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꼭 9개월이 됐다. 집권 초 시급한 과제가 산적했으나 촛불시위에 가려 어수선한 시간을 보냈다. 남북관계 역시 당국 간 대화가 중단된 가운데 경색 국면을 면치 못하다 급기야 지난 7월 발생한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금강산 관광마저 중단되었다. 그동안 새 정부는 ‘상생과 공영’의 틀 속에서 대북정책을 재정립하고 나름대로 남북관계의 복원을 위한 계기 마련에 부심해 왔으나 가시적 성과는 없다.
지난 60년간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남북관계는 국정 최우선 과제 중의 하나였다. 냉전시기에는 남침을 억제하고 남북한 체제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목표였고, 탈냉전 시기에는 화해와 교류협력의 증대가 주된 목표였다. 냉전시기 우리의 대북정책의 화두가 ‘선건설 후통일’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단연 ‘햇볕정책’이다. 선건설 후통일과 햇볕정책은 각기 그 시대정신을 함축하며 뜻한 바 목표를 달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선건설 후통일의 기치 아래 남침 위협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며 남북 간 체제경쟁에서 승리했고, 또한 햇볕정책을 통해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각종 남북 간 대화 및 교류협력이 이뤄졌다.
그러나 2008년 9월은 기존의 남북관계 담론구조로는 더 이상 담을 수 없는 새로운 시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햇볕정책은 북한체제가 실패한 정권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재와 중국의 지원 때문에 북한체제가 붕괴하지 않을 것을 상정하였다. 북한 핵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 반면 흡수통일 역시 추진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정책의 기본 전제가 흔들리면 목표 변경은 불가피하고, 이에 따라 이행 수단과 전략 역시 바뀌어야 하는데 그런 시점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핵불능화 중단과 원상복구를 선언한 북한의 핵정책은 핵을 포기하기보다는 핵을 보유하되 관리 가능한 수준과 차원에서 미국과 타협함으로써 생존을 모색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김정일의 와병설로 포스트 김정일 체제의 등장이 가시권에 진입했으며, 북한 내부의 급변사태 발생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리에 마무리한 중국은 이제 자의든 타의든 세계 주도적 국가로서 한반도 정세에도 과거와는 다른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이 같은 정세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햇볕정책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상생과 공영’ 정책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하지 않고 목표 역시 시대정신을 담지 못하고 있다. 60년 동안 1인독재와 만성적 빈곤, 그리고 최악의 반인권 국가인 북한은 개방도 않고 핵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북한을 변화시키지 않고 상생과 공영한다는 것은 국민의 여망에 따라 정권 교체를 이룩한 새로운 정부의 대북정책으로서의 정당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북한이 비핵화하고 개방하면 지원하겠다는 발상 역시 우리 스스로 북한을 개방시킬 의지와 전략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냉전시대 만들어진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덧붙여 ‘행복공동체’까지 구상하는 수준으로는 21세기 한반도의 미래를 열어갈 수 없다.
완고한 북한을 상대로 교류협력을 통해 언젠가 달라질 것을 막연히 기대하거나 무조건 줘서 달래는 햇볕식의 정책은 이제 접을 때가 됐다. 북한체제는 변화해야 하고 변화될 수 있고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새롭고 자신감 넘친 대북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작계 5029도 그런 개념에서 작성돼야 하고 중국과 미국 등 주변국도 같은 논리로 설득해야 한다. 하루속히 우리 국민들 의식 속에 뿌리박힌 ‘햇볕’류의 패배주의를 걷어내고 북한의 인민들과 신세대 엘리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책무가 현 정부에 있다.
♤ 이 글은 2008년 9월 24일자 세계일보[통일논단]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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