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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석] '노 변호사', '노 전 대통령'으로 돌아가세요
 
2009-04-20 14:20:01

 '노 변호사', '노 전 대통령'으로 돌아가세요

 

"'바보 노무현' 믿었던 지지자들 '약은 모습'에 상처받아
'부끄럽고 민망하고 구차스러워'하는 국민 심정부터 헤아려야"

'노무현 전 대통령 가족 드라마'도 이제 대단원(大團圓)으로 접어들고 있다. 다음 주에는 노 전 대통령 본인이 검찰에 출두한다고 한다. 엊그제까지 겹겹 경호를 받던 대통령 가족이 한 사람씩 소환돼 조사를 받고, 그 모습이 연일 신문과 TV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는 건 보통 괴롭고 무참한 일이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출두 날을 생각하면 벌써 아찔하다. '전 대한민국 대통령이 TV 카메라가 숲을 이룬 틈새를 비집고 검찰청사로 들어가 장시간 조사를 받고 자정 무렵 초췌한 얼굴로 되돌아 나온다… TV는 이 장면을 세계의 안방에 퍼 나른다… 각국 TV는 영어 불어 독어 스페인어로 대한민국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해 뇌물 등의 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대한민국에선 이런 일이 지난 15년 사이 3번이나 벌어졌다고 보도한다… 뉴스를 듣던 파란 눈의 소년 소녀가 부모에게 저 나라가 어디 있는 나라냐고 묻는다… 멈칫하던 부모는 우리 집 자동차가 저 나라 회사 제품이야, 너희가 쓰는 휴대폰도 저 나라 회사가 만든 거고, 월드컵 축구 때 저 나라 팀이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을 혼내줬단다…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노 전 대통령은 국민에 대해 '부끄럽고 민망하고 구차스럽다' 했다. 세계를 대하는 대한민국 국민 마음이 꼭 그대로다. 한국에 와 있는 외국 언론의 특파원들도 우리들의 이런 난감한 심정을 손금 읽듯 읽고 있다. '한국 대통령은 왜 이러느냐' '대통령 가족과 이권 청탁자들의 접촉을 감시할 수단이 그렇게 없느냐' '왜 대한민국 검찰은 정권이 끝나야 그 정권의 부패에 칼을 대느냐'는 난처한 질문을 줄줄이 물어왔을 텐데 이상스러울 정도로 잠잠하다.

노 전 대통령은 국민의 마음을 읽고 활용할 줄 아는 재주와 감각 덕분에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대통령 후보 경선 때 장인의 남로당 전력과 6·25 전쟁 시기의 행적을 묻자 "그럼 대통령이 되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버려야 합니까"라고 되받아 국민을 단번에 자기편으로 돌려놓았다. 선거법을 무시하는 발언을 의도적으로 되풀이해 국회의 탄핵결의를 불러오더니 다수당과 기득권 세력의 탄압을 받는 불쌍한 대통령 모습을 실감 나게 연기함으로써 일거에 총선 판도를 뒤바꿔 놓기도 했다. '정치인 노무현'은 4각 링에서 로프 반동을 이용해 비호(飛虎)처럼 뛰어올라 상대 급소에 하이킥을 날리는 프로레슬러를 연상케 했다. 정치 본능이 꿈틀대는 '정치적 야수(野獸)'였다.

그랬던 노 전 대통령이 생애 최대의 위기와 마주친 절체절명의 순간에 약고 영악한 '노 변호사'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국민들은 요즘 세계가 대한민국 대통령 관저 안방 탁자 위에 놓인 100달러짜리 100장씩을 묶은 100개의 달러 다발이 든 검은 가방을 지켜보고 있는 듯해 귀밑이 붉어진다. 이 더러운 사건을 창자 속까지 샅샅이 훑고 털어봤으면 싶다. 그런가 하면 이 부끄러운 장면이 1분 1초라도 빨리 흘러가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솟기도 한다. 이 모순된 두 감정이 국민 가슴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 판에 '노 변호사'는 "아내가 한 일이라 난 모른다. 사실대로 가자. 중요한 건 증거"라고 버티고 있다. "도덕적 책임을 지고 비판받는 것과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다르다. 국민들에게 주는 실망과 배신감의 크기도 다르고 역사적 사실로서의 의미도 다르다"는 논리까지 장만했다. 그리고 '노 변호사 사모님'은 "100만달러는 내가 빚을 갚으려고 빌렸다. 남편은 모른다. 그 빚이 무엇인지, 왜 달러로 빌렸는지는 말 못한다. 검찰이 수사해 봐라"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버티면 검찰이 적용하려는 형법 제 몇조의 무슨 죄목(罪目)을 피해갈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는지 모른다. 그 계산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노 변호사는 뭔가 잘못 짚고 있다. 국민은 증거를 찾는 게 아니라 진실을 찾고 있다. '노 변호사'가 직접 100만달러를 달라 했으면 국민의 실망과 배신감이 커지고, 부인이 그랬다면 줄어드는 게 아니다. 이 상황 속에서도 도덕적 책임과 범죄를 저울 양편에 올려놓고 재고 있는 모습이 더 낯뜨겁다. 어느 경우든 역사적 사실로서의 의미도 달라지지 않는다.

옛 지지자들은 오히려 부인이 한 일이라 자신은 몰랐다는 '바보 노무현'의 달라진 모습에 더 큰 충격을 받고 있다. 지금이라도 "내가 몰랐을 리 있겠는가. 내가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집사람 전화에 누가 100만달러를 싸들고 오겠는가" 하며 칼끝을 자기 몸으로 막고 나서야 한다. 한발 한발 아들 곁으로 다가서는 500만달러 문제도 본인 가슴으로 받아야 한다. 그게 노무현을 '바보'로 믿었던 지지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노무현 변호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돌아가야 한다.

 ♤ 이 글은 2009년 4월 16일자 조선일보 [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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