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의 비극, 한국인의 불운
지금 우리 국회는 없는 셈
역사적 퇴행의 길을 걷는 중
"농민은 침몰하지 않는다. 중산층은 사라지지 않고, 공황은 더 이상 커지지 않고, 빈곤과 노예화는 증가하지 않는다. 사회의 안전과 상호의존, 그리고 재산소유자의 기능은 증대하고 있다."
1898년 독일 사회민주당(SDP)의 정책지도자였던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은 당 기관지 '신 시대(Die neue Zeit)'에 이렇게 설파하며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수정(修正)논쟁을 일으켰다. 마르크스적 혁명의 전제조건이 되는 양극화, 노동자의 궁핍화, 계급투쟁은 격화되지 않고, 자본주의는 더 불안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폭력적 계급혁명으로 정권을 얻으려는 당의 전략은 자멸하는 길이다. 근로계급정당인 SDP는 헌법적 방법, 곧 의회주의를 통해서 개혁을 이루어야 하고 중산층의 지지를 얻어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념은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박해 속에 살아남아 현재의 유럽좌파정당의 정강(政綱)으로 뿌리내렸다. 이들은 계급정당이 아닌 시민정당임을, 폭력혁명이 아닌 의회적 수단으로 집권할 것임을 천명한다. SDP는 오늘날 민주사회당, 기독교민주당, 기독교사회당 등 모든 서유럽 진보정당을 통칭하는 대명사가 됐고, 우파보수정당보다도 자주 집권하며, 서구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최대의 정치세력이 됐다.
21세기 오늘날 한국의 제일 야당인 민주당은 역사적 퇴행(退行)의 길을 걷는 중이다. 광우병 촛불집회 때는 불법시위대의 들러리를 서려 애썼고, 그 뒤 국회 구성을 한사코 저지했다. 국회에 들어와서는 의사당 바닥에서 먹고 자고 쇠사슬로 몸을 묶고 모든 법안상정을 차단하고 급기야 쇠망치와 톱으로 국회를 난행하는 전과(前科)를 저질렀다. 18대 민주당 의원들은 국회를 존중한다는 증거를 보여준 적이 없다. 그들의 협조 거부로 현재 2422건의 법안이 국회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엊그제 여당이 마침내 미디어 관련법의 상정을 강행했는데, 이제 민주당은 다시 국회를 무단점거하고 노조, 시민단체 등 이른바 '민주세력'과 연합해 장외투쟁할 생각인가?
이런 야당은 민주당 자신의 비극이며 한국정치와 국민의 비극이다. 첫째, 민주당은 진정 수권(受權)을 노리는 정당인가? 엊그제 나온 KBS 여론조사에 의하면, 지난 1년 이 정부의 온갖 졸정(拙政)비난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지지율(16.6%)은 한나라당(35.4%)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우리 사회가 100년 전 유럽보다 미개하지 않다면 국회를 사보타지하고 길거리투쟁세력에 업혀 집권을 꿈꾸는 정치집단에 기회를 줄 리 없다. 민주당은 아마 지난 일 년의 행태로 우리 사회 지식층과 중산층의 지지를 거의 다 잃었을 것이다.
둘째, 무능한 야당의 존재는 여당의 나태와 일탈을 불러온다. 집권당이 아무리 자기들끼리 싸우고 헛발질을 해도 국민에겐 대안이 없다. 경쟁이 없는 여당은 파벌싸움으로 세월을 보내고 당파이익을 위해 국가정치를 농락해도 정권을 잃을 염려가 없다. 결국 최후의 희생자는 국민이다.
미증유의 세계경제 대란을 맞이한 우리가 하필 이 시기에 민주당과 같은 시대착오적 야당을 가진 것은 실로 국민의 운(運)이 짧은 탓일 것이다. 최근 민주당의 일부 중진의원들이 "길거리투쟁, 반대를 위한 반대만으론 국민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자성(自省)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늦게나마 이런 발언이 들리는 것은 민주당이나 국민을 위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민주당의 변화는 반성이 아니라 과거 가두투쟁과 국회 파행 행태를 진정으로 성찰하고 사과함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국회 부정주의가 지배하는 민주당에 용기 있는 자들이 나서 일신의 힘을 던지는 당 노선의 수정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들은 살아 있는 정당이라고 말할 수 없다.
♤ 이 글은 2009년 2월 26일자 조선일보 [시론]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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