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수 있는가
지방의원·교육감들의 줄잇는 부패·일탈
'가진 자' 지지받는 보수정권 도덕성 무너지면 끝장
지난 18일 서울시의회 의장과 그의 돈 봉투를 받은 시의원 28명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100만~500만원의 돈을 뿌린 시 의장은 공판에서 "시간만 있었다면 한나라당 시의원 102명 전원에게 돈을 줬을 것"이라고 놀라운 고백을 했다. 같은 날 서울시 중구의회의원 9명 중 6명도 의장 선출을 앞두고 성 접대를 받은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10월 8일에는 검찰 조사를 받던 경상북도교육감이 사퇴했다. 교육감이 되면 학원운영자의 편의를 봐주고, 교직원 인사잡음을 묵인하기로 하고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다. 13일, 인사청탁 대가로 뇌물수수를 조사받던 충청남도교육감도 사퇴했다. 현재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은 야당으로부터 선거자금과 관련해 특혜를 줬다는 시비를 받고 있다. 그는 학원 운영자를 비롯해 사립학교재단, 20여 명의 교장·교감, 학교급식업체 등 이익관계자들의 돈을 후원받거나 빌려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그 하나하나가 한국의 풀뿌리 민주주의에 조종(弔鐘)을 울릴 만한 공직자 범죄행위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적 신분이 높은 이는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진다)를 말하기조차 낯뜨겁다. 이런 정치인들에게 맡기는 지방자치는 과연 옳은 제도인가. 이렇게 뽑힌 교육수장들이 펴는 교육정책을 국민이 믿겠는가. 우리 민주주의체제의 근본을 위협하는 이 사건들이 지금 한국 경제의 패닉 분위기에 묻혀 속절없이 잊혀가는 중이다. 나타난 것이 이 정도라면 오늘날 전국 지자체에서 자행되는 총체적 부패, 비리와 유착양상은 대체 어떤 모습일지 두렵기까지 하다.
한국은 그간 반세기 만에 이룬 경제적 근대화와 민주주의 정치의 업적을 자찬해왔다. 그러나 정치가 부패하면 아무리 허울 좋은 경제력과 법적 제도라도 좀먹은 기둥처럼 무너지기 마련이다. 현재 한국의 정치주역은 보수기득 자유민주주의세력이다. 이 '가진 계층'의 힘은 '깨끗함'에서 나온다. 그런데 보수 정권 출범 초부터 그들의 치명적 약점인 부패와 일탈이 때를 만난 듯 넘쳐나고 있다. 비록 한국 기득권 세력의 오염이 어제오늘 쌓인 것은 아니지만 그 청소는 오늘의 정권이 책임져야 한다. '혁명'에 준할 만한 보수정치집단의 개혁이 없는 한 현 정권은 지금 당면한 민주주의 위기나 경제위기를 극복할 힘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개혁의 출발은 말할 것도 없이 '법치의 실행'이 돼야 한다. 공직자 범죄일탈행위는 무겁고 가차없는 법집행만으로 상당히 예방할 수 있다. 이른바 '50배 과태료 선거법'으로 지난 수차례의 선거에서 불법선거를 차단한 업적을 보라. 이 법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200만원 미만의 봉투를 받은 20여 명 서울시의원은 1심재판 선고형량인 60만~80만원의 벌금이 아니라 5000만~1억원을 물어내야 한다. 500만원 받은 자는 2억5000만원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이런 법 제재에 누가 감히 뇌물을 받겠는가.
이명박 대통령 역시 "공직자 뇌물에도 50배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대선공약을 했지만, 그후 법무부의 처벌법개정안은 2~5배의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을 담는 데 그쳤을 뿐이다. 이 법이나마 향후 제대로 집행되겠는가? 검찰, 법원이 재량해주고 대통령이 사면해주고 온정주의와 인기영합주의가 큰소리치는 사회에서 법은 항상 예외와 이완(弛緩)의 구실을 찾을 수 있다. 결국 정부가 양보하는 법집행과 원칙후퇴만큼 사회적 일탈을 유발할 것이며, 그 책임은 당연히 정부가 져야 할 것이다.
정치개혁은 기본적으로 국회의원과 정치가들이 이끌고 가야 할 과제다. 국민은 그들이 지난 촛불집회, 국회구성과 국정감사에서 보인 모습을 모두 기억한다.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가 '비례대표 공천대가' 6억원을 받은 혐의로 아홉 차례나 검찰조사를 요구받고서도 철저히 법과 공권력을 무시했을 때, 국회는 그의 체포동의안을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법 제정 기관이 스스로 법집행을 막고 국회법을 어기고 집단이기주의자가 된 것이다. 향후 이들에게서 과연 변화된 모습과 부패 척결의 입법의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민주정치의 토대가 붕괴된다면 그 책임은 일차적으로 현 정권의 지도자들이 져야 한다. 그들은 한국정치 타락의 심각성이 더는 미룰 상황이 아님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2008년 10월 23일자 조선일보[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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