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꺼번에 들이닥친 세계적 경제위기는 고통과 불안 속에서 일자리를 잃거나 소득이 턱없이 줄어든 국민들의 일상적 어려움을 날로 가중시키고 있다. 더욱이 세모는 어둡고 새해의 전망조차 밝지 못하고 보니 지금까지 해오던 국가운영 방식으로는 이 위기를 쉽게 풀어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즉 발전의 한계에 부딪혔다는 걱정이 이심전심으로 대다수 국민의 의식 속에 자리 잡혀 가고 있다. 무작정 열심히 일하고 애국심을 발휘하던 원초적 덕목만으로 헤쳐갈 수 있는 통상적 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발상의 대전환 없이는 대한민국의 생존과 지속적 발전을 기약할 수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성취했음에 대해 자축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맞은 경제위기는 바로 그 잔치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산업화와 민주화, 즉 경제와 정치의 발전이 새로운 의미와 내용으로 채워지고 이해되지 못한다면 과거사의 기록만으로 남을 뿐 역동성과 경쟁력을 갖춘 국가발전의 청사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해야 될 시점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시대착오적 이념의 갈등이 자아내는 오해와 분열을 뛰어넘어 우리의 공동체를 선진국가로 도약시킬 절호의 기회를 위기 속에서 맞고 있다.
우선 지난날에 고질화되었던 이분법적 이념대결이 산업화 또는 경제발전의 차원에서도 이미 시효가 지났음을 인정해야 한다. 첫째, 경제의 국가주도냐 시장주도냐 하는 논쟁이 더 이상 무의미함을 이번 경제위기는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정부가 금융위기를 비롯한 경제파탄의 해결과 구제를 위해 적극적인 시장개입에 나섬으로써 시장과 국가의 역할을 이분법적으로 처방하던 시대가 끝났음을 알려주고 있다. 근래에 우리 정부가 규제완화와 시장의 자율성을 강조함으로써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혼란을 자초했다면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 지난날 한국의 산업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정부의 주도력이 작용한 결과임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아 정부의 주도력과 시장의 창의력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대한 모범답안이 마련된다면 이는 우리 경제뿐 아니라 세계 경제에도 큰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성장과 분배의 우선순위를 둘러싼 지루한 논쟁이나 대결도 한국적 특수성을 감안한 새로운 융합모델을 개발하고 이제는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상당한 수준의 성장 없이는 국가와 국민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국제경쟁에서도 탈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어떻게 커져가는 빈부의 격차를 막고 국민의 복지수준을 보장·향상시키느냐 하는 것인데, 다행히 우리의 정치문화에선 함께 고루 잘사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적 가치관이 널리 수용돼 있어 성장과 분배를 적절히 융합하는 해결책을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한마디로 한국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불공정한 분배를 예방하고 최소화하면서 선진화에 성공하자는 국민적 합의와 타협의 여건이 비교적 성숙한 사회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을 위해서는 타협이 아닌 대결을 북돋는 이념의 교조화나 극단적인 정치세력화의 확산을 막아야만 가능할 수 있다.
사회적 및 경제적 차원에서의 민주주의의 실현을 어떻게 정책화하느냐 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고 시급한 사안은 대한민국의 집단적 의사결정을 어떻게 하는 것이 과연 민주적이냐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다. 특히 소수집단이나 소수정당에 어느 정도의 비토 파워, 즉 거부권을 부여할 수 있느냐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헌법 논의의 차원에서 이른 시일 내에 이뤄져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대원칙인 다수에 의한 통치와 소수의 권리보장을 과연 한국 정치에서는 어느 정도로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 분명한 헌법적 근거보다도 불투명한 관행, 특히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인 관행이 우선한다면 결국 법치보다 인치(人治)가 우선하는 상황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중대한 선택에 대한 국민적 의사를 결정해야만 될 시점에 도달해 있다. 그러기에 이번 경제위기를 사회위기, 정치위기로 연쇄되는 총체적 위기라고 하는 것이다.
♤ 이 글은 2008년 12월 29일자 중앙일보 [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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