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의견 배척하는 문화 사라져야 한다”
“갈등 증폭시키는 막말은 곤란”“보수·진보,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모습 보여야”
“국론이 이렇게 갈라지고 있으니….”
이인호 카이스트 석좌교수(73)는 한동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국가 원로로서 우리 사회가 갈등과 분열 구도에 휩싸이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 걱정했다. 그녀는 자신의 성향에 대해 ‘무색무취’하다고 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시국선언, 남북 관계 등의 현안에서는 보수 성향의 목소리를 냈다. 또한,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무능하지만 좀더 지켜봐야 한다”라고 했다.
이인호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사’로 유명하다. 서울대 교수이던 1996년 주핀란드 대사에 발탁된 이후 주러시아 대사를 역임했다. 지난 2007년에는 ‘건국 60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지난 3월에는 대통령 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에 위촉되었다. 지난 6월11일 오전 서울 시내 한 호텔 커피숍에서 2시간 넘게 그녀를 만났다.
어떻게 지내는가?
반은 은퇴한 상태로 지낸다.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사회 원로로서 중요한 사회 문제에 대해 가끔씩 의견을 내고 있다.
스스로 자신의 성향이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얼마 전에 한 제자 교수가 나한테 ‘옛날에는 좌측인데 지금은 우측으로 돌아간 것 같다’라는 말을 했다. 내가 지향하는 것은 보수나 진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사이에 걸쳐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진보적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보수 쪽에 기울어진 부분도 있다. 어떤 사안이냐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다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우리 사회가 극단적으로 분열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어떻게 보는가?
전직 대통령이 자살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이 자살한 원인은 본인 스스로에게 있다. ‘깨끗한 정치’를 표방하며 대통령이 되었지만, 부정부패가 드러났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검찰 조사도, 자살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표적 사정’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계속 있었다. 노 전 대통령도 자살보다는 용감하게 처벌받고 나서 재기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공인은 완전히 발가벗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공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는 교훈이 되어야 한다.
요즘 막말과 독설이 난무하고 있다.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알고 있다. 인간적인 훈련이 되어 있으면 막말을 쏟아낼 수가 없다. 인간은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데 그것을 망각하는 행동이다. 가만히 보면 막말은 의도적이다. 상대편을 흠집내고 매도하기 위해 일부러 막말을 내뱉는 경향이 있다. 그런 면에서 일부 지식인들의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런 막말들이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최근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라며 대학가를 중심으로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이대통령이 독선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소신이 부족하고 인사 정책의 실패에서 오는 능력 부족이 독선으로 표출된 것이다. 지금의 정부가 국민에게 실망을 주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정부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지금의 시국선언은 4·19나 유신 시절과는 상황이 다르다. 그때는 폭력의 근원지가 정부였고,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지금의 시국선언은 의견이 다른 상황에서 터져나왔다. 어느 사회나 양론이 있을 수 있는데, 내 의견과 맞지 않다고 해서 다수의 의견인 것처럼 대응하는 것은 잘못이다. 설득력도 약하다. 국제적인 환경도 좋지 않은데 국론까지 분열되고 있어서 매우 걱정스럽다. 정치인들의 광장 정치도 비판받아야 한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민주주의를 회복하라'며 거리로 나섰다.
국민 전체가 거리로 나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정치 활동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환경 분야의 시민단체가 새로운 환경 문제를 들춰내서 이슈화하고 개선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다. 하지만 NGO(비정부기구) 단체들이 정치 문제에 끼어들어 정부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문제이다. 국민 절반 이상이 공감하고 있는 문제라면 NGO나 교수들이 나서서 성명을 낼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야당 정치인들도 당장 국회로 들어가야 한다. 의회 정치는 국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양당 정치라는 것이 서로 보완해가는 것인데, 서로 잘났다고 싸우면 국민만 불안하다. 여당도 숫자를 가지고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국민을 설득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좌우 대립 속에서 ‘합리적인 중간’이 묻혀버리고 있다는 목소리가 있다. 중간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안이 필요하지 않나?
우리 사회는 어느 한쪽에 줄을 서라고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토론회나 세미나에서 찬반 양쪽으로 줄을 세우는 것과 같다. 중간의 존재는 항상 감추어져 있다. 내가 어느 곳에 글을 기고했다고 치자. 그러면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 내 글을 읽어주어야 의미가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은 아예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말만 듣고 싶어 한다. 그것이 문제이다. 중간을 대변할 수 있는 대안도 필요하겠지만, 우선 다른 목소리도 들어줄 수 있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보수나 진보 어느 쪽이 항상 잘한다거나 옳을 수는 없다. 정치만 보더라도 사안에 따라 여야가 서로 잘하거나 잘못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도 좌우로 나뉘어서 서로 싸운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없고 오로지 대결뿐이다. 이런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 살리기’와 ‘국민 통합’을 대권 공약으로 내세웠다. 취임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경제가 좋지 않은 것은 세계 경제의 영향이 크다. 그 다음이 정부의 무능이다. 경제 정책이 너무 한쪽에 치우친 나머지 국민들에게 ‘부자들을 위한 정책’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민심 이반을 가져온 요인이다. 특히 양도소득세 등 세제 개혁을 하려면 국민을 충분히 설득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국민 통합도 그렇다. 계층 간의 갈등이라는 말은 이미 무색해졌다. 중산층이 극빈층으로 떨어질 수 있고, 극빈층이 중산층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사회라도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결과를 보장받을 수 없다. 노무현 정부 때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더 심해진 것이 그렇다. 복지의 하한선을 높이는 노력이 끊임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해고되더라도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복지 체제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것이 통합에 이르는 길이다.
북한과의 갈등 관계가 긴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의 대북 정책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현 정부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햇볕 정책은 무력 도발은 절대 허용하지 않고, 한·미 방위조약을 지킨다는 단서가 있었다. 그런데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남한은 북한에 계속 양보했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얻는 것도 없으면서 북한에 의해 마구 흔들렸고, 북한의 협박은 줄어들지 않았다. 비핵화를 통해 남북 교류를 넓히자는 ‘남북기본합의서’가 가장 좋은 해결 방안이었으나 북한이 계속 어겨왔다. 우리가 북한에게 양보한다고 해서 북한의 협박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다. 북한 문제는 미국, 일본 등 이웃 나라와 공조해서 해결해야 한다.
지난 3월에 대통령 자문 ‘국민원로회의’가 출범했다. 이교수도 위원인데, 대통령께 어떤 말을 주로 하는가?
지금까지 세 번 정도 회의가 열렸다. 기구가 너무 커서 실제로 유명무실해지는 것 같다.
카이스트 입학사정관이 되었다. 입학사정관 제도가 성공할 것 같은가?
정부가 돈을 지원해서 하루아침에 시작한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된다. 학교마다 준비가 된 곳도 있고, 안 된 곳도 있다. 그런데도 일방적으로 시행한다면 효과가 있을 리 만무하다. 입학사정관은 주관적인 평가 요소를 강화해서 장점을 살리자는 것이다. 각 학교마다 자체 요강을 만들어서 충분한 준비를 거친 다음에 시행해야 하는데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것은 잘못이다. 입학사정관은 실패가 뻔히 보이는 제도이다.
정부, 정치권,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한다면 지금 같은 대립과 분열은 없을 것이다. 좌우를 떠나 ‘나라를 위해서’라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한다. 또, 정부를 탓하기 전에 ‘정부의 수준이 바로 국민의 수준’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국민이 뽑았다면 거기에 대한 책임도 국민에게 있다. 정부가 잘 되게 하는 의미에서 비판이 있어야지 무조건 끌어내리겠다는 것은 문제이다.
♤ 2009년 6월 17일(수) 시서저널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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