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넘어 멀리 보는 ‘정치경제학’ 기대한다
무섭게 불어쳤던 경제위기의 태풍은 큰 고비를 넘긴 것 같다는 안도감이 오히려 무책임한 안일함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이번 경제위기는 통상적인 경기침체나 불황이 아닌 국제질서와 세력균형을 구조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역사적 전환의 진통이기 때문이다. G20정상회의에서는 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적 공조 노력의 가닥이 잡혔다 하고, 한국을 포함한 주식시장은 활기를 되찾아 주가가 반등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위기 이전으로의 단순한 회복의 징조라고 오판하는 것은 경계해야 된다. 오히려 이번 위기의 극복 과정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새 시대의 규범과 체제를 창출하게 될 역사적 기회라는 국제적 흐름에 관심을 기울여야 될 것이다.
첫째로 이번 금융위기는 시장에서의 이윤 확대에 몰두한 나머지 공공이익을 보장하는 사회적 균형, 특히 중·저소득층을 위한 배분의 정의가 무시된 상황 안에서 벌어졌다. 그 때문에 새로운 위기 극복의 목표는 그와 같은 과거 상황으로의 복귀가 아닌 보다 넓은 사회정의의 실현으로 이어져야 한다. 런던 G20정상회의 직전 ‘세계 경제위기의 정치적 파장’을 주제로 열렸던 민주국가 지도자들의 모임에서도 경제 파탄을 막기 위한 공공투자가 얼마나 사회정의의 실현을 가져올지, 특히 중산층과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으로 어떻게 연계될 수 있을지에 대한 정책적 판단의 중요성이 강조됐다. 다른 한편, 국가재정을 동원한 시장개입이 설사 공공이익의 보호를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국가채무의 증가로 지워진 국민의 부담은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하는 어려운 정치적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치권에서도 심사숙고해야 될 대목들이다.
둘째로 이번 경제위기는 시장과 국가 사이의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원론적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시장의 파탄에 직면한 대부분의 국가는 공공이익의 보호를 위해 큰 저항 없이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했다. 그렇다면 과연 국가란 누구를 위해, 누가 운영하는,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지금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국가적 선택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는지 또는 국가권력의 비대화를 초래하는지를 가늠해야 되는 과제와 직결돼 있다. 민주주의의 성공적 제도화에 기여하는 이상적인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처방하려면, 정치·경제적 구조문제에 못지않게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적인 입장도 중요해진다. 그러기에 인간의 끊임없는 이윤 추구 욕망은 시장경제의 원동력이지만, 사회적 신뢰 없이는 시장의 존립과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설파한 애덤 스미스의 입장은 아직도 많은 것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 시장과 국가의 순기능적 관계를 어떻게 제도화시켜야 되는지는 오늘날 경제위기 극복과 민주주의 발전을 연계시키는 관건으로 부상하고 있다.
셋째로 이번 경제위기는 정치·경제 두 차원에서 국제질서를 새 시대에 맞도록 개혁시킬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그 과정에서 한·중·일 동북아 3국은 상당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됐다.
문명의 중심이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문명론적 담론은 차치하고라도, 3국이 보유한 달러의 규모가 세력균형 재편 과정에서 동북아의 위상을 예고하고 있다. 다만 유럽도 아직 완전히 풀지 못하고 있는 과제, 즉 빠른 경제통합과 느린 정치통합 사이의 간격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과연 동북아 3국이 얼마나 빠르고 슬기롭게 풀어갈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효율성 높은 경제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구촌은 물론 아시아공동체, 그리고 한반도의 바람직한 미래를 개척하는 열쇠는 세 나라의 지도자와 국민의 현명한 정치적 선택에 달려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위기를 넘어선 비전을 정치경제학의 새 장(章)에 기록하고 싶은 것이다.
♤ 이 글은 2009년 4월 19일자 중앙일보 [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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