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13일 첫 대국민 라디오 연설을 했다.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춰 세계적 경제위기를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겠다는 의도에서 실시한 것이다. 연설 자체에 대한 가치 논쟁과는 별도로 연설에서 나타난 키워드는 ‘배려, 신뢰, 희망’으로 집약된다. "비올 때 우산을 빼앗지 말라.”는 말로 “건실한 기업이 일시적 자금 경색으로 흑자 도산하지 않도록 금융기관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한 “신뢰야말로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라고 밝혔다. 연설 말미에는 “우리에겐 희망이 있고, 대한민국 미래는 여전히 밝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 대통령학 연구의 권위자인 노이슈타트 교수는 “대통령의 힘은 권력이 아니라 설득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대중을 설득하기 위한 지도자의 연설에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에서 던진 핵심 메시지는 ‘우리 경제가 어렵긴 하지만 IMF 외환위기 때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메시지는 금융위기가 시작된 이후 정부가 줄곧 국민과 시장에 전파해 온 내용이어서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현 정부의 철학과 존립 이유를 관통하는 핵심 컨셉트가 정립되어 있지 않아서 ‘메시지 부재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보여진다.
마케팅 이론에 따르면 시장에서 성공한 상품의 공통적인 특징은 컨셉트(CONCEPT), 콘텐츠(CONTENT), 일관성(CONSISTENCY)과 같은 3C를 두루 갖춘 제품이다. 확실한 개념이 정립되어야 콘텐츠를 채울 수 있고 일관성 있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현 정부가 집권 초기부터 크게 흔들린 것은 좌파세력의 저항과 촛불 때문이 아니라 국민을 설득해서 이끌어 갈 수 있는 ‘국민 감동 컨셉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747 (7% 성장,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강국)로 상징되는 MB노믹스, 한반도 대운하 등 현 정부가 줄곧 내세웠던 핵심 컨셉트가 무너진 상황에서 이를 대체할 만한 컨셉트가 부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가 ‘녹색성장’을 제기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녹색 성장’ 컨셉트는 국민의 가슴에 불을 지를 만큼 강렬한 것이 아니다.
현시점에서 이명박 정부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장밋빛 희망 제시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집권기간 내내 흔들림 없이 추진할 수 있는 핵심 컨셉트를 구축하는 것이다. 최근 정부는 신성장 동력 22개 과제를 발표하면서 “88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100대 국정과제가 성공적으로 완료될 경우, 7% 성장과 300만개 일자리 창출이 가능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대통령이 된 만큼 현 정부의 핵심 컨셉트는 국민의 피부에 와 닿는 경제와 연계된 정책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자리 창출’이 적실성이 높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대통령도 라디오 연설에서 “일자리를 지키고 늘리는 일은 여전히 국정의 최우선 과제이다.”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이 말하면 ‘신뢰가 간다.’(30.9%)보다 ‘신뢰가 가지 않는다.’(56.9%)는 응답이 두 배 가까이 많았다. 더욱이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40대(29.4% 대 57.5%), 중도(24.0% 대 62.9%), 화이트칼라층(30.2% 대 61.0%), 자영업자층(32.7% 대 56.0%)에서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비율이 훨씬 많았다.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이렇게 약한 상황에서 정부가 국민이 공감하는 컨셉트를 만들고 그 내용을 채워 일관성있게 추진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길은 정부가 기교를 부리지 말고 정직하게 행동하고, 국민과 호흡하면서 국민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듣는 것이다.
♤ 이 글은 2008년 10월 15일자 서울신문[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번호 |
제목 |
날짜 |
---|---|---|
505 | [전상인] 박사의 나라 | 08-11-26 |
504 | [유호열] 미국대선과 한반도 | 08-11-21 |
503 | 선진화를 위한 10대 과제 시리즈(2) - (10대 국가과제-1) 바른 역사관의 정립 | 08-11-14 |
502 | [김영봉] 法治(법치)가 국가브랜드 가치 높인다 | 08-11-13 |
501 | [김일영] 오바마 시대<5·끝>오바마 당선의미 ‘아전인수’ 말아야 | 08-11-11 |
500 | [윤덕민] 한미 대북정책 조율이 먼저 | 08-11-10 |
499 | [안세영] 오바마시대 한·미통상의 오해들 | 08-11-10 |
498 | [남상만] 웃는 얼굴로 외국인 관광객 사로잡자 | 08-11-10 |
497 | [김영봉] 수도권-비수도권이 싸울 때인가 | 08-11-10 |
496 | [이인호] 오바마의 미국이 보여주는 것 | 08-11-03 |
495 | 선진화를 위한 10대 과제시리즈(1)- '대한민국, 선진국 되려면?' | 08-10-31 |
494 | [이인실] 위기극복 관건은 신뢰회복 | 08-10-27 |
493 | [이홍구] 금융위기는 곧 정치위기다 | 08-10-27 |
492 | [김영봉] 우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수 있는가 | 08-10-27 |
491 | [이홍규] 규제개혁 속도 높이기 | 08-10-22 |
490 | [윤덕민] 힐 차관보의 한계 | 08-10-17 |
489 | [김형준] 연설보다 컨셉트가 우선이다 | 08-10-17 |
488 | [이인실] 비오기 전 우산 준비해야 | 08-10-17 |
487 | [김원식] 국민연금 총체적 개혁 절실하다 | 08-10-17 |
486 |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시리즈(6) '누가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 08-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