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르핀 과잉사회가 남긴 것
매일같이 알을 낳아야하는 양계장의 닭들은 생산성향상을 위해 적당한 성적 흥분상태를 유지시켜주는 백열전구의 불빛세례를 받는다. 요즘에는 깻잎도 생산성 향상을 위해 밤에 잠을 재우지 않는다. 제대로 잠을 못잔 닭과 깻잎이 신경과민에 시달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그런지 양계장 닭의 폐사율은 자연산 산란계에 비해 매우 높다.
성장 중심사회의 후유증은 흥분상태를 유지해주는 엔도르핀(신경호르몬)호르몬 과잉현상이 아닐까한다. 일종의 진통효과가 있다는 이 호르몬은 정신과 의사의 언급에 의하면 약간의 마약 성분까지 있어서 시간이 갈수록 강도 높은 자극을 요구한다. 산란욕구를 촉진시키기 위해 잠 안 재우는 양계장의 닭처럼 신자유주의를 구가해왔던 우리의 생산성 중심, 성장 중심 사회의 모든 시스템은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적당한 흥분을 고조시켜왔다. 신경과민이 된 사람들은 성난 표정으로 세상만사와 대면한다. 지나친 경쟁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렸고, 만연한 불신풍조는 정부의 어떠한 선의의 정책발표에도 코웃음 치게 만든다. 한쪽에서는 높아진 부동산의 자산 가치와 치솟는 주가지수에 흥분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소외와 열패감에 떠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 복합된 버블과 상실의 열풍이 내면의 에너지를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 월드컵 때의 대. 한. 민. 국이 아닌가 싶다. 대. 한. 민. 국에서 시작된 마취적 흥분상태는 사회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융합시키는 데에도 기여를 했다. 그러나 한 번 폭발된 엔도르핀 과잉현상은 작년 광우병 파동의 촛불 시위로까지 나아갔다. 성장위주의 사회에서 만들어낸 극단적인 자극들이 제동능력을 잃은 경우다. 이 엔도르핀 과잉현상의 끝 간 데가 나의 생각으로는 요즘 TV를 풍미하는 ‘막 나가는’ 드라마가 아닐까 한다.
대중가요도 ‘총 맞은 것처럼’과 같은 초자극적 가사가 히트가요가 되더니 불륜과 범죄, 황당무계로 얼룩진 ‘아내의 유혹’ ‘꽃 보다 남자’가 사상최대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아내의 유혹이 시청률갱신을 거듭하고 있는 시점에 사회 한 켠 에서는 조용한 성찰의 물결이 머리를 들고 있다. 인체에서도 지나친 자극을 가라 앉혀 주고 편안한 기쁨을! 신장시켜주는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작용하듯 막나가는 드라마들도 보이지 않는 도전을 받고 있다.
영화관에는 한 늙은 소와 할아버지의 인연이 가슴 저리게 그려진 잔잔한 감동의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가 독립영화 사상 초유의 2백만 관객을 넘기며 상영되고 있다. 그뿐인가. 지하철 ‘서울역’에서 불현 잃어버린 엄마 이야기를 담담한 필치로 그려낸 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50만부를 돌파했고, 강부자 주연의 연극 ‘친정엄마와 2박3일’이 연일 매진사례다.
성장 중심의 사회에서 잠시 잊어버렸던 삶의 의미와 구원을 사람들이 갈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도 우리사회의 엔도르핀 과잉현상을 누그러뜨리는 데 기여했다. 이웃을 섬기며 배려하고 나누는 소위 ‘바보’같은 생애를 살아도 존경받는 삶이 있음에 그냥 정처 없이 생산성의 고지를 오르기에 바빴던 모든 이들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시인의 두 줄짜리 시의 행간이 말해주듯, 비로소 경제가 하산길에 이르자 사람들이 바빠서 보지 못했던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사회 여기저기 엔도르핀 과잉현상이 움츠러들고 세라토닌 호르몬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노조 도 자성하고 있고 정치인들을 뺀 많은 국민들이 너무 자만했다고 반성하고 있다. 역설적일지 모르지만, 나빠진 경제가 이런 효과에 한몫을 하고 있다. 경제가 나빠졌다고 모든 문제의 해법이 물질에 있다고 믿는 건 세상의 진정한 이치를 모르는 자의 교만이다.
엔도르핀과잉 사회의 문화현상을 거꾸로 읽어보면 이 어려운 시국을 풀어 낼 큰 그림을 그려 낼 수 있지 않을까.
♤ 이 글은 홍사종 교수님께서 재단으로 보내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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