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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민] 힐 차관보의 한계
 
2008-10-17 11:46:27

'北 동의없인 사찰 불가능'
완전 비핵화는 요원한가

지난 11일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로 북한이 불능화조치를 재개하고 핵검증 합의를 이끌어낸 것은 다행한 일이다. 도대체 테러지원국이 무엇이기에 미국의 입장 하나하나에 북한이 롤러코스터처럼 화내고 기뻐하는 널뛰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화가 잔뜩 나 있던 북한과 미 정계의 불만을 어떻게 조화시키고 합의를 이끌어냈는지 '협상의 달인' 힐(Hill) 차관보의 마술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미국의 명단 해제 발표를 들으면서 문득 두 가지 생각이 났다. 하나는 '테러문제의 당사자는 누구인가'이고, 또 하나는 17년 전 남북이 합의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다.

바그다드를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858편은 1989년 11월 21일 오후 2시1분 미얀마 부근 인도양 상공에서 갑자기 교신이 끊어진다. 115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부분 중동근로자였던 그들은 열사(熱砂)의 나라에서 피땀으로 번 달러를 가지고 가족을 만난다는 부푼 꿈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포함시켰다. 사실상 한국은 테러문제에 있어 중요한 당사자다. 납치, 아웅산 폭파, 무장 게릴라 침투, 청와대 기습사건 등 한국의 현대사는 북한의 테러로 얼룩진 역사다. 북한 테러의 99%는 한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미국은 테러지원국 명단해제에 있어 납치문제를 제기하는 일본을 해제 발표 30분 전까지 설득하고 일본인 납치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과거 한국 정부들은 남북관계를 위해 테러문제를 덮으려고만 해왔다. 햇볕의 논리 아래 테러 피해자인 개개인의 인권은 무시되고 피눈물나는 가족의 분노만 남겼다. 선진민주국가 대한민국에서 대의를 위해 개인의 인권을 희생하는 일이 더 이상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는 미국의 주권사항이지만, 남북 간의 테러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489명의 납치 피해자와 생존이 확인된 546명의 국군포로가 조속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1991년 12월 남북한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통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이를 검증하기 위한 동시사찰에 합의한다. 그런데 합의문에는 '일방이 정하고 쌍방이 합의하는' 대상에 대해 사찰한다는 구절이 있다. 즉 북한의 동의 없이는 어떤 대상도 사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찰은 본래 숨기려는 것을 찾는 것인데 동의 없이 어떤 대상도 사찰할 수 없다면, 투명성은 물 건너간 이야기다. 이 묘한 구절이 지난 11일 미국의 발표문에서 다시 살아났다. '신고되지 않은 시설에 대해서는 상호 동의에 의해 접근'한다는 구절이다.

이번 합의를 통해 미국 협상팀이 지향했던 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위기의 핵심사항인 우라늄 농축도 빠졌고 핵무기도 다루어지지 않았다. '패쇄' '불능화' 등 매력적인 언어를 구사했지만, 단지 영변 핵활동을 동결시켜 플루토늄 핵폭탄의 추가를 막는 것이다. 바로 14년 전 미북 제네바 합의의 출발점이다. 부시 정부 8년간 북한은 핵실험까지 단행했고 핵무기 수를 늘려 왔다. 힐 차관보의 마술은 여기까지다. 20일 남짓 남은 미 대선 결과 등장하는 차기 미 정부가 과연 어떠한 입장을 취할지 주목된다. 어떠한 입장이든 분명한 점은 우리는 상당기간 북한 핵무기와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되면 국제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파산상태인 경제를 재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국제금융기관은 시혜를 베푸는 곳이 아니다. 돈을 떼일 곳에는 절대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명단 삭제로는 부족하다. 북한에 확실한 체제전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즉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의 추진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본격적 지원은 없다는 점을 북한은 인식해야 한다.

♤ 이 글은 2008년 10월 15일자 조선일보[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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