정동영 후보의 2배에 육박했다. 이명박 정권은 2위 후보와 사상 최대 득표 차(差)를 벌린 이 결과를 사상 최대 승리로 받아들였다. 그때 투표율은 사상 최저인 63%였다. 여기에 이 후보의 득표율 48.7%를 대입(代入)하면 이명박 후보의 전체 유권자 대비(對比) 득표율은 30.5%다. 투표 기권율 37%에도 미치지 못했다. 전체 유권자 대비 득표율에선 87년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4자 대결의 승자 노태우 후보나 2002년 노무현 후보에도 미달했다. 민심을 바로 읽었더라면 처음부터 정치 체력을 아껴 썼을 터인데 그러질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의 연대설은 얼마 전 나왔던 '중도(中道) 강화론'과 함께 현재의 답답한 정치적 교착 상태를 풀어가려는 시도다. 여권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존중하는 세력끼리 힘을 합친다는 뜻이라며 이 움직임에 '가치(價値)연대'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다. 지금 정당 구도에선 한나라당과 이념적 공조가 가능한 파트너는 선진당밖에 없다. 그런 뜻에선 '가치연대'가 과대포장은 아니다. 그러나 이명박·이회창 연대에 대한 기대심리는 '가치연대' 측면보다는 그 뒤에 따라붙는 '지역연대'로부터 우러나온다고 봐야 한다. 영남에서 충청으로 확대된 여권의 지역기반은 호남―그것도 전북― 안으로 후퇴한 민주당을 압도한다. '중도 강화론'과 '가치연대'가 효과를 측정하기 힘든 이미지 개선용 '정치 어음'이라면 '지역연대'는 정치 현장에서 즉각 표(票)로 바꿀 수 있는 '정치 현찰'에 해당한다. 내년 5월 지방선거부터 연대의 효과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여권은 연대가 성사되면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는 덤까지 얻게 된다. 박 전 대표를 이회창 총재를 비롯해 강재섭 정몽준 등등으로 짜인 차기 경쟁 구도 안에 가두는 꿈을 꾸는 사람도 있을는지 모른다. 박 전 대표 반응이 관심사다.
그러나 이렇게 돌아가는 여권 상황을 주목해야 할 진짜 당사자인 민주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작년엔 촛불을 쫓아다니느라, 올해는 노무현 전 대통령 상가에서 상주(喪主) 노릇에 겨를이 없었던 민주당이다. 그 덕에 지지율이 20%대에 들어섰다며 흐뭇해 한다고 한다. 지역연대는 역대 집권세력이 정국의 안정 운영을 위해, 야당은 집권세력으로 딛고 올라서기 위해 되풀이 불러냈던 오래된 수법이다. 여·야 어느 쪽이 먼저 성사시키느냐로 승부가 난다. 노태우·김영삼 시대의 3당 합당에서 김대중 시대의 DJP 연합을 거쳐 노무현 시대의 수도이전 공약까지 다 이런 흐름 위에 놓여 있다. 이 모든 조합(組合)의 핵심은 충청권이다. 충청권을 품는다는 것은 득표 효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극단적인 정치 컬러를 유연하게 돌려놓는 데도 효과가 있다. DJP 연합은 DJ의 이미지를 묽게 희석시켜 DJ를 향한 거부 반응을 크게 누그러뜨려 집권의 길을 뚫었다.
민주당의 미래 활로는 호남 밖으로, 그리고 DJ와 노무현 이미지 밖으로 뻗어나가 새 지지층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민주당은 자꾸만 호남 안으로, DJ·노무현의 옛 이미지 그늘 속으로 파고들고만 있다. 그건 과거의 길이지 미래의 길이 아니라고, 그건 사는 길이 아니라 천천히 죽는 길이라 해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 이 글은 2009년 7월 10일자 조선일보[강천석 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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